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평리 뒷산을 오르려면 오솔길을 지나쳐야 한다. 이곳을 수없이 오간 들짐승과 주민들의 발걸음으로 생긴 그 오솔길을 따라가다 보면 큼지막한 당산나무가 한 그루 나온다. 당산나무 주변으로는 새끼줄이 처져 있고, 그 아래로 신줏돌이 모셔져 있다.

마을 사람들은 이곳을 중당이라고 부른다. 중당에 우뚝 서 있는 당산나무는 주변에 오순도순 나 있는 참나무들이 회초리처럼 보일 정도로 웅장하다. 당산나무에 올랐을 때 해가 중천에 걸려 있었지만, 우거진 수풀이 햇빛을 탐했기에 나무 아래에 고이 모셔져 있는 신줏돌 부근은 어둑해서 더 차분한 듯하다. 산의 꼭대기 부근인 천왕당에는 소나무 숲이 우거져있고, 중당에서 가까운 하당에는 또 다른 당산나무가 한 그루 서 있다.

도시에서 자란 이들에게는 생소하겠지만, 아직까지 농사가 마을의 생활양식을 결정하는 농촌에서 농경의례는 단지 겉치레에 불과한 행사가 아니다. 오히려 주민의 삶과 의식에 깊게 뿌리내리고 있다. 평생을 산에서 고사리와 제피 잎을 따고, 논에서 나락과 보리를 번갈아 기르며 살아온 농민에게 마을제사나 기우제 같은 의례와 풍속은 그네들의 삶과 떼어낼 수 없을 정도로 중요하다.

그곳에 송전탑이 섰다. 주민들이 기우제를 지내던 노인봉에 22호 송전탑이, 산신제를 지내던 천왕당과 당산나무가 있는 중당, 하당 부근에는 24호 송전탑이 섰다. 2012년 4월 말, 노인봉에 22호 송전탑을 세우기 위해 발파작업이 이뤄졌고 며칠 뒤에 마을에 큰 우박이 내렸다. 이외생(77)할머니는 “세상천지에 그런 우박을 처음 봤다”고 말했고, 실제로 주민들은 그해 농사로 수확이 없었다. 주민들이 신령이 있다고 믿는 자리에 두 개의 거대한 쇠말뚝이 박혔고, 하나를 더 세우려 한다.

이외생 할머니는 중당 당산나무 일대의 토지를 소유하고 있다. 할머니는 이곳을 오르내리며 얻은 작물로 다섯 젖먹이를 먹여 살렸다. 남편이 일찍 세상을 떠나 집안 살림을 꾸리는 것도 할머니의 몫이었다. 이곳의 오솔길을 만든 것도 평생을 오르내린 할머니의 발걸음이리라. 22호와 24호 송전탑이 세워질 때 이외생 할머니는 중장비와 용역직원들을 몸으로 막아섰으나 역부족이었다.

2014년 5월 초인 지금 23호 송전탑이 남았고, 공사 강행의 조짐도 조금씩 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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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에 가서 냄새 맡는 게 참 좋아. 제피나무 만나면 반갑고, 둥굴레나 고사리 만나면 끊어 오고. 요즘은 내 몸띠가 시원찮아서 잘 못 가고 아들도 “어무이 자꾸 그래 가면 죽습니다. 많이 걷고 숨차면 안 됩니다”해도 나는 “오늘 한 번만 더 가고 다시는 안 간다”카며 계속 가게 돼. 오늘 아침에도 갔다 왔어. 예전에 동네서도 최고 일등으로 댕깄지. 가면 무서운 것도 있어. 멧돼지. 멧돼지가 주딩이로 나무뿌리를 희떡 디비뿌고 사람도 잡아먹어. 여기 돼지 쌨다이. 땅을 전신에 다 뒤집어 놔. 독사도 징그러워. 옛날에 고사리 끊을 때 독사가 꼬랑데기까 나를 찔렀어. 탱자 가신가 했는데 난주 다리가 이마이 커지는 기라. 풍각에 뱀쟁이한테 가서 독을 뽑았지.

