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끼이이익’ 숨죽여 방문을 열었지만 나는 소음에 심장 박동이 빨라진다. 혹여 지켜보는 이가 있을까 잠시 뒤를 돌아본다. 아무도 없음을 확인했지만, 하늘에 커다란 눈동자라도 떠 있는 듯하다.
문지방을 넘는다. 한 뼘 높이의 나지막한 문지방을 넘기가 힘들다. 방이 어두웠던 것인지, 아니면 문지방을 넘고 눈앞이 캄캄해진 것인지 잠시 서서 머뭇거려보지만 형광등 스위치를 찾기가 쉽지 않다. 약간의 현기증도 느껴졌다. 하지만 순간 눈앞을 스쳐 가는 자식들의 모습에 김선자(75) 할머니는 마음을 다잡아야 했다.
집에 가면 자식들이 공납금을 달라고 손을 벌릴 것이다. 쌀밥을 못 해줘서 미안했던 마음도 발걸음을 재촉한다. 공부도 못 시켜줬는데 굶겨서야 되겠는가 하며 논이라도 악착같이 매어 봤지만 집안 살림은 나아질 줄을 몰랐다. 매번 빌린 돈을 갚고 나면 남는 돈이 없어 또 이렇게 돈을 빌려야 했다. 집주인 나동댁(이외생 할머니) 허락은 받았지만, 아무도 없어 조용한 집에 들어가서 돈을 가져가려니 발걸음 소리도 숨소리도 새삼스럽다.
인생에서 나의 삶을, 내가 원하는 대로 살아본 적이 한순간이라도 있었던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김선자 할머니는 정작 살아온 삶의 여정에서 고개를 들고 여유롭게 두리번거렸던 적이 없다는 것도 알게 됐다. 삶의 모든 순간에서 휴식도 자존심도 사치였다. 쌀 한 톨이라도 더 모아야 했다. 자식들에게만큼은 가난을 물려주고 싶지 않았다.
창호지를 발라 바람이드는 집이지만 그래도 할머니는 집과 평생을 뒹군 밭떼기를 물려줄 유일한 유산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송전탑 공사로 그것마저 여의치 않게 됐다.
어릴 적에는 아무것도 한 게 없다. 내 보리나 갈고, 시집와서도 보리 갈고 그랬지. 요새야 보리는 안 하고 소보리(호밀)를 갈아가 그렇지 그전에는 전부 보리 갈았어요. 우리는 땅이 없어가 보리타작이나 하러 갔지. 우리 보리타작 19년을 했다. 발통기 가지고 보리타작 할라면 3일이고 4일이고 밤새는 건 보통이라. 잠을 안 자는 기라. 타작한다고 사흘을 안자면 그제야 서서 잠을 자는 기라. 나도 주인도 죽기 살기로 보리 미깄다.
송읍(청도군 청도읍 송읍리)서 방지로 스물하나에 시집왔어. 보리밭 맬 사람 없다 캐가 보리밭 매러 왔어. 쪼매 살다가 보니 시동상 살림 내 줄 데가 없어가 우리 집을 줘뿌고 우리는 여 밑에 폐교된 소말(남산1리) 카는 데로 이사 갔어. 거기는 전부 다 밭이고 논이고 능금 밭이었어. 거기로 가니 또 비는 우째 그래 오겠는고. 비가 왔다 카면 집에 물 들어오제, 한 날은 앞 둑 뒷 둑 다 터지니까네 우리 딸아가 집에 못 왔어. 도로 끈티 와 있으니 고함 지르고 우는 기라. 물은 이만쓱 오지요. 주인캉 둘이 끄내끼를 매고 능금나무를 붙잡고 건너간 기라. 다시 딸캉 엮어서 줄줄줄 건너오는 거지.
소말에서 보리타작 해가며 형편이 조금 피이니까 옛날 우리 살던 방지로 다시 가고 싶어. 평남(정두쇠 할머니) 할매가 갖고 있던 움막집이 있었는데 그걸 얻었시요. 서말에 우리 집을 다부 뜯어가 와가 거기다 지었어요. 형편이 어려워가 근근이 지었다 카이.
우리 그 당시에 고생 안 했다 칼 수가 없다. 살림이 없어서 우리 아들 수학여행 한번을 못 보냈어요. 소풍도 보낼라 카이까 아 손에 쥐아가 보낼 게 있어야 보내지. 보리도 없지 쌀 떨어졌지. 선생은 아만 보내라 캐도 보리밥도 못 싸주는데 어째 보내노. 다른 아들은 운동신 신고 소풍 가방 메고 가는데 고무신 신고 우째 가노.
우리 자식들은 공부도 못 했어요. 딸아들 전부다 국민학교나 중학교 나왔지. 큰아들 작은아들은 이서 고등학교라도 나왔어. 우리 딸아 둘이는 “엄마, 넘 가는 고등학교 나도 가 볼란다”카니 나는 “그래, 나는 너거 시킬 형편이 안 된다. 나도 니들 아버지도 공부 못한 거 너거라도 마이 시키고 싶었구만 형편이 이것밖에 안 돼서 못 시키겠다. 중학만 하고 치아라”고 캤지. 지도 더 생각하디만 “엄마, 나 고등학교 안 갈게. 엄마한테 내가 너무한 짓 했는갑다” 카는기라. 그런데 우리 딸 둘이는 자기 하는 데까지 한다고 카는기라. 우째할란가 물으니 부산서 야간공부를 한다는기라. 즈그 둘이 처지랑 맞는 아가씨 하나랑 서이서 집을 하나 얻었어.
그 집이 부산 어데 산골짝 같은 덴데 무슨