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를 위해 삼평리에 기거하는 동안 최남이 할머니의 모습은 보기 힘들었다. 다른 할머니들처럼 농성장 당번을 서지 않아 볼 기회가 드물었던 것. 할머니는 농사를 업으로 살지도 않았으며, 어린 시절을 일본에서 보내다 귀화한 후 대구에 오랜 기간 살아 손에 흙물 든 다른 할머니들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도시 사람은 농촌의 인간관계가 도시보다 친절하고 정다울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공동체 생활이 강할수록 그 공동체에 속하지 않는 개인에게는 배타적인 법이다. 생활 패턴이 다른 최남이 할머니는 아무래도 다른 할머니들과 거리감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전혀 없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가끔씩 농성장에서 최남이 할머니를 볼 때면 내 짐작이 틀렸다는 걸 알았다.

이유는 4월 말 어느 날 저녁에 알게 됐다. 최계향 할머니 집에서 인터뷰하다 나오는 길, 마을은 초저녁인데도 한밤중인 것처럼 어두워 서둘러 켜진 가로등 밑으로 최남이 할머니가 지나갔다. 최남이 할머니는 추호남 할머니가 아프다는 소식을 듣고 문병 가던 길이었다. 외로움을 많이 타는 추호남 할머니는 아픈 몸을 이끌고 나와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최남이 할머니를 반겼다.

최남이 할머니는 이은주 전 삼평리 부녀회장의 시어머니이자, 빈기수 씨의 모친이다. 어린 시절 일본에서 살다가 해방 이후 한국으로 귀국했다. 한국에서는 과일 장사를 하기도, 놉을 하기도 했으며 지금은 아들과 며느리가 농사와 삼평리 송전탑 반대 투쟁에 매진해 남은 가사노동과 쌍둥이 손자 손녀의 뒷바라지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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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북해도에서 태어나가 북해도서 국민학교 2학년까지 댕기다가 한국 나왔다 카이. 그때가 해방되던 해였어. 그리 여기 오니까 12월인가 11월이더라. 눈 오드라. 그래가 뭐 일본 있을 때는 고생을 마이 했지 뭐. 말도 모하지 뭐.

일본 있을 때는 북해도 최고 추운 곳에 살았어. 학교도 댕깄고 집에서는 닭을 먹였어. 사료를 엄마 주는 거 따라 하다가 몽땅 다 부어 줬다고 혼도 많이 났어. 그래 사는데 국민학교 2학년 때 해방이 되더라 카이. 일본 사람들이 일본에 계속 살라 카는 거 아버지 형제가 한국에 있으니 한국에 왔지. 고생 많이 했어. 고생만 하다가 아버지 어머니 돌아가셨지.

히로시마에 원자 폭탄 떨어진 것도 구경했지. 다 죽어도 그래도 사는 사람도 있데. 아버지하고 히로시마에 구경 갔는데 그때가 국민학교 1학년 댕기던 땔 기라. 가보니 열차도 다 넘어져가 있고. 나는 그때 뭐 멀어서 딴 일은 없었어도. 사람이 참 많이 죽었어. 한쪽 구석에는 시쳇더미가 쌓여 있었어. 피가 줄줄줄 흐르는 시체를 아이고 마 차에 짐승 싣듯이 싣고 화장터에 가가 태웠어. 얼매나 죽었겠노 그지요?

원폭 말고도 사람 참 많이 죽었데이. 북해도는 탄광 마을이거든. 한국 사람은 짜다리 없고 거 전부 중국사람, 만주 사람 많았어. 일하다 죽으면 마 화장 해뿌고 그러더라. 일본 놈 참 독해 보면. 아파가 걷지도 못해도 그때는 꼬챙이에 가죽끈을 달아가 퍼떡 안 간다고 뒤에서 때리고 이랬어. 탄광에 불이 났는데 문을 닫아 뿠어. 사람이 재가 된 것처럼 이래 겹겹이 있는데 꼬챙이에 못을 박아가 사람 등짝을 찍어서 질질질 하나씩 꺼내대 이래. 사람 죽은 거 말도 못한다.