내 산 거는 말로 다 못한데이. 독사 무서워도 먹고 살라면 산에 가기는 가야지. 갔다 오면 겁나는 것도 이쟈뿔고 했어. 산에서 뭐든 다 나. 피난 다닐 때는 소나무 큰 게 있으면 낫 가지고 껍디를 살살 삐껴내고 속을 삐끼가지고 그걸로 떡도 해묵고 수제비도 끓이 묵고 했어. 그게 송기떡이야. 그기 사람에게는 해로와. 그래도 묵을 거 없으니.

어릴 때는 뭐 일이나 했지. 스무 살 삼월 삼짇날에 여개로 시집오고 나서부터 많이 힘들었지. 이서 밑에 구라에서 시집왔다고 나동댁이라 카데. 시집오이 시아버지 계셔서 모시고, 아를 다섯이나 놨어. 즈그 아부지(남편)는 사십 일곱에 큰아들 군대 가 있을 때 갔어. 죽는다꼬 전화해도 오나. 팔월 열여섯 날 아즉 여섯 시 오 분에 갔어. 시아버지가 즈그 아부지보다 더 오래 사셨지. 시어머니는 일찍 가셨고. 나는 집안일도 하고 농사도 짓고. 품도 팔았어. 놉이라 카지. 한 달 내도록 아침에 밥 한 숟가락 못 얻어먹은 적도 있어. 나무하러 가는 사람들 죽 쪼매 줬지 나는 집에 있다고 죽도 못 무겄어. 없는 집에 시집와놓으니. 내 복이지만, 만날 너므 일하고 밥 얻어먹었지.

마실에 모 숨글 때 한 달씩 땅에 엎드리가 심은 기라. 누가 손 없는 사람 논이 한 마지기면 좀 띠내 주거든. 거기에 숨그면 품삯이 나오는 기라. 새벽에 가가 모 심고, 그래 일하면 허리가 아파가 몬 살아. 진통제 사 묵어 가메 모 숨갔어. 그래 일하면 애가 밥을 먹었는지 안 먹었는지도 몰라. 시어머니가 없으니. 즈그들이 알아서 잘 놀고 잘 해묵고 해서 산기지.

그래도 알아서 참 잘 컸어. 둘째아들캉 큰딸 둘캉 방 얻어가지고 공부하고, 큰 딸은 제일 여상 나와가 제일 은행 들어가고, 큰아들은 대구 은행 들어가고. 공부도 다 잘했고 인물도 부채만치 훤하이 좋고. 둘째 아들은 폐가 나빠가 군대 안 간다 카는기 군대를 우째 갔는지도 몰랐어. 나중에 둘째 아들 옷이 이래 담겨가 오는기라. 취사병으로 들어갔데. 내 그때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얼마나 섭섭은지. 너무 안 됐는기라. 결핵이 있어가 안 간다던기, 우리 이모가 오소리를 잡아가 먹여주고 병원 약 먹고 하다보니 나샀는가봐. 그래가 군대 갔어. 갔는데 우짤끼고. 딸네들은 시집을 다 잘 보냈어.

그래 흙 파서 살은기라. 산이 얼매나 고맙노. 저 앞에 22호 철탑이랑 뒤에 24호 철탑 보면 얼매나 속이 디비지겠노. 22호 서 있는 데는 동네사람들이 기우제를 지내던 곳이라. 여름에 모심을라 카는데 비가 안 오면 저기에 술 받아가고 명태 한 마리 사가가 동네사람 우- 모다 가가 절하고, 고시레도 하고 집에 오면 비가 좌르르 와. 농사에 비가 얼매나 중요하노. 비가 와야 곡식이 되지. 사람도 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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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전 놈들이 노인봉을 뚜드리 패가지고 마실에 우박이 내렸어

