조봉연(79) 할머니는 삼평리 할머니들 사이에서 알뜰하기로는 일등이다. 할머니는 많은 것을 소비하지 않고 많은 것을 필요로 하지도 않았다. 농사는 할머니가 먹고 자식들에게 조금씩 나눠줄 만큼만 짓는다. 절약을 위해 한겨울에도 난방은 물론 온수도 잘 쓰지 않는다. 그렇게 평생을 모은 재산이라고는 땅밖에 없는데도 나이 든 몸으로 땅을 일구기 힘들다고 다른 사람들에게 나눠주기도 했다.
삼평리에는 농사에서 손을 떼 약간의 집안일 외에 별달리 힘든 일은 하지 않는 할머니도 있지만, 조봉연 할머니는 팔십을 앞둔 나이에 허리와 무릎이 성치 않은데도 여전히 새벽같이 일어나서 농사를 짓는다. 할머니는 농사와 허드렛일이 몸에 배 매일 아침 분주하다.
할머니의 습관은 평생에 걸쳐 굳어졌다. 삼평리로 시집올 당시 넉넉지 못했던 살림과 그 시절 가족으로 치더라도 많은 편이었던 아홉 명의 뒷바라지를 해야 했기에 할머니는 아끼는, 그리고 쉴 새 없이 일하는 습관이 들 수밖에 없었다.
아홉 명을 뒷바라지한다는 것은 그것만으로도 전쟁이었다. 겨울철, 몸을 떨며 개울가에서 빨래하다 물에 비친 당신의 모습을 볼 때면 괜히 서러운 마음이 들어 숨죽여 울기도 했다. 힘든 세월을 보내고 좀 쉴 때도 됐건만. 하지만 할머니는 몇 년 전부터 삼평리에 들어선다는 송전탑을 막기 위해 질긴 싸움을 시작해야 했다.
노쇠한 몸을 던져가며 막았다. 하지만 대도시에 전기를 보내기 위한 거대한 송전탑 건설은 강행됐고 결국 높은 산등성이에 섰다. 거기서 송전탑은 할머니가 평생을 일군 밭과 집을 내려다보게 됐다.
풍각 덕양에서 시집왔시오. 동네 이름이 가양이라서 그래 가촌댁이라 칸다. 가양서 클 적에 6․25가 터졌어. 동네에서 피난가라 카데. 그래가 딴 동네 가가 좀 살기도 했다. 가양까지 북한 사람이 내려오진 않았어. 우리 시절에는 고상 많이 했다. 비행기 날라 댕기는데 그 난리 지기면서도 먹고는 살아야지. 양식도 적고 애를 많이 뭇지요. 보리 갈면 보리 먹고 쌀은 쪼깨만 먹고. 그러면 빨갱이들이 산에서 내려 왔다가 개울로 가고 생 놀음 지기고.
시집오니 여기도 전쟁이라요. 내 스무 살 먹고 이 집으로 시집왔어. 이제야 아들 내외가 와서 약 쳐주면 감 쪼깨 짓고 하지마는 여기 시집올 적에는 감 농사, 배 농사, 복숭농사도 짓고 오만 거 다 지었다. 그것만 했나. 비 짜고 삼 갈아서 옷 해 입히고 바늘 이래 손가 다 꼬메고 했지. 애 업고 일 했어. 할매가 계시니까네 할매도 한 명 업고 나도 업고.
그때는 미느리는 찍소리도 몬 한다. 친정 함 갈라카면 시부모 허락받고 시조모 허락받고 신랑한테 허락받고. 하나라도 못 가구로 하면 못 가는 기라. 후드끼 나가까바 쩔쩔매고 살았지 뭐. 우리 시절에는 쌀이 귀해서 밥을 잘 못해가 보쌀이랑 쌀이랑 섞으면 시조모가 보리밥 준다고 야단난다. 친정에는 일 년에 한 번쓱도 못 갔지. 시조모가 좀 별났어. 요새는 판 커다란 거 펴가 한곳에 안 자시는교. 전에는 채릴 것도 없는 걸 전부 따로 판을 채리야 되는 기라. 아랫방에 가가야 되고 큰방에 가가야 되고 뜨물도 아즉마다 끼리야 되는 기라. 이 방 저 방에 그거끼리 줄라면 얼매나 바쁘노. 시누이가 그런 거 잘 도와주나 동서도 없고.
질쌈도 해야지. 집안일은 밤에 하고. 빨래 삶아가 씻고 뚜드리 패가지고 손가 꿰매고 다래비가 또 다리고. 일 산더미로 했다. 저기 저 도랑에 물 안 좋으나. 거게 빨래이고 가가 씻었지. 그때 장갑이 어딨는교. 겨울에는 손이 얼어 빠지지요. 시집오고 얼마 안 돼가 빨래 씻으러 가니 너무 추버가꼬 울었다. 어찌 그래 추분지. 때가 지는가 안 지는가 그것도 안 비는데 우니라고. 빨래하면 친구 만날 때도 있고, 내 혼자도 하고. 어른들이 그만치 있으니 빨래가 얼마나 많은교. 옛날에 팔찌 맨치로 찌던 토시까지 다 씻어가 꼬매야 됐다. 새벽같이 일어나가지고 열두 시 전에는 못 자지 뭐. 양말 같은 거는 요새야 잘 떨어지나. 그때는 잘 떨어졌거든. 그때는 내들 꼬매고, 할매들 벗신 같은 거 내들 꼬매고. 열두 시 전에 몬 잔다 그래 새벽에 또 일나야 되고.