일본 놈은 탄광에서 일 안 해. 그러다가 해방되나 노이 이것들이 탄광에 일하는 사람한테 안 맞아 죽을라꼬 물에 빠져 죽는 사람도 있었다 카드라. 더러운 손에 안 죽는다 카며. 그래 독한 놈들이라, 그것들이. 그래서 일본은 가기 싫어. 밤으로 밥 주는 거 보면 수용소 맨치로 기단하게 있는데 일본 담요 한 장 쓱만 가지고 주먹밥을 이래 들고 앉았는 기라. 얼마나 독하노. 일본은 가기도 싫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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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고 일본 이름 쓰지 말고 바꾸라

그래 있다가 배 타고 한국에 왔어. 그때는 비행기가 어딨노. 대구 동촌 비행기장 옆에 왔는데 거기는 다들 농사짓고 살데. 한국에 와서는 공부도 못 했어. 일본서 학교 다닐 때 보던 거 갖고 왔는데 한국에서 어데 학교 갈 수 있나요. 못 사는데. 한국말도 못 배아서 일본말만 한다고 놀림도 많이 받았지. 이름도 윽시 오래까지 일본 이름을 썼어. 최 나쓰자, 야마모토 나쓰자, 그래 불렀다고. 성이 야마모토 최가라. 이름이 나쓰자고. 그래노니 복덕방 하는 주인이 “아이고 일본 이름 쓰지 말고 바꾸라”해가 이름을 최남이로 바꿨다. 나쓰자, 남이. 비슷하니까.

그래 한국말도 못했는데 그때는 나이가 어려노니 퍼뜩 배우긴 했어. 배우긴 배워도 학교는 못 갔지. 학교 갈라고 얼매나 울고 했는데 갈 수가 있어야지. 그래도 그때는 어려운 아들 공부 가르치는 데가 있었어. 동네서. 그래가 거기 댕기며 쪼매 배우고 그랬지. 서당 방, 공부방 카는 거 있는데 어려운 아들, 학교 못 간 아들 전부 불러 공부 갈칬다카이 그 할아버지가. 연세도 많고 한데.

한국에 와서 우리 식구는 남의 집 일을 해줬어. 일본에서 돈을 쪼매 가져왔으니 집 한 채 사고, 아들딸 서이가 왔으니 다섯 식구 먹고살려면 남의 집 일 해주고 살아야지. 돈도 많이 못 받잖아 그때는. 농사철 닥치면 거들어주고 했지. 나는 농사는 안 지었어. 사촌이 좀 살아서 만날 사촌 집에서 얼라나 봐주고 마이 도와주고 이래 살았지.

그러는데 열네 살 먹었을 때 육이오가 터졌어. 사촌 오빠가 결혼도 안 하고 군대 가가지고 죽고. 그때 일찍 군에 간 사람 다 죽었어. 그때 동네에 서울 사람들이 전부 피난 와가지고 동촌 비행기장 문간에 많이 있데. 우리 마을에 몰려 와가 방 쪼맨한 거 하나씩 얻어가 살았다 카이. 그 시절 참 말도 못하지.

그래 살다가 육이오 끝나고 한 사 년 있다가 결혼했지. 열여덟 살 먹던 해, 십이월 달에 입이나 덜자고 제대군인한테 시집을 갔지 하하~ 그때는 신랑 군대 갔다가 죽기도 했잖아. 그럴 시절에 시집갔지. 그때는 일찍 보내는 것도 아니라. 영감이 나보다 열한 살이 더 많았어. 그래가 그 집이 부잣집이라고 아버지가 치운 거지 나를. 

