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평리에서 인터뷰 영상을 돌려보고 있던 4월 어느 날, 김춘화(64) 씨가 한 SNS로 친구신청을 했다. 할머니의 친구요청이라. 곰살맞다는 생각에 입가에 미소가 돈다. 김춘화 씨는 스마트폰으로 SNS를 활용할 정도로 삼평리 할머니 중에서는 젊은 편이다.

다른 할머니들과 있을 때 김춘화 씨는 집안 며느리라도 된 듯 할머니들을 어른 모시듯 했다. 할머니들의 건강 상태를 일일이 체크했고, 건강이 나빠지는 할머니들을 걱정하며 안타까워하기도 했다. 이런 김춘화 씨의 모습 때문에 다른 할머니들과 똑같이 할머니라고 부르기는 어딘가 어색했다.

하지만 삼평리 송전탑 반대 투쟁이 수년간 지속되면서 김춘화 씨는 오히려 할머니들로부터 걱정을 받는 처지가 됐다. 송전탑 싸움을 시작하고부터 평상시에도 온 신경을 곤두세우며 산 탓에 건강이 눈에 띄게 나빠졌기 때문이다. 병원에서 처방받은 신경안정제를 꼬박꼬박 챙겨 먹지만 창문 너머로 보이는 송전탑에 답답해지는 마음은 어쩔 수가 없다.

김춘화 씨는 잠을 잘 때도 불을 끄지 않고 텔레비전을 나지막이 틀어 놓는다. 해가지고 잠깐 씻으러 댁에 들어서자 김춘화 씨는 이미 약을 먹고 잠들어있다. 세월호 참사 소식이 흘러나오는 텔레비전 옆으로 감시카메라 모니터가 보인다. 감시카메라는 집 앞 헐티로에서 창고, 출입문 부근까지를 24시간 비춘다. 얕게 든 잠을 부여잡듯 웅크린 김춘화 씨의 머리맡에 비치는 모니터. 언제나 신경을 곤두세운 김춘화 씨의 모습 같다는 생각에 숨죽여 한숨을 내쉰다.

문을 잠그면 될걸. 그런데 김춘화 씨는 정작 집을 비울 때 출입문이나 창문을 잠그지 않는다. 감시카메라도 아무 소용없다. 김춘화 씨의 불안한 마음을 보여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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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전이 우리 재산 뺏들어 갈라카니 도둑이지 뭐고

내 시집은 저기 성곡(청도군 풍각면 성곡리)서 스물세 살에 왔어. 여서 한 2km 가면 거기 있어. 어릴 적에는 시집이라 카는 거를 생각도 안 했지. 오빠가 대학 다니다가 어머님이 돌아가시는 바람에 중퇴하고 하니 오빠도 형편이 좀 나아지면 내 시집보낼 거라고 했어. 나도 전혀 결혼 생각도 안 했고. 근데 아버지가 반강제로 시집을 보냈지. 그래가 우리 오빠는 결혼식에 참석도 안 했어.

그래 중매로 결혼했어. 어머니 일찍 돌아가시고 할머니도 돌아가시니 아버지는 자기 있을 때 빨리 결혼을 시켜야겠다는 마음이었지. 나는 결혼 말고 오빠한테 가가 배우고 싶은 거도 좀 배우고 공부도 하고 싶었지. 그때만 해도 공부는 못하고 책이나 조금씩 봤지. 마을문고라 카면서 옛날에 마을에 있었는데, 먼 친척이 군대 간다고 내려와가 보던 책을 좀 기증해줬어. 그 뒤로 책만 보고, 친구들 모이가꼬도 책만 보고 했어. 『토지』를 재미있게 읽었는데 기억은 좀 가물가물하다. 너무 잊은 기 그게 안타깝데이.

여기(삼평리) 처음 왔을 때는 저 마을 복판에 양조장 하던 곳에서 살았어. 건물이 디귿자로 생겼는데 지붕이 기와로 돼 있으니 비가 오면 새서 어쩔 수 없이 다 뜯어 뿌고 다시 지었어. 마흔에 이 집으로 다시 이사를 왔지.