그런 곳인데 한전 놈들이 기계 가지고 이래 전신에 다 뚜드리 패가지고 저 지경을 만들어놨어. 그 해에 이 동네에 우박이 내려가 다 안 맞았나. 복숭아고 사과고 딸 게 없는 기라. 감도 없고. 우박 때문에. 우리 마당에도 우박이 막 꽉 차가지고 물이 안 내려가. 각북 면내에 율정하고 방지가 최고 많이 내렸어. 거기에 철탑을 세워가 우리 농사를 망칬다고. 농사고 뭐고 안 됐지 철탑 때문에. 옆에 소골댁(김선자 할머니)이는 우박 때문에 양파가 망했어. 이파리가 다 떨어졌는데 뿌랭이가 우째 들겠노. 그때 우리 굶어 죽는가 했디만 그래도 굶어 죽지는 않더라.

저짜게(22호 송전탑, 23호 송전탑 공사현장)는 또 마을 제사를 지내는 자리라. 젤 우에 천왕당이 있고 요새 제사 지낼 때는 우리 집 뒤에 중당이랑 하당 당산나무에서 해. (중당 당산나무에) 쪼맨한 집을 지어가지고 고 안에다가 촛대 두나 세워 놓고, 돌 자그마한 거를 뽀얀 종이 가지고 딱 입혀가 둬. 정월 초 열흘이 되면 동네 사람 다 모디가지고 대를 잡아가 대가 들어가는 집을 봐두지. 그 집에서 정월 대보름에 당산제를 지내는 기라. 좋고 깨끗한 집에 들어가지. 우리 집도 당산 천왕을 한번 모셨어. 참기름을 짜가지고 종이 심지를 만들어가 거기에 불을 붙여. 기계가 하는 거 없이 다 손으로 정성 있게 해. 사흘 동안 황토 가져다 흩쳐 놓고. 목욕도 아침저녁으로 하는 기라.

대보름 되기 전날 밤 열한 시 되면 깨끗한 사람들이 오징어도 한 축씩, 돼지도 한 마리 잡아가지고 다 짊어지고 천왕당까지 가는 기라. 그라면 애들은 눈까리나 빼먹을라 해도 정성지긴다고 그것도 못 빼먹게 했어. 그때는 돼지도 한 마리를 통으로 잡아가 네 사람이 짊어지고 갔지. 요새 들어가지고는 그만큼까지는 못해. 여기(중당)로 모셔 내려온 지는 얼마 안 됐어. 요새는 대보름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나서 돼지도 머리만 해가지고 중당 까즉만 간다. 저 까즈(천왕당)는 도저히 못 가는 기라. 중당에 가가 술 부어 놓고 절하고, 또 하당으로 내려와가 절하고. 제사 지낼 때는 마을 백집 성을 다 적어가 추문을 하는갑데. 요즘에는 그것도 못하고 깨끗은 사람(남자)들 즈그끼리 뽑아가 지내고 온다. 초상난 사람도 못 가고 깨끗한 사람만 가지.

제 한번 지낼라면 얼마나 부담이 가는데. 동네 무사하게 잘 지내야 되는데 제를 잘 못 지내면 불이 자주 나던 동, 사람이 많이 죽든 동 하면 정성이 부족해가 제를 잘못 지내가 그렇다 하거든. 그 일 년 갈 동안이 걱정인기라. 잘 넘어가야 될낀데 하면서. 못 넘어가면 그 집이 원망 듣는다아니가. 그러니 얼마나 중요한 곳이고. 점쟁이들도 굿하러 오면 천왕당에 제일 먼저 가. 당산 천왕님부터 먼저 섬겨야 되거든. 한 번은 천왕당 쪽 나무가 바람이 불어가 가지가 하나 부러졌어. 누가 주워는 왔는데 불로 때지는 못 하는기라. 탈 날까봐. 그냥 내삐리는 거지. 그래 거기에 송전탑 선다고 생 쑈를 하는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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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합 좋은 마실이 송전탑 때문에 다 망했어

