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평리 마을을 가로지르는 헐티로에 어스름이 깔리면 추호남(73) 할머니의 가슴에도 그늘이 진다. 혼자 살기에는 다소 커 적적해 보이는 집안에는 할머니가 내쉬는 숨소리만 울렸다. 적적한 그 울림이 싫어서인지, 화초들의 숨소리라도 듣고 싶었던 것인지 집 안에는 난초, 장미, 이름 모를 덩굴 식물을 심은 화분이 가득했다. 혹여 헐티로로 경찰차가 야간순찰을 하며 사이렌으로 정적을 깨는 날이면 할머니는 이도 인기척이라며 반가운 마음에 괜히 들떴다.

긴 세월을 살면서도 외로움은 도무지 익숙해지는 법이 없었다. 옛날에는 쉬이 들었을 법 한 말이지만, 할머니는 당신의 어머니가 입버릇처럼 “아이고, 니 같은 아를 놀라꼬 버선발이 백커리가 닳도록 불공을 들였나”는 말을 들으며 애물단지 취급을 받았다. 속 시원하게 대들지는 않았지만 가슴 한켠에는 중금속처럼 아쉬운 마음이 쌓여만 갔다.

삼남매 중 맏이였던 할머니의 오빠만이 다정했다. 그는 어릴 적부터 아버지 노릇을 자처해왔다. 할머니가 중학교에 다닐 때는 운동회를 챙겨주기도 했고, 할머니가 결혼 할 때 손을 잡고 함께 식장에 입장을 한 사람도, 훗날 할머니가 뇌혈관 수술을 받은 후 건강을 회복하라며 삼평리로 집을 옮겨준 사람도 그였다.

이 때문에 남편도 장인보다는 처남을 더 무서워할 정도였다. 결혼 후, 남편은 월배에 있는 다방에서 바람을 피우기도 해 할머니의 속을 뒤집어 놓기도 했는데, 혹여나 뒷덜미가 잡힐 때면 남편은 누구보다도 자기 처남에게 들킬까 봐 식은땀을 뻘뻘 흘렸다.

“바람 피우는 건 말도 못 하지 뭐. 내한테 표시를 못 내는 기라. 오빠가 무섭단 말이라. 겁을 내가지고 절절․․․ 오빠가 많이 무서웠어요. 아버지가 연세가 많으니까 아버지 대신 아버지 노릇을 했는데 오죽하겠나. 남편 바람피우면 오빠는 감으로 알지”

다행스러운 일인지, 바람기를 제외하면 남편은 일등신랑감이었다. 훤칠한 외모에 반점 운영도 열심히 했고, 또 자식들을 키우며 돌무더기 쌓듯 정성스레 재산을 쌓아갔다.

그 어떤 돌무더기가 무너지지 않으랴. 시간이 지나면 그 무엇이든 자연스레 풍화하는 것이 인생이겠지만 할머니가 일생동안 정성스레 쌓은 돌무더기는 누군가의 발길질에 와르르 무너져야 했다. 남편이 먼저 세상을 떠나고 이제는 정말 세상에 홀로 남았다는 생각이 들었을 그때, 그리고 여생을 보내기 위해 들어와 정붙인 삼평리에 한전이 헬기와 포클레인을 몰고 와 송전탑을 세운 그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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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이 할머니와 친해져봐야지

어린 시절을 도시에서 보낸 추호남 할머니는 느지막이 흘러들어온 농촌에서 사는 것이 녹록치 않았다. 삼평리 생활을 시작하며 할머니는 “오늘은 이 할머니와 친해져 봐야지” 하며 안면이 없는 삼평리 주민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려 해 봐도 한동안은 굴러온 돌 같은 어색함을 지울 수 없었다.

“여기 들어 온 지가 16년이 되는데 이제야 조금 적응이 되네요. 처음에 이 동네 왔을 때는 아는 사람도 아무도 없고, 그저 지나가다가 만나면 아 이 동네에 계시구나 싶어 인사 하고 했지요. 그 외에는 어느 집에 놀러도 한 번 가 본적 없고 고마 십분도 이야기도 안 해봤으요. 내가 건강이 안 좋아가 오빠가 여기에 가 있으라 캤어요. 바람도 좋고 물도 공기도 좋고 하니까네. 처음에 있을라카이 아이고 힘든 게 말도 못하지요. 첫째 너무 고요해요. 밤만 되면 막 미칠 정도로 울고 싶어가지고. 가끔가다가 저기 순경 차 사이렌 소리가 저 멀리서 들리면 그것만 들어도 반가버 죽겠어 막. 하이고 막 지내기 얼마나 힘들었는지 몰라“

1998년, 거처를 삼평리로 옮기고 얼마 되지 않았을 당시 삼평리 할머니들은 추호남 할머니를 종종 공주할매라고 불렀다. 악의는 없었다. 하지만 도시생활을 하다가 들어온 추호남 할머니는 평생을 농촌에서 밭 메며 살아온 할머니들이 보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공주할매’였던 것이다. ‘공주할매’소리에 추호남 할머니는 얼마간 움츠러들었지만, 주민 몇몇(지금은 송전탑 건설로 틀어져 버렸지만)과 배성우 조합장으로부터 위안을 받았다.

