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오랜 세월 같은 자리를 지켜온 나무 한 그루가 있다. 나무는 내리쬐는 햇볕을 자양분으로 만들고, 가끔 내리는 비에 젖으면 흡족했다. 한 해를 기다려 피운 꽃에는 작은 풀벌레들이 드나들었고, 꽃이 지고 난 자리에 열린 과실은 작은 금수가 취했다. 나무는 어떤 것을 강하게 욕망하지도, 그래서 파괴하지도 않고 그저 그 자리에 존재했다. 나무의 유일한 욕망은 땅속에 굳건히 박힌 뿌리였다.

박순쾌(77) 할머니의 손등은 나무껍질 같다. 눈가의 주름도, 꾸밈없이 소탈한 옷매와 풀벌레처럼 작은 고요가 내려앉은 눈매도 그렇다. 자기를 치켜세우지 않는 말투와 제스쳐도 할머니가 기나긴 세월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귀띔해준다.

사실 과잉된 자기표현에 익숙한 세대로서 할머니와의 대화는 가끔 답답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이를테면 결혼이라는 심각한(?) 행사에서, 또는 풋풋한 시절 야학에 같이 다니던 남자 이야기를 물을 때도, 할머니는 당시 상황만을 기억하려 할 뿐 속마음은 감추고자 했다. “그런 거 나는 모릅니더. 허허허”. 아니야. 분명히 뭔가 있어야 하는데․․․ 어찌 됐든 그 시절과 지금은 다르다. 하긴, 요즘 세상에 얼굴도 못 본 신랑과 결혼한다는 걸 어찌 상상이나 하겠나.

2014년, 박순쾌 할머니의 지상과제는 이제 삼평리에 들어서려 하는 송전탑을 막아내는 것이 됐다. 무엇인가를 강하게 원하지도 않았고, 평범한 삶에 순응하며 살아온 할머니가 용역과 싸우는 것도 마다치 않게 된 것은 어떻게 된 일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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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에 농사지었지. 손으로 벼 비고 보리 비고 했어. 오라비도 계시고 아부지도 젊고 해나노이 일은 크게 안 했으요 나는. 쪼매씩 했지. 친정은 딸 서이, 아들 서이 육 남매였어. 그때는 유산도 몬시키가꼬 생기는 대로 족족 다 낳았는 기라. 집이 그렇게 어려운 편은 아니었어. 농사를 지어도 많이 놀았지. 돌멩이 똥글한 거 주어가꼬 다섯 개 나나 놓고 놀았지. 그때는 테레비가 있었나 아무것도 없었거든. 그래 놀라 카면 동무들 서넛이 모이가지고 똥글한 돌멩이 던지고 놀았다. 어릴 적에 목욕 하러 갈 데가 있나, 저 계곡이나 저저 고랑에 물 내려가는데 가서 장난치고 돌멩이 던지고 물장구치고 이래가 많이 놀기도 했지. 그래 밖에 모르겠다. 하하

나는 야학을 했지. 그때 학교는 구산(창녕군 부곡면 구산리)에 쪼매난 게 하나 있었어. 거기는 돈 많은 사람들 가가 공부 쫌 하고 집이 쫌 약한 사람은 저녁에 야학을 했다 카이. 야학은 가직았어. 저녁 되면 동무들이랑 손잡고 몇몇이 갔지. 기역 니은 디귿 배우고 가갸거겨 배우고 그래바께 못 배았스요. 밤에 되면 한 30명 모이지요. 나는 그때 15살쯤 됐었지. 쪼매씩 배우고 많이 배우진 않았어. 촛불이 어딨노, 전기도 어딨노. 호롱불에 기름 넣어가지고, 쪼매 배우고 그랬다. 농사짓고 공부할라면 많이 힘들었지. 저녁에 두 시간 쓱 공부했어. 2년 댕기다가 그만뒀어. 어른들이 처자들 댕기면 몬 댕기게 말려서 가도 못했는데 엄마가 시켜줬지. 아부지가 성격이 너무 무서워가지고 엄마한테 살짝이 캤지. 엄마가 “내 너희 아버지 말리꾸마. 갔다 오니라. 니 이름은 써야 된다” 카면서 몰래 보내줬어. 엄마가 내 보내놓고 많이 곤란시러버 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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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학 다닐 때 눈에 띄던 남자는 없었어요?