(남편이) 제대하고 나서 결혼하고 농사는 안 짓고 제일모직에 댕깄다 카이. 대구 나가서 살았어. 나는 그때 대구 동촌서 애 키우고 살았지. 그래가 있다 보니 둘째 딸을 낳아가지고는 딴 사업도 해본다고 하다가 어쩌다 보니 과일 장사를 시작했어. 그 길로 삼십구 년을 했다 카이. 과일 장사를. 가게를 얻어 놓고 직접 촌에 가서 사 와서 팔지. 그래 해가지고 돈 못 벌었다 소리는 못 하지요. 아들내미가 다 까무가 그렇지.

아들이 학원 해가지고 다 털어먹었어. 영감님이 결혼 시키가 학원 차리 줬는데 빚만 오지게 졌어. 고생 마이 시킸지. 근데 갑자기 해병대를 지원해가 가는 기라. 말도 안 하다가 일주일 남겨놓고 해병대 간다는 기라. 지 아버지도 모르게 지원 해놨는 기라. 영감이 “해병대 왜 지원해가 가냐”카이 “아버지께 크면서 너무 호강시리 커가지고 휴학증 내놨는데 일주일 있으면 간다”그러대. 고생 좀 하고 와야 된다면서. 그래 갔다가 나와가지고 영대 졸업해서 직장도 안 할라카고. 그래가 학원 채리줬는데 잘되나 그게. 다 까묵었지. 

그래 영감님은 일찍 세상을 버리고, 그래 아들 하나 딸 서이를 놓으니 아들이 나이 많이 되면 농사라도 져서 살기 괜찮을 거라고 이 밭을 샀는데 사업도 안되고 해서 농사짓는다고 일로 들어온 거지. 한 팔 년 됐어. 쌍둥이 놓고 들어왔으니까. 들어왔을 때는 고생 많이 했는데 이제 좀 괜찮아. 그래 힘들게 일을 했지. 살아 볼라는 용기로 농사를 지었지. 첨에는 생전 안 해본 일이니까 어색하고 어렵고 그랬지. 안 어려울 수가 있나. 그랬는데 아들도 젊지 부지런히 하니 이제는 잘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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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여기서 계속 살기라

여기는 이래 저래가 참 살기 좋다고 들어왔지. 그런데 저래 철탑이 들어와 노니 아들이 지가 또 젊으니까네 할매들캉 싸우는 데 앞장 안 설 수 없어가 앞장섰지. 내가 어쩔 때는 가지 마라 캐도 이래 시작해가 그만두면 안 되겠제? 그래나노이 즈그 자형하고 누부하고 얼마나 카는 동 몰라요. 이거 정부해서 하는 거 어떻게 할 거라고 다 나서는가 이기라. 대구 딸네 집 가면 나 일로 못 가구로 해여. 딸이 다 대구 사는데 서로 온니라 칸다. 그래 집에 있으라 카고. 그래도 부부가 다 저래가 있는데 내가 안 도와주고 되나. 도와주야지. 쌍둥이들 내가 데리고 잔다. 저거 방 따로 있어도 따로 안 잘라 캐서.

여기 들어올 때에 철탑이 저래 들어올랑가 알았나? 몰랐지. 저거 들어선다고 생각도 못했지. 근데 갑자기 저거 들어선다캐가 난리를 치고. 아이고 말도 다 못해. 저게 언제 어떻게 들어오는지 동네 할매들도 잘 몰랐을 끼라. 아이고 저 들어서고 싸워 샀는 거 보믄 제정신으로 못 본다. 그 참 할매들 마이 애 잡숫는 기라 보믄. 이쟈 남았는 거(23호 송전탑) 작년 12월까지 다 한다 캤는데 안 하디 올해도 또 뭐 한다카이 이마치 끌고 나오네. 사고 때문에 더 안 하지 싶으나. 몬 하지 싶으다. 내가 보이까.   