“외로운 게 젤로 무서워요. 그래가 조합장한테 내가 은혜를 입었어요. 많이 도와 준기라. 송전탑 들어오면서 갈라섰는데 영감 죽고 나서 부쩍 친하게 지냈던 할매 둘이하고 목욕도 같이 가자 카면서 같이 많이 다녔어요. 그래 했는데 고마 여 송전탑이 마을을 나눠가 내가 이 쪽 편으로 택했거든”

2009년, 한전한전이 주민들을 찾아오고 송전탑 공사가 진행되자 주민과 부대끼려 아둥바둥 하던 할머니의 삶도 바뀌었다. 처음 마을 사람들은 하나같이 마을에 송전탑이 들어서는 것을 막으려 했으나 시간이 지나며 떨어져 나가는 주민들이 많아졌다. 이런 흐름에 가장 앞장 선 것도 마을 이장 등 마을회의 분위기를 끌어가는 주민들이다. 자연스레 반대측 주민들은 마을회관에 가도 환영받지 못하게 됐다. 당시 살아있던 할머니의 남편도 마을회의에 참석하려 했으나 배제당했다.

“저기(마을회관)에 무슨 회의든지 무슨 일이 있어 놀러 가면 (이장 등 찬성 측 주민이) 새로 들어온 사람을 탁 찔러서 개입을 못하게 만들어. 막 나쁜 소리를 해 가면서 새로 들어온 것들이 뭘 참견할려고 하냐면서. 꼼짝도 못하고 우리는 갇히게 됐지. 찬성 측 주민들은 돈 나오는 거 타고 싶어가지고...차를 사니 어쩌니 하고. 돈이 참 무서워 무섭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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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끼리 품앗이를 주고받으며, 또 외로움을 달래려 함께 목욕도 하며 서로 오순도순 살던 삼평리에 송전탑이 들어서게 되며 조화롭던 균형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가장 의지가 되는 사람은 남편이었는데, 그런 버팀돌 같던 남편이 2012년 갑작스럽게 작고했다.

“재작년에 돌아가시고 나서, 고마, 그래 내가 삐따구만 남아가지고...말도 못 할 정도로 마...갑작시럽게 돌아가셨어. 설 지내고 사흗날. 말도 못하게 외롭지 하이고...너무 고통스럽고. 첫째 무서워서 우얄 줄을 몰랐어 무서워서. 집이 모두 저래 트이가 있잖아. 누구라도 들어올 까봐서 얼마나 무섭노. 내가 혈관에 좋다는 약 말도 못하게 먹거든요. 내가 건강이 안 좋으니 영감 따라 곧 같이 죽을 줄 알았더니, 또 혼자 살고 보니 이것도 산다고 약 지어 먹고 몸에 이로운 거 찾아 먹고... 내가 생각해도 너무 한심해. 사람 사는 게”

위안이라고 할 수 있을까? 뼈다귀만 남을 정도로 마음고생 하던 할머니는 역설적이게도 송전탑 건설을 함께 반대하는 주민들과 가까워지게 됐다. 외로움을 많이 타던 할머니. 할머니는 반대 측 할머니 중에서도 나이가 가장 어려 어리광을 피웠고, 그러면서 주민들과 가까워질 수 있었다. 추호남 할머니는 “뼈다귀만 남은 게 계속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되겠다 싶어 영양제도 맞고 주민과 친해지려고 적극적으로 노력을 시작했다”고 말했다.