시집살이하면 마실도 못 가고, 동무 만날 여유도 없고. 빨래하러 가야 한 번 만나지. 며느리면 내들 집에 들어앉아 있어야지. 요새 사람 같으면 한 달도 안 산다. 영감이 잘해서 나았지. 우리 시어마시도 내 고상한다고, 없는 집에 와가 산다고 나한테 잘했다. 친정서는 죽을 안 끼맀는데 여 와가 죽끼릴라 카니 못끼리 죽겠더매. 밥을 못 먹고 죽끼리가 먹었다카니. 밭 있어도 식구 많아가지고. 묵을 게 어딨는교. 요새는 비료도 많고, 곡식도 씨도 좋고 하지만 그때는 생산이 많이 안났다카니. 그때는 보릿고개 와가지고, 비 와가지고 싹이 요만치쓱 나는데 보리 묵을게 어딨노. 시이모가 외삼촌하고 몇 분 오면 닭을 한 마리 잡아가지고 국을 끓이 놔. 우리 시어마시가 내게 건더기를 쪼매 넣어 준다카니. 어른이 많아서 돌아갈 게 없는데 시어마시가 건져 줘. 그래가 이래 같이 판에 묵으면 나는 “어무이 아직 지는 젊으니까 어무이 많이 잡수소. 내가 이게 넘어갑니까” 카며 다시 건져줘.
우리 시조모가 장에 가가 먹을 거를 사오면 반갑다 카고 옷 사오면 싫다고 카이. 시조모 시집 살고 일 씨고 하니 옷도 잘 떨어지는데 시어마시가 내 옷 하나 사가 오면 우리 시조모 못 보게 짚에 재어 놔. 거기 옷을 꾹 처박아 놨다가 저녁 묵고 어두울 적에 우리 시조모 모르게 내방에 던져 놓았다 카이. 우리 친정엄마보다 더 좋더라. 그래 고상을 하고 고상한 거 이바구를 좀 할라 캤더만 다 앞에 가뿌고 할 데가 어딨노.
여기서 농사지을 때는 큰 집 작은 집 모두 어울려가 모를 숨갔지. 오늘은 큰 집거, 내일은 작은 집거 숨그고 했지. 손 모자라면 놉하고 품앗이도 했지. 옛날에 모판을 전부 손가 안 숨갔나. 몇 손이 돼야 해. 한 달 넘게 숨갔다요. 양파 캘 적에도 가가 도와주고 사과 적과할 적에 가가 도와주고. 내일은 저 집 가가 숨구고 오늘은 이 집 가고. 나락 손가 비면 또 서로 묶어 주고. 요새는 신선놀음이지.
저거 집에 일거리가 작으면 돈 받고 놉하지. 우리는 밭이 있었다. 있어도 한 마실에 있으면 시간 봐가지고 한 번씩 가고 그랬지. 나는 모 숨구는 놉을 많이 했어. 소 가지고 논 가라 노면 숨구기도 더럽거든. 그럴 적에 손으로 많이 숨구고 했지. 그 시절에 하루 일당을 얼매 줬는고 몰라. 한 삼천 원인가 그래 줬던가. 푼돈 버는 거지. 하루 저물도록 해가, 또 이런 한 마실에서는 놉 하면 어둡도록 해줘야 된다.
그 돈 벌려고 하는 사람도 있어. 없는 사람은 쪼매라도 벌어야지. 아들 먹이 살리고 할라면. 놉으로 양파를 캐고 모를 숨구는데 어찌나 허리가 아프던지. 그 집에다가 “약 좀 사가 오소. 우리 약 안 먹고 못 숨구겠구메”카니 약 사가 왔더라. 그래 약 먹으면서 숨갔다. 저거 집에 일거리 작으면 돈 받고 놉 하기도 했지 뭐. 우리는 밭 있었다. 있어도 한 마실에 있으면 시간 봐가지고 한 번씩 가고 그랬지 뭐.
근데 이제 못한다. 품앗이도 안 되고 지금은 놉도 안 된다. 젊은 사람이 공장 가서 일손도 없고, 송전탑 들어온다 캐가 동네가 영 쪼갈라졌다. 품앗이할라 해도 이제는 서먹해서 못하고.
