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이 트는 새벽녘이면 이억조(75) 할머니는 이부자리를 가지런히 정돈한다. 나지막한 선반, 할머니 키에 꼭 맞는 여닫이문 아래로 소리죽인 발걸음이 지나간다.
해도 뜨지 않은 시간, 이억조 할머니는 밭으로 향한다. 할머니의 발걸음은 만개를 기다리는 꽃처럼 느릿하다. 흙빛으로 물든 손톱, 손등에 깊게 팬 주름처럼 숨 쉬는 무엇인가를 만들어내는 것은 긴 호흡이 필요한 법.
반대로 한순간에 이뤄지는 것은 언제나 무엇인가를 파괴하는 일이다. 탁 트였던 하늘을 별안간에 꽉 틀어막은 삼평리의 송전탑. 일생을 따뜻한 품으로 많은 생명을 길러 온 이억조 할머니의 등 뒤로 송전탑이 보인다. 송전탑은 밭으로 향하는 할머니의 느릿한 걸음을 뒤따라간다.
“아니, 이기(송전탑이) 우리 밭에 가믄, 저리 가믄 내를 따라온다. 또 또 저 밑에 저 집회하러 가믄 그기 또 내 곁에 따라온다. 거기서는 더 잘 보이. 저기 금곡 넘어가믄 (송전선이) 무거버가 척척 늘어져가지고 곧 넘어질 정도라. 흉하고 무서워가꼬. 그래 요리 온대요. 우리 집으로. (송전선을) 걸라 카면, 이 낮은 봉우리 밑에 소리도 웅-하는데 이까지 끄잡아 내릴 거란다.”
이억조 할머니는 어릴 적부터 감정 드러내는 것이 어색했다. 배워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물론 다른 교육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큰오빠는 천자문도 다 뗐지만 억조 할머니는 글 쓰는 법도 배울 수 없었다.
“큰오빠는 공부 많이 했지. 천자문도 다 읽을 수 있었어···나는 공부 못했지. 그때만 해도 여자들은 공부 안 하고 막 일만 시키고 그랬지. 시집 오이 그래도 영감님은 또 똑똑태. 돈 없어가지고 공부는 못했어도”
“공부가 뭐 중요했나. 그때는 6·25 사변에 정신도 없었어. 친정서 사변 겪었지. 그때는 그거 미숫가루 빠사가지고 다녔어. 칠에 쳐가꼬 그거를 명배하고 삼배하고 이렇게 주머니에 짚어가꼬 싸 다닐라는데··· 그때 창녕 사람들이 이리(이서)로 다 넘어왔어. 피난 왔지. 피난 온 사람들은 정자나무 밑에서 자고, 칠월 팔월쯤 됐는데. 우린 피난 가진 안 했어. 언덕 밑에 요런데는 요새 제초를 치이 나물이 없제? 옛날에는 참비름 나물 그거 뜯어가지고 요 솥에 끓여놓고 무도 끓여가 그래 소금에 문쳐먹고 그랬어. 봉다리도 싸고 다녔어. 묵고살아야 되니. 불 때가 밥 못 해묵으니··· 목말라 죽지 말라고 오줌 노가지고도 묵고 그랬어. 엄마캉 목숨만 살자고 약속을 그래 했다.”
전쟁은 이억조 할머니의 십 대를 송두리째 앗아갔다. 파릇한 십 대를 전란에 흘려보내고 나니 기다리는 것은 시집살이. 이억조 할머니는 풍각으로 시집가서 2년을 살고 이후 지금의 삼평리로 거처를 옮겼다.
“그래 있다가 보자, 육이오가 지내가고 시집을 왔어. 스무 살에. 그래가 여 와여, 큰아들 놓고, 둘째 아들도 놓고, 딸 놓고 그래 사 남매를 낳았써. 그 시절 아들 둘 딸 둘 키우메 밭농사까지 해여··· 말도 말아라. 말도 말아. 아들 공부 시키미, 일하니. 그래가 논까지 다 조 팔아가지고 큰아들이랑 작은아들은 졸업시켰어. 큰 딸은 똑똑했는데 지가 ‘엄마 핵교는 이제 힘들어가 고마한다’ 카며 그만뒀어.”
삼평리로 옮기고서도 이억조 할머니의 삶은 순탄치 않았다. 집이 불에 타기도 했고, 1992년 하천 정비사업으로 할머니가 오래 일궈온 밭이 청도군에 헐값에 매수되기도 했다. 무너지는 것은 언제나 한순간.