“막내로서 형님 하면서 어린양 할 수 있는기라. 그러이 내가 만만하이 해서 좀 웃기기도 하고 그라면서 좀 친해졌지. 처음 들어왔을 때는 따돌림 당했거든. 학교에서 따돌림당하는 거 맨치로. 시골에서는 당연하게 자기 핏줄 찾게 되고 알던 사람 찾게 되고 하니까 힘들지. 그래도 이래 살아가 안 될 거 같아가 노력 많이 했어. 그라고 다른 촌보다는 여기가 잘 해주는 편인가 보데. 촌에 간 사람들 이야기 들어보면 다들 그렇게 견디기가 힘들다 그러대”

그렇게 할머니가 반대 측 주민과 친분을 쌓자, 어느 날 갑자기 마을 이장이 할머니 집을 찾아왔다. 마을에서 한전과 협상을 주도하던 이장의 입장에서는 반대 주민 하나하나가 눈엣가시였던 것이다. 문을 몇 번 두드리다 덥석 열고 들어온 이장(박재근 씨)은 할머니에게 “당신은 몸도 아프다면서 산에 가서 공사를 방해 하는데에 나서냐”며 삿대질을 했다.

홀몸인 할머니는 무서웠지만 확고했다. 할머니는 더 이상 지금까지 공들여 쌓은 탑을 무너뜨리고 싶지 않았다. 공사가 더 진행된다면 다시 힘겹게 쌓은 인간관계마저도 무너질 것이라 생각했다. 절대로 송전선이 마을을 가로질러 마을이 갈라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 할머니는 매사에 자기를 드러내지 않던 모습과 달리 송전탑 공사가 시작하자 격렬히 저항했다. 공사 당시 포클레인 밑에 들어가기까지 했다.

“공사 하니까 용역들이 말도 못해. 그런 처음 보는 것들이 여기에 좌악 와 있는데, 마침 하늘은 비가 좀 왔었어. 그래서 산에 가니까 산을 파놨는데 용역들이 세상천지 할매 한 사람을 갖다가 막 억눌러. 옛날 이장이 내한테 한 것처럼 막 겁을 주는 거라. 그걸 보고 있으니 미칠 정도인 거라. 내가 막 고함지르면서 ‘어디 어른한테 그러냐. 너네는 부모도 없고 아무것도 없나’고 막 하면서. 세상에 아무리 못 배우고 그래도 함부로 말을 하고 어른을 가져다 무시하듯이 사람한테 그러는 게 어딨어. 그러자마자 배조합장 마누라도 구댕이 파 놓은 데로 뛰어 들어가데. 그러니까 ‘저기 저 여자 들어내’라 카며 막 난리인기라. 남자 6명이 오더니 다리 둘이 들고 팔 이렇게 둘이 들고 복판에 둘이 들어 여섯이 들어서 꼼짝도 못 하게 해서 막. 그래가지고 들려 나왔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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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 이겨보입시다

할머니들끼리 싸움을 이어가는 것은 힘겨웠다. 무엇보다도 힘든 것은 아무도 알아주지도, 관심을 갖지도 않는다는 고립감이었다. 그렇게 힘겨운 싸움을 이어나가던 중, 할머니들에게는 다행스럽게도 2013년 청도345kV송전탑반대대책위원회가 결성됐다. 그러면서 싸움은 규모도, 범위도 점차 확장돼 갔다.

고립감을 덜어 낸 것도 좋고 이 전보다 더욱 잘 맞서 싸울 수 있게 됐다. 그렇다 하더라도 한전과의 싸움은 도무지 메우기 힘든 격차가 있었다. 한전은 송전탑 공사를 진행하면서 용역 경비를 앞세워 할머니들을 막아섰고, 경찰은 방관했다. 추호남 할머니는 “한전도 나쁘지만, 경찰이 더 하다. 할머니들이 다치든 말든 멀뚱히 보고만 있다”고 말했다.

2014년 5월 중순, 한전은 반대 측 주민들을 제외하고 다른 마을 주민들과 차근차근 협상을 진행하고 있으며, 반대 측 주민에게는 송전선로 건설공사장 진입로에 장승과 움막을 건설했다며 7천여만 원의 강제 이행금 부과하기 위해 대구지방법원에 소송을 걸었다. 공사를 마저 진행하겠다는 강한 의지를 보이며 동시에 반대 측 주민들을 압박하는 것이다.

추호남 할머니는 2009년 송전탑 건설 공사가 첫 삽을 뜬 뒤 마을 주민과의 관계가 파괴돼 얻은 외로움을 생각하며, 또한 송전탑 건설 공사를 막아내며 주민들과 더불어 떨쳐낸 외로움을 생각하며, 오늘도 이른 아침 삼평리 평화공원 농성장 한 켠으로 몸을 이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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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 이겨 보입시다. 모두 우리를 끝까지 도와 줘야지. 진짜 도와주이소. 모두 끝까지 도와주이소. 언젠가 송전탑 몰아내고 큰 잔치 한 번 하입시다. 이렇게 되든 저렇게 되든 끝까지 도와주시고 시작했으니 끝까지 가야지요. 기도도 합니다. 모두 끝까지 도와주이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