이 집에 와서 도둑을 몇 번 맞아가 저기 감시카메라를 달아놨지. 옛날에는 농산물 판 돈을 아무 데나 놨었어. 그래가 우리 아저씨가 이걸 달아놨지. 이제 도둑이 뭐 우리 집에 가 갈 거는 없어. 그 도둑이 도둑이가. 정작 도둑은 한전이라. 한전이 우리 재산 뺏들어 갈라 카니 도둑이지 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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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넘 자녀 눈에 눈물 내노

한전이 짜갈라 논 게 한두 가지가 아니야. 내 있는 논에 송전선로 때문에 선하지 보상이 조금 나왔는데 기억도 안 나. 나도 그렇고 우리 아저씨도 그렇고 보상은 아예 생각을 안 했고. 하여튼 온갖 수단을 다해서 공사할라고 한전 직원들 많이 찾아왔지. 할머니들 생각도 그렇고 나도 보상으로는 해결 못 하겠다는 거였어.

한전도 막연하게 들어올라 카이 명분이 없었는지 우리한테는 선하지 보상 제시도 하고 많이 안 찾아왔나. 나중에 알고 보니 한전이 우리 딸을 찾아갔드라고. 그래가 우리 딸이 마음이 좀 많이 상해가지고 전화 하드라고. 한전 직원이 찾아왔는데 속만 상하고 돌려 보냈다는 기라. 한전 직원한테 왜 넘 자녀 눈에 눈물 내노 따졌지. 나는 몰랐는데 나중에 보니 딸한테 가서도 이천만 원을 보상해준다고 캤나봐. 우리 딸이 말이 잘 없어서 몰랐었지.

이천만 원은 땅값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요. 선하지에 우리 논이 다 있어. 재산이라고 해 봐야 그것뿐이고 논농사는 버린다 쳐도 여기 집에서 문만 열면 22호기 23호기 바로 지나가지 않습니까. 집까지 전 재산이 다 날라가는 거지. 내 집이라도 저거 안 보이는 데에 있었으면 하고 그런 생각 많이 했는데 지금은 그냥 눈물밖에 안 나와.

보상으로 해 줄 수 있는 문제가 아니지. 송전탑이 저래 들어서가지고 우째 남은 평생을 저거 보고 살겠노. 첨에 내가 하도 맘 아파하니까 우리 아들은 “엄마 아부지, 재산은 일단 괜찮으니까 건강만 생각하소”카고 딸은 “우리는 이래저래 도움 못 돼주니까 말을 못하겠다”카지. 애들 내 이번에 병원 다니는 거 보고 놀랬었어. 병원에 가서 정신이 없어가 현금으로 안 하고 딸이 준 카드로 계산했더니 딸이 알았어. 전화 와가지고 울고 맘 아팠지. 아직 우리 아들은 내 약 먹는 거 모른다. 계속 몰랐으면 좋겠고.

그것 뿐이가. 우리 아저씨는 형제간에 사이도 갈라졌어. 전 이장(곽태희 씨)이 아저씨 제매였는데 주민의견서 때문에 갈라졌어. 우리 아저씨가 전 이장이 주민의견서 조작한 거를 밝힌다고 고발장을 넣었거든. 그러니까 전 이장이 우리 아저씨더러 개새끼라고 하면서 죽인다고 막 달려들고 그랬어.

전 이장도 처남한테 개새끼 죽인다고 달려들 때는 자기 심정도 편치는 않았을 거야. 그래서 나도 고발만큼은 그만하라고 말렸는데 우리 아저씨는 자기가 안 떳떳하다고 했어. 왜 주민끼리 의심도 많이 했거든. 그런 부분 때문에 싸움이 붙어가꼬 전 이장이 마을 회관에서 동민들 모인 자리에서 감히 손위 처남한테 그런다고 죽인다고 몇 번을 했어. 내가 그거를 보고 너무 화가 나고, 주민의견서를 조작했으면 최소한 벌이라도 줘야 되는 건데 형제간에만 이렇게 찢어졌잖아.