그래 단합하며 살았는데 송전탑 때문에 다 망했어. 그래도 마을이 이래 갈라졌어도 아직 제사는 다 같이 지내. 중요하니까. 목욕도 다 가고. 혼자 사는 사람들은 음식 장만을 안 하지. 우리는 지금 혼자니까 회관에 가서 화투 치고 놀지 뭐. 목욕만 하고. 새벽에 제 지내고 오면 음식을 전부 다 갈라 먹는기라. 백떡도 두되 찌고. 돼지고기도 하고. 뭐 제를 지낸다 카는 것만 내가 알지, 사실로는 제지낼 때 가보지는 못했어. 고사리 끊으러나 그짝에 가 봤지 남자들이 다 지내는 거니까.

앞산(22호 송전탑이 선 자리)에 철탑 설 때 데모하러 간다 카니 그때만 해도 동네 사람들 다 동의해가 갔는데 한전이 다 갈라놨지. 동네 사람 전부 의논해서 전부 다 반대했었는데 슬슬 빠지는 기라. 우리는 그때부터 싸우다 보니 지금까지 이래 와 있는 거고. 그런 송전탑이라.

싸울 때는 새벽 네 시에 가가 못둑으로 저래 올라가가지고 지키고 섰어. 나무를 못 비게 할라고 나무를 마 꽉 잡고 서가 있었지. 톱 가지고 시나 네나 와서 비 재꼈어. 우리는 못 비구로 할라고 진득하이 서 있어도 끄이 내리 올 수밖에. 덩치 큰 사람들한테 끄이 내리왔지. 양쪽에 붙들리가 끄이 내리오고, 덩치 작은 석동댁(박순쾌 할머니)은 달랑 들리가 나오고. 부산댁(이차연 할머니) 이는 죽어뿌가 청도 병원에 가서 이튿날에 깨어났다 아이가. 소골댁(김선자 할머니)이는 전신에 피가 나가 병원에 가고.

우리가 이래 힘들게 반대하는 거는 그래 우리 시집와가 이때꺼정 내 사는 집 여기 지키야 되고, 또 우리 논이 너 마지긴데 바로 철탑이 지나간다고. 거기에 능금나무 숭궈났어. 내 땅이 팔 수가 있나 살 사람이 있나. 내 땅 지키고 내 집 지킬라고 그래 하는 기라. 다른 게 아니라. 내만 살라는 것도 아니고 동네 사람들 다 살라고 시작한 거라. 우리 지금 지중화만 시키 달라 안 카나. 사실은 그것도 답답하니 하는 소리지 지중화도 싫어. 싫기는. 지금도 뭐 일 있다 카면, 한전인가 경찰인가 온다 카면 가슴이 마 퍼덕퍼덕 하는 기라. 공사가 언제 될까 봐 하는 게 제일 걱정인데. 마 빨리 넘어가야 하는데 언제 싸워도 함 싸워야 끝이 나는데. 저거가 죽든 동 우리가 죽든 동 해결이 나야 끝날 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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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성우 씨에게 길을 물어 올라간 중당의 당산나무 앞에 도착했을 때, 나는 그 커다란 모습에 압도됐다. 들고 갔던 카메라의 렌즈에 우겨 넣을 수 없을 정도로 나무는 컸고 가지는 풍성했다. 중당 당산나무 주위에 처진 새끼줄을 경계로, 그 안쪽은 마치 밖과는 다른 세상인 것만 같은 이질감이 느껴졌다.

그곳은 이스라엘 민족이 일 년에 한 번 제사를 지낼 때 대제사장만 들어갈 수 있었다던 지성소와 유사한 듯도 했다. 송전탑 공사를 추진하는 쪽의 입장에서 당산나무와 신주가 고이 모셔져 있는 그 땅은 단지 선하지 보상을 해야 하는지, 해야 한다면 얼마를 해 줘야 하는지 하는 경제적 차원의 것 보일 지도 모른다. 그들은 주민들의 세계를 알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