그런 거 없었어요. 아무것도 몰랐다 카니까. 철도 몰랐지. 그때는 집성촌이라 성 맞은 사람끼리 놀았어. 타성이랑은 말도 안 했지. 야학에도 몇 사람 빼놓고는 다 동성이라. 열아홉에 결혼해가 스무 살에 이 집으로 시집을 왔는데 시집올 때까지도 아무것도 몰랐어요. 아버지가 딸은 오래 놔두면 안 된다 해가지고 그래 뭐 결혼시켰지. 그때 결혼하고 싶은지 그런 생각도 없었다. 결혼 하고 나니 이게 결혼인가 싶으고 했지. 그전에는 아무 것도 몰랐어. 다른 남자 그런 것도 몰랐고, 동네 지나가는 남자도 모르겠고. 아무 것도 모르고 결혼했지.

요새는 뭐 즈그끼리 만나가 결혼하지만 전에는 중매했어. 우리 클 적엔 중간에서 연결 해가지고 부모끼리 서로 만나고 의논해가 결혼했어. 결혼 때 처음 보는 신랑 맨 만나가 그때 부끄러버가 얼굴도 몬 드는데 어떡하노. 결혼을 우리 집에서 했지. 아가씨들은 천을 천장에 이래 쳐나 놓고 마당에도 쳐나놓고 판 하나를 중간에 갖다 놔놓고 했지. 또 솔잎 떼기 하나 꽂고 대나무 이파리 하나 꽂아가지고 마주 세워놓고 그래 절을 시키데. 절을 네 번을 하던가 하이튼 그래 하니 결혼이 끝나데. 못생겨도 우야노. 부모가 하는데 내가 안 할란다 하겠나. 가만히 있었지 뭐. 신랑은 두리넙덕하이 그렇더라. 그래도 동네 사람들은 신랑이 마음 좋고 수월케 생겼다 하데.

예전에는 1년 묵카가지고 결혼했어. 친정서 1년 있다가 시집을 일로 1년 만에 왔다 아이가. 일로 올 때 꽃가마를 탔지. 차도 없고 그때는 가마를 탔어. 사람이 앞에 한 사람 뒤에 한 사람 둘이 울러 미고 갔어. 가마가 똑 요래 네모 반듯하고 옆에는 까만 걸 대고 뒤에는 빨간 걸 댔어. 그게 꽃가마라. 내가 타고. 할아버지(남편)는 뒤에 따라왔지. 풍각 흑석에서 여까지 올라면 10리 인가, 어찌게 먼지 쉬면서 왔다. 창문을 들씨면 바깥이 보이고, 나는 꿇어 앉도 못하고 이래 양반다리 해가 있으라 카데. 치마저고리 요래 입고. 그래 내가 어데로 가는고, 뭐 시집이 뭐신 동 싶어가지고 빼꼼히 내 보고 했어. 그게 시집이라 카데 그게.

가마 타고 있으니 생각이 복잡하지. 이래 가면 무엇을 할런지. 남편이 무슨 일을 하는지 그것도 모리고 참 부모가 이래 보내줘서 오는 기지. 상견례를 안 해서 시부모님도 처음 봤지. 그래 여기 오니까네 뭐 천지 기계가 있나. 오자마자 보리 비러가자, 나락 비러가자 캐샀더라. 내가 낫질을 못해가지고 남편이 요래요래 가르쳐주데요.

남편하고 싸울 일도 잘 없었어. 속상한 일 있으면 좀 싸울라고 암만 애를 써도 안 받아주이 몬 싸운다. 술 좋아하고 노는 거 좋아하고 해도 자기가 더 미안케 생각하는데 못 싸워. 속에 천불은 나도 뭐․․․ 비 오면 나락 비 맞히면 안 되니 애가 터지는데 웃으며 들어오면 싸우지도 못하고. 나는 내대로 골 나가지고 마 잠도 안 오고 둘둘 구불다 곁에 자고 그랬제. 하하하. 남편이 생각은 그래도 잘 해줬어. 디게 속상하게도 안 살았고, 못 먹은 것도 없고. 남들도 다 잘 만났다고 하고. 뭐 마음 안 썩이면 그게 잘 하는 거지 안 그래요. 남편은 동 이장질 하고 새마을 지도자도 하고 그랬어요.