4대를 여기서 살았어. 촌에 얼매나 살기 좋았는교. 그런데 송전탑 저거 때메로 죽겠다요. 갑갑해서. 저거 우야꼬 싶어. 저거 나가면 사람 따라오는 거 같애. 무슨 지랄병 할라고 저기 세우는가 몰라. 나라에 산이 70%라 카는데 산으로 가지 와 마실 앞으로 가가 저 놀음을 지기노. 저게 지 길로 가면 우리가 덜 카지요. 근데 저게 원래 갈 길보다 밀려 올라왔다 카니. 그래 우리 너무 억울하지. 한전이 지랄병이야. 산 많은데 산으로 가면 될 거 아니가. 송전탑 저게 좋으면 즈그 하지 우리 주겠나요. 즈그 다 하지. 더럽고 안 좋으니까네 여기까지 왔지. 마실에 인심도 좋고 다 좋았는데 송전탑 저거 따메로 지랄해가 그렇지. 지금은 갈라져가 있는데 어떻게 친하노. 수십 년 보고 지냈는데 저거 때메로 마실이 조졌지 뭐.
송전탑이 서니 마니 할 때부터 마실 사람들 다 갈라졌어. 송전탑 오는 거 누가 좋아하노. 반대하면 벌금을 많이 먹여서 지 못 갚으면 손자까지 갚아야 된다 카대. 한전이 와가 그 지랄병을 하대요. 한전이 말마다 거짓말이고. 지랄병이야. 우리가 뭐 잘못한 게 있노. 사람을 때리 지깄나 도둑질을 했나. 우리 재산 우리가 지킬라 카는데. 내캉 친하던 할머니도 송전탑으로 갈라졌어. 보면 인사는 하지만 서먹하고 이제 파이지 뭐. 이 마실이 참 인심 좋고 단합 잘 되고 이랬는데 마실이 송전탑 저거 때메로 영 조졌다. 속상한 기야 뭐 말로 어떻게 다 하겠노.
송전탑이 서니 마니 할 때부터 마실 사람들 다 갈라졌어. 송전탑 오는 거 누가 좋아하노. 반대하면 벌금을 많이 먹여서 지 못 갚으면 손자까지 갚아야 된다 카대. 한전이 와가 그 지랄병을 하대요. 한전이 말마다 거짓말이고. 지랄병이야. 우리가 뭐 잘못한 게 있노. 사람을 때리 지깄나 도둑질을 했나. 우리 재산 우리가 지킬라 카는데. 내캉 친하던 할머니도 송전탑으로 갈라졌어. 보면 인사는 하지만 서먹하고 이제 파이지 뭐. 이 마실이 참 인심 좋고 단합 잘 되고 이랬는데 마실이 송전탑 저거 때메로 영 조졌다. 속상한 기야 뭐 말로 어떻게 다 하겠노.
한전은 아무 이상 없다 카지. 아무 이상 없으면 저거 집에 가가 세우지 와 여까지 와가 세웠노. 한전이 이제 벌금 매겨도 겁도 안 난다. 법원에도 우리 가꾸매. 법원 거기에 판사 그것도 문디 지랄병이야. 우리가 지랄병 하나 저거 매긴 벌금 주구로. 분명히 이건 아닌데 벌금 매기고 하니 억울한 기라. 돈을 받아 처묵었는가 어쨌는가. 판사 지랄병 할라고 판사 내놨나. 이런 거 해결도 못 하는 게.
밀양 봐라. 돈도 달라 소리 안 하는데 집집마다 돈 넣어가지고 그래 죽도록, 다 짜갈라지도록 해 놓고 말이야. 사람 혼령을 덮어쓰고 그래도 되냔 말이야.
할머니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할머니 집 앞에 도착했을 때, 날이 어두웠음에도 창문으로 어둑한 형광등 불빛과 나지막한 텔레비전 소리만 넘어오고 있었다. “송전탑 안 세워도 우리는 실컷 산다. 와 촌 사람 지길라고 지랄병하노”라고 말씀하시던 할머니. 구태여 할머니가 말하지 않아도 허름하게 서 있는 할머니의 집도 수많은 말을 건네고 있었다.
4대째 같은 자리를 지키고 있는 할머니의 집 곳곳에서 할머니의 삶이 묻어났다. 마당 한편에는 헛간이 있고, 그곳에는 손때 묻은 농기구와 장갑이 흩어져 있다. 이것으로 할머니의 삶을 일궈왔으리라. 다른 한편에는 두레박과 언제부터 있었는지도 모를 오래된 우물이 있다. 이것으로 자식들의 목을 축였으리라.
며칠 뒤 헐티로를 걷다 김춘화 할머니 집에서 모판에 볍씨를 심는 작업을 도와주는 조봉연 할머니를 봤다. 송전탑 공사가 강행되고 마을 공동체가 무너졌지만, 그래도 다시 서로 도움을 주고받으며 살아가려는 주민들의 모습을 본다. 한평생을 쌓아온 주민들 사이의 신뢰, 그것이 무너졌다는 것도, 또다시 이를 추스르려 한다는 것도, 그 심정을 나로선 쉬이 짐작하기 어려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