“이 집도 한 번 불탔었어. 아래채에 불 나가지고 우얄 줄을 몰라가···누가 담뱃불을 던졌는지 살림살이를 다 태웠어. 우리 살은 거 말도 마라. 밭에는 외생 묘목을 심어가 요래 왔는데, 하천 아래 따라 니리가미 둑을 쭉 해놨제? 그때 내가 여기 삼십 년 넘게 살아도 둑이 안 무너지던데, 우리 둑만 놔뚜소 이 둑이 떨어지거들랑 내 혼자 막으께요 군에 가서 그래도, 군에서 나와서 밭을 보고 가더니 땅을 좋은 데만 딱 잘라가 좋은 사과밭이 다 들어갔어. 그거 한 낭개에 그때 돈 만 오천 원으로 헐게 사가고, 지금은 젤 몬한데만 지어 묵고 살아”
삶터도, 집터도 잃었다. 하지만 다시 일어설 수 있었던 것은 의지할 수 있었던 남편이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 남편도 1985년에 먼저 떠나게 됐다. 겨울철 개울물에 시린 손 비벼가며 빨래를 할 때도, 사 남매 뒷바라지를 하며 밭을 갈 때도 힘들 때면 마음을 기댈 수 있는 사람은 남편이었다.
“우리 영감님이 성공은 못 했어도 공부는 잘했어. 여섯 살 차이가 났는데, 85년도에 돌아가셨어. 혼자가 되니 힘이 들더라 카니. 그래가 산 거 말도 말고...맨날 밭에 가여 울고 그랬지. 세월이 가니 살은 거지. 태산이 무너진 거 같애. 어디 지댈 데가 없으니”
이억조 할머니 집에는 여전히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흔적이 산재해 있다. 안방 문 주변에는 할아버지가 생전에 쓴 글씨들이 부적처럼 붙어 있고, 할머니의 기억 속에도 생생하다.
“여기는 소 마구간인데 영감이 여서 불 때고 있다가, 애들 보고 다때마리 요만한 옹기단지에다가 맨날 사오라 캐. 이거를 중문에다가 놔두고 친구들이 올라갈 참이면 불러가 여기 중문에서 술 먹고, 나도 내삐리고, 병든 엄마도 내삐리고 약주 많이 잡순 이태백이 아부지도 내삐맀어. 일도 안 하고 낚시나 하러 가고, 속에 천불이 났지. 그래도 여기저기 글도 써 붙여놓고 천재였대요.”
느릿한 걸음으로 할머니는 평생을 일해온 밭에 다다랐다. 이곳에서 할머니는 눈물을 흘리기도, 흙빛이 물든 손으로 작물을 일궈 아이들을 먹여 살리기도 했다. 할머니는 잠시 상념에 잠겨 하늘을 바라보지만, 고개를 드니 이제는 여기까지 뒤따라 온 흉흉한 송전탑이 서 있다. 송전탑은 할머니를 굽어본다.
북경남 1분기 송전선로의 송전탑은 5월 현재 95%(40개 중 39개)의 공정이 끝나고 23호 한기만 남은 상황. 굽어보는 송전탑으로부터 도망갈 수 없을 것만 같은 생각에 할머니는 언제나 마음 한편이 불안하다.
아메리카 원주민을 짓밟은 유러피안과 그들이 겨눴던 쇠붙이처럼 한전은 송전탑을 끌고 삼평리에 이미 결정된 미래를 알리러 왔다. 2009년 2009년 한전이 갑자기 주민들을 찾아오자 할머니는 집 근처에 송전탑이 설치되며, 송전선이 마을 위를 양분할 것을 알았다.
“이제 봄인 갑다 하며 밭에 가서 밭 매고 오니까네, 만장 지술 큰 상을 차리 놓았대. 어여, 이거 누가 이래 주더노, 우리가 채맀나 하니 한전이 채맀다고 하데. 왜 채맀나 카니 저 철탑을 세우기 위해 전파가 얼매나 가는지 그걸 설명해준대요. 한전이 와도 개안타하던데 나는 밀감 한쪽만 먹고 왔어. 퐁퐁이라카던가 피죤이라카던가 가정용품을 많이 갖다 놨대요. 우리 가져가라고. 그건 되돌려 줘뿌고 먹는 거는 쪼매 먹었대요. 송전탑이 비슬산으로 갈란지, 갓골로 갈란지, 용천사로 갈란지. 용천사는 너무 맹신절이라 이쪽 절로는 안 될 거고···”
그렇게 한전은 되돌아갔다. 한편, 2009년 당시 마을 이장은 한전에 조작한 주민의견서를 제출하기도 했다.