그러다가 할아버지(남편)는 쫌 일찍 돌아가셨어요. 우연히 그래 마․․․ 보자 59살에 돌아가셨어. 내캉 나이 차이는 네 살 났고. 그때 신경을 썼는가 마 갑자기 무슨 바람(중풍)맨치로. 수족을 못 쓰고 그렇더라고. 일 년을 그래 계시다가. 돌아가셨다 카니까.

이쟈 생각도 안 납니다. 처음에는 생각이 나고 혼자 어떻게 살까 싶으더마는 이쟈 뭐 햇수가 얼매나 됐는데 뭐. 이쟈뿌야 되지 자꾸 생각하면 어떻게 살라고. 허허허 친구들 만나고 놀고 하니까네 자연적으로 잊어지대요. 전에 할머니들이 죽는 년, 나날이 정이 떨어진다 캐서 저게 무슨 소리고 싶더니 우리가 딱 돼 보니 전에 할머니 하는 말씀이 참 딱 맞구나 그 생각이 나더라 카니. 바깥어른 고인 되고 나니까네. 처음에는 많이 생각하고 눈물도 많이 흘리고 했지만. 이제는 이쟈뿌써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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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전탑 싸움 힘들잖아요. 힘들면 남편 생각 안 나요?

생각나지. 이야기하면 조금 풀리는데. (한숨) 요새는 다 이쟈뿌고 친구들 상대를 많이 하니까 짜다리 생각 안 해요. 할아부지 보고 싶다고 그러면 어디서 구해올래? 와? 다른 할배가지고 되겠나. 하나 구해와 보소. 인자는 보고 싶고 그런 것도 없어요. 사진 같은 거 한 번 볼 적에는 참 뭐 전에 살았던 기억도 나고 같이 일한 기억도 나고 나기는 나는데 이거 안 보면 다 잊어뿌고.

-송전탑도 지나고 나면 좀 괜찮아지는 건 아니에요?

아직까지 송전탑 의미를 모르니까네, 의미를 옳게 모르니까네. 언제 끝이 날랑가 우얄랑가도 모르겠고. 2009년에 싸움 시작하고 이때까지 싸울지도 몰랐어. 모르고말고. 이만큼 할 줄 알았으면 누가 싸웠겠노. 할매들이 뭐 많이 알아가.

처음에 공사 들어올 때 막을라 카니 용역들이 막 끄잡아내리고 그랬어. 천지도 몰랐지. 그때 어떻게든 저놈들을 잡아 지기야 되는데 그걸 모르고 울며불며 끄이 내려왔다 카니. 시커멓게 해가 나무를 삭삭 베는데, 우리가 나무를 끌어안았다 카니까. 그래도 막 그냥 나무를 베는 거라. 그라이 우리를 질질 끌어서 밑에까지 내리데. 경찰 놈들은 와가지고 둑에 서가지고 쳐다보기만 이래 쳐다보고 해서 “이 개 같은 놈들 오기는 뭐하러 왔노. 쳐다만 볼 거면 뭐하로 왔노”카이 그래 실실 기 올라가데. 그때 지낸 거 생각하면 눈물이 난다.

한전도 밉지마는 경찰이 자꾸 따라 댕기서 그게 미버. 어딜 가도 어떻게 알고 따라온다 카이. 즈그가 앞에 먼저 가 있기도 하고. 이번에 밀양 갔을 때도 즈그가 먼저 가 있고. 어떻게 그래 아는지. 전에 뭐 할매이 가들 보고 똥파리라 카든데 순사가 우애 그래 아는 동. 성곡댁이 순사더러 패악을 지고 감을 지르고 이래도 그냥 따라댕긴다. 저거는 그게 임무가 그기라 하거든. 우리를 도와줘야 되는데. 옛날에는 뭐 순사라 카믄 울던 아들도 마 뚝뚝 그치고. 그래가 순사는 무섭다고 그래 생각을 가졌는데 참 이 일로 하고 나니 우리가 자꾸 어디 간다 카믄 따라댕기는 기 자꾸 따라댕기고 해.