아무리 시골 할매들이 법을 몰라도

2006년에 한전이 주민설명회를 열었어. 전 이장이 시누이 집에 있으니까 몇 번 찾아갔지요. 우리 아저씨가 2009년도에 자필로 주민의견서를 쓴 거를 내가 우예 아나 하면, 2009년도는 풍각에서 송전탑 반대한다고 데모하고 있을 때거든. 그때 이장이 주민의견서를 받으러 온 거라. 우리 아저씨가 지금 데모하고 난린데 왜 이제 받노 카니 공청회를 다시 한대. 우리는 법도 모르고 하니 다시 쓰는 데 연도를 쓰지 말라는 거라. 우리도 어리숙해서 묻지도 않고 써줬어.

나는 동네에 공청회를 다시 하는갑다 생각했는데 그게 사실은 조작 인기지. 2009년도에 해 준 게 2006년에 해 준 걸로 됐으니. 군청 산업과를 찾아갔어. 의견서를 우리는 안 해줬는데 왜 한전에 그게 들어가 있다고 물어보니 과장이 환경영향평가 한 거를 실명은 가리고 보여 주는데 글씨가 한 사람 글씨체 인 거라. 그때 같이 갔던 부녀회 일곱 명이 다 그랬어. 한 사람 글씨체라고. 그게 한 사람이 써 논거면 우예 되노. 산업과에서는 동의서 쓴 본인이 오면 보이 준다는데 의견서를 받아보니 자필이더라고. 그런데 연도 수가 틀리지. 2009년도에 해 준 건데 2006년도에 한 걸로 돼 있으니까.

옛날에는 주민들 도장도 이장이 다 모아가 가지고 있었거든. 우리 할매들이 왜 화가 났냐 하면, 아무리 시골 할매들이 법을 몰라도 도장이 도용되는 거는 알 거 아닙니까. 주민의견서에 전 이장한테 맡겨논 도장이 다 찍히가 있으예. 전 이장을 고발 했더니 현 이장은 우리 마을 할머니들한테 도장 다 돌리 주더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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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가 폭력을 쓰면 힘 없는 사람은 어떻게 사노

국책사업이 이렇게 막무가내야. 국책사업이면 무조건 해야 된다는 인식이 바뀌기까지 싸워야 되는 거야. 국가가 할매들을 보호하지는 못할망정 국책사업이라고 협박하는 거 아닙니까 지금. 그 부분만 생각하면 정말로 화나고. 오히려 찬성하는 주민들한테는 욕 한마디 해 본 적도 없어. 한전에서 수고비 줄라 카고 회유하는데 얼마나 힘들었겠노. 내한테도 그런 식으로 접근 많이 했으니. 공기업이 잘못된 거지. 아무리 공기업이라도 변해야 하는 거고, 경찰도 국가가 잘못됐으면 제대로 밝혀야지 할매들만 협박해서는 안 되지.

국가가 폭력을 쓰면 힘없는 사람은 어떻게 사노. 누구한테 가가 말하겠노. 우리 같이 힘없는 사람은 어디 가서 살 데가 없다. 정부가 없는 사람들을 위한 정부가 돼야 해. 우리는 정치는 모르지만 뭐 다 바뀌어야 된다고만 생각하지. 정치하는 사람이 누가 나온들 또 어떻게 될지는 모르지.

공사 전에는 이런 생각해 본 적 없지. 얼마나 순진했으면 첨에는 경찰한테 하소연했어요. 경찰은 정말 이런 잘못된 거를 해결 해주는 줄 알고 하소연 많이 했지. 자기들도 의무로 나오지만 생각만이라도 잘못된 걸 알고 힘없는 사람을 보호해줘야 한다고 할 줄 알았지.

또 이거 반대를 하면서 원자력이랑 탈핵을 알았어. 내가 아는 것은 간단하게 원자력 개수가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사고확률이 높을 거다는 거고. 후쿠시마나 체르노빌이나 뭐 이런 거를 보면 정말 저거는 안 해야 되는 거다 싶어. 한국 사람도 후쿠시마 당시에 소금을 많이 준비했잖아. 바닷물이 오염되면 소금도 오염된다고 소금 준비를 얼마나 했는지 모른다 이 할매들이.