“군수랑 박만수(삼평리 전 이장)랑 뭐 같은 한편이라고, 박만수가 조작을 꾸며서 그래가 난리 지깄다아니가. 서에 가가지고 난리를 지기고 지기고 왔대요. 울고 막 고함도 지를 만큼 지르고. 높은 사람은 저쪽에 앉았고 하는데 막 속에 두드래기가 나가 조작 꾸며서··· 왜 똑바로 안 사노. 원한이 그거라. 내 재산 다 드가도, 조작 꾸몄는거 똑바로 해 주라. 이게 군청이 똑바리나, 경찰이 똑바리나. 이런 세상 첨봤다. 그카니 아무런 답이 없고, 그래가 있었더라. 그래 노니 쌍둥이 어마이(마을 부녀회장 김은주 씨)도 고함을 지르고. 빨갱이라 카거나 말거나 내 발등에 불 꺼야 된다 그죠? 내 발등에 불 꺼야지. 아들딸이 머라 캐도, 인쟈는 안 된다. 이때까증 싸운 게 얼만데, 싸운 게 원통하니 나뚜라. 내 발등에 불 끌란다. 돈 요구하는 거 아니다. 왜 한전이 내 재산을 갖다가 다 직이뿌고 이래가지고 뭐로 묵고 살라카노.”
“한전 놈들이 제일 미워. (24호 송전탑을 가리키며) 저기 올라가꼬 굴렀는기라. 데모하러 올라 가가, 작대기 두 개 짚고 올라가는데, 나는 한 발 올라가면 두 발 미끄러져가 내려왔어. 우리 할매들이 저 꼬부랭이(포클레인) 대가리고 뭣이고 몰아 부쳐가 개울에 가가 떨어진다고, 우리보고 원망하지 마래이 카면서 데모를 했어. 그래도 할매들이 열다섯 오면 즈그는 다섯 더 데리고 오고··· 그래가 며칠로 싸우면서 돌삐를 안은 기라. 안아가지고 쥐 떤질라 카니 뒤에서 덥석 붙잡아뿌는기라. 시번 니번을 뺏겼어. 그때 저 우에 발통기가 돌아가미 바위를 부수데요. 분이 채여서 죽겠데. 그래서 ‘야이 놈들아. 너거는 성한 밥 먹고 우리는 썩은 밥 먹었나’며 해도 저기 포클레인은 멈추지도 않고. 분에 차가 실컷 울었는기라. 우는데도 한 놈은 사진 찍고 앉았어. 그 망할 놈들이. 순경들은 우리가 당해도 가만히 있고. 가촌할매 먼저 끌리오고, 춘화 아지매도 끌리오고 계향이 아지매하고 내하고는 끌리 내려오진 안 했어. 춘화 아지매는 못 죽으이 살았다. 구디 파 놨는데 드가고, 쌍디는 울고, 나도 따라 울고. 한 시간 동안 울었을 기다. 내 혼대로 하면요 포클레인이랑 저거가 갖다 논 자재 막 다 밀어가 구불렀으면 좋겠대요. 태풍이라도 와서 농사 다 망치더라도 이거 다 자빠라지면 좋겠더라.”
송전탑 건설을 막기 위한 할머니들의 싸움은 이토록 처절했다. 2012년, 당시에는 지금의 청도345kV송전탑반대공동대책위원회도 꾸려지지 않았고, 할머니들은 누구 하나 도와주는 사람 없이 노구를 이끌고 외로운 싸움을 이어가야만 했다.
이억조 할머니의 삶은 빼앗김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어느새 할머니 뒤를 따라다니기 시작한 송전탑은 여태껏 조용히 살아온 할머니의 삶을 뒤흔들어 놓았다. 집에서 밭으로 가는 길 어귀마다 할머니의 발자취가 녹아있고 남몰래 흘렸던 눈물도 스며있다. 그곳에 송전탑이 세워진다.
언제까지나 빼앗길 수만은 없었다. 싸움을 시작했다. 그러니 돕는 사람도 생겼다. 대책위가 꾸려지고 나서는 생소한 사람들을 만나기도 했다. 다른 삶을 산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기도 하고, 그 사람들에게 수줍은 듯 자기 이야기를 털어놓기도 했다. 수년간의 긴 시간 송전탑 투쟁과 함께 억조 할머니는 그렇게 다시 무엇인가를 품에서 기르고 있었다.
할머니는 다시 밭에서 내려온다. 평화공원에는 새벽녘 저마다의 삶을 이어가기 위해 소일거리를 끝내고 온 할머니들이 모여 있다. 부산댁은 파를 다듬고 성곡댁은 국을 끓인다. 밥솥의 증기가 천막위로 피어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