그래도 헬기도 뜨고 하던 공사를 계속 막으니 중단되데요. 맘이 좀 편하데요. 도와주는 사람도 많고 해서 얼마나 맘을 크게 놨는지 모르겠다. 손님들이 많이 오시고 북적북적하니까네, 우리꺼정 11명씩 있을 때는 뭐 이야기가 있나, 테레비 그것만 처다 보이 가마히 바라고 앉았다가 민화투 한 번 치고 때 넘가가 집에 와서 자고 그래 지냈는데 손님이 많이 와서 기분이 좋아. 아이고 시상에 골짜기에 우째 알고 이래 찾아왔노. 그래 참 지냈는데 오늘날까지 도와 주시가 고맙지. 너무 좋아서 머라꼬 말로 몬 하겠다.

언제까지 싸울랑가. 저기 철탑 밑에 전답이 천오백 평 있어. 어른한테 물려받았지. 사람들이 돈 더 받으려고 한다 카는데 그게 듣기 싫다고. 우리가 돈으로 해결하려 했으면 일찍 해결 했을 거 아닙니까. 안 그렇습니까? 우리는 돈은 싫다. 우리는 저거만 안 세우면 된다. 그래 하는데 다른 사람들은 돈 더 받을라고 저렇게 버티고 있다니까 그게 진짜 듣기 싫다. 돈으로 해결 할라고 했으면 왜 이 고생을 하겠습니까. 이왕 시작한 거 끝을 낼꺼정 우야든지 철탑만 안 시우면 그기 해결이다. 그래 한 가지만 생각하고 다녔심다. 참말입니다.

나중에 나도 요 곁에 주인 곁으로 가야지. 요 바로 뒤에 가면 (선산이) 가까브예. 전에 밭 하는데 콩 숭가 먹고 이래 하다가 어른 세상 가버리고 고마 그 밭에다 산소를 썼다 카이. 그래 마 우리 가족은 고 밭에 이전 할 끼라. 산에도 안 가고 요 뒤에 올라가면 산 밑인데 밭이 큰 게 하나 있다 카이. 고 갈 겁니다. 우리 가족은.

우야든지 저 철탑만 안 서고 뭐 그라믄 좋겠다. 그 소리 빠끼 할끼 없다. 진짜다. 저것만 안 서면 만사 해결 다 된다고 그래 맘 먹고 있다. 저것만 안 서면. 이제까지 참 지나간 거는 내비두고 저기 저 철탑만 안 시우면 원이 없다고 그래 한 가지만 생각하고 있으예. 이 많은 사람 이리 도와주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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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아침, 박순쾌 할머니가 당번을 서러 헐티로를 따라 농성장으로 걸어오고 있다. 할머니는 산수를 바라보는 나이에도 불구하고 허리가 굽지 않아서인지 걸음걸이만큼은 처녀 시절의 모습이 남아 있었다. 시댁 살림이 넉넉해 살면서 큰 고생 안 했다는 할머니. 곱게 자란 은사시나무 같다. 할머니가 나무라면 뿌리는 평생을 지낸 삼평리에 뒀으리라.

나무를 옮겨 심어 본 적이 있다면 알 것이다. 뿌리 주변의 흙을 절대로 털어내서는 안 된다. 옮기는 중 그 흙이 상당부분 유실된다면 나무는 다른 곳에 옮겨 심는다 하더라도 금세 말라 죽게 된다. 옮겨 심은 그 땅이 설령 전보다도 비옥한 땅이라 하더라도 그렇다. 흙이 떨어지지 않게 뿌리를 조심스레 싸서 묻을 때도 조심스레 함께 묻어야만 한다. 나무와 나무가 오랫동안 뿌리박고 있던 땅은 하나이기 때문이다.

나무는 나무가 뿌리박고 있는 땅과 분리될 수 없다. 삼평리에 평생을 뿌리박고 산 할머니도 마찬가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