밤에 눈을 감고 있어도 떠올라

요즘 들어가 너무 기억을 못 해요. 방금 한 걸 까먹고 있다가 냄비고 뭐시고 태워가 많이 내삐맀다. 요즘은 정신과 가도 뭐 영양제나 주고 하니 되나. 정신과 가도 진단명도 모르겠다. 첫날은 테스트를하더라고요. 의사가 보호자 좀 모시고 오이소 캐서 깜짝 놀랐지. “에이, 그 정도는 아니고예 내가 지금 신경을 너무 많이 쓰고 있으니까 그렇지요”했는데 보나(대책위 상황실장)가 소식을 듣고 은주(전 부녀회장) 씨한테 말 한 거라. 은주 씨가 동행을 할라 캐서 떼 놓는다고 애먹었다. 그 뒤로 약은 달고 살지.

여태까지 걱정도 많고 스트레스도 많았지. 지금은 망루도 저래 서 있고 시민단체도 같이 있고 해서 첨에 마을에 용역이 왔을 때 보다야 스트레스도 훨씬 적고 좀 낫지. 송전탑 공사할 때 용역 들어오고 나서는 밤에 잠을 아예 못 잤거든. 할매들 끄이 내려오고 당하는 그게 막 밤에 눈을 감고 있어도 떠올라가. 아무리 국가가 하는 거라도 이거는 잘못하는 거잖아. 그때 뭐 할매들을 밟고 갈라 카는 거는 아직까지도 억울해서 분이 안 풀려.

내보다도 다른 할머니들이 걱정이지. 할머니들이 계속 싸우자 카고 다들 계속 싸울 마음 각오도 돼가 있지만 할머니들 힘들까 봐. 그래가 내가 최대한 자제를 시킵니다. 당번 설 일 있어도 할머니들은 좀 줄이고 해도 조금만 뭔 일 있으면 할머니들이 먼저 쫓아 나옵디다.

그래도 우리 할매들이 참 똑똑하지. 망루 생기고 며칠간 수사과 경찰들 안 왔나. 그때 할매들 기가 막히게 잘 싸웠지. 한창 공사할 때도 포크레인 뺄라 카는 걸 포크레인 밑에 드가고 해가 안 막았나. 할매들이 포크레인 빼가면 고리 가가 원자력 발전소 짓는다고. 그 포크레인이 고리에 있는 원자력 발전소에 가는 거였거든. 그래가 고리 원자력 발전소가 되면 거기서부터 송전선이 걸려 온다는 걸 할매들이 안 거지요. 똑똑하지.

내 이 싸움이 결판이 나도 아쉬울 거 없습니다. 정말 이때까지 잘 싸웠고, 후회 없이 싸웠습니다. 그래도 지금까지 싸워왔으니 힘닿는 데까지 더 싸워야지요. 할매들 밟고 갈라 카는 게 아직 억울하니 계속 해야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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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들이 송전탑 건설을 반대하는 이유는 다양하다. 그중 하나가 송전탑이 인체에 유해하다는 점이다. 사실 송전탑의 인체 유해성 여부는 아직까지 논쟁지점이다. 혹자는 송전탑에서 뿜어져 나오는 자기장이 발암 등의 심각한 질병을 일으킨다고 주장하기도, 또 혹자는 조금도 유해하지 않다고, 그래서 송전탑을 건강상의 이유로 반대하는 것은 무지한 일이라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두 주장 모두 아직까지 과학적으로 입증된 것은 없다.

>인터뷰를 끝낸 김춘화 씨는 그날 분의 약을 뜯어 입에 털어 넣는다. 송전탑 싸움을 시작하고부터 부쩍 건강이 나빠진 김춘화 씨. 알약 몇 알로 김춘화 씨가 나을 리는 없다.

>한전의 송전탑 건설이 추진되고부터 건강을 잃기 시작한 김춘화 씨. 그의 이야기를 속속들이 알고 싶었으나 송전탑 이야기로 말문을 연 그는 인터뷰 내 송전탑 이야기만을 토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