그래도 우야든지 뭐 이기 나가야 될 낀데. 철탑을 비끼든지 지하로 하든지, 못 이기 나가믄 나중에 뭐 우째될랑가 모르지. 합의하라는데 되나 할머니들이? 택도 없지. 이적까지 고생했는데 만데 합의하겠어요. 그때사 뭐 돈 줄 끼가. 우리는 여기서 계속 살기라. 쌍둥이 데리고 살아야지. 여기 말고 갈 데가 어딨는데.

이게 언제 끝날란지 모르지. 서글프다 카이. 할매들이 참 걱정이다. 앞으로 농사도 다 쪼매 쓱 짓고. 참말로 일할 끼 많아도 내들 나가 댕기고 싸우고 하이까 일이 얼마나 밀리 있는지 모른다. 능금나무 저거 다 비어 내야 되는데 그대로 있잖아. 일도 못 하고. 저게 끝나야 뭐가 되지.

동네가 얼마나 좋았는데. 저것 때문에로 천지 동네가 이래 갈라져가 인사도 안 하고 그러는데 뭐. 동네서 인사도 서로 안 해. 동장이라 카는 것도 인사 안 한다 카이 할매들한테. 그래도 쌍둥이는 철탑이 없이 살아야 될 건데. 여기 오는 사람들이 이 집은 뭐 철탑에 크게 상관없네 이칸다. 우리보고. 그래도 저게 얼마나 보기 싫노. 앞에 저래 서가 있으니까네. 저거 줄 걸려봐요 더 보기 싫지. 지금은 줄 안 걸리 저리 있어가 그렇지. 그래나노이 비만 많이 오면 저기 무너지면 좋겠다 카는데 저게 무너지나. 그지요. 야물게 해놨는데. 여기는 지하로 해도 된다 카이. 그런데도 그걸 안 하고 있다. 저것들이 돈 많이 든다고 안 한다카이.

쌍둥이가 1학년 때 자기가 뭐 철탑 부수는 거 발명품으로 만들고 그랬다 그카이. (웃음) 자기들이 송전탑 조 부수는 거를 개발한다고 그캐 샀더니. 뭐 상도 받고 그랬다. 은상 받았다 카든가? 선생도 발명가 시키라 카며, 그래가 학교에서 재료도 주고 해가지고 저거 만들고 이런다.

우리는 그래도 대구서 왔지만 쌍디 들은 여기 삼평리가 고향이라. 다른 건 몰라도 쌍디 생각하면 저 철탑은 꼭 막아야지. 좋은 곳에서 잘 살라고 일로 들어왔는데 저기 철탑이 서면 살 수가 없지. 쌍디 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도시에서 젊은 사람들이 많이 와야 오래 살 수가 있는데 저게 저 서뿌면 사람들이 올라 카겠나. 그거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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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남이 할머니는 아들과 며느리 둘 모두 송전탑 반대 투쟁에 적극 나서, 가족 다섯 명분의 가사노동과 쌍둥이의 육아를 상당 부분 분담했기 때문에 오랜 시간 인터뷰할 수는 없었다.

할머니는 어린 시절 히로시마 원폭을 경험했고, 이제는 핵발전소로부터 직․간접적 피해를 받고 있다. 동해안에 몰려있는 핵폐기물저장소와 핵발전소로 인한 사고 위험에 노출돼 간접적인 피해를, 신고리원자력발전소에서 생산되는 전기를 도시로 보내기 위한 송전선로로부터 직접적인 피해를.

“나는 이래 나이가 들었지만 우리 쌍디는 좋은 환경에서 살아야 할 건데”라는 최남이 할머니. 쌍둥이 손자 손녀걱정이 크다. 삼평리는 쌍둥이의 고향이다. 할머니는 일본에서는 타국살이를, 한국에서는 타향살이를 견뎌봐 고향과 환경이 가지는 무게를 안다. 그 상실의 고통을 기억하기에, 이를 쌍둥이에게 만큼은 절대로 대물림 하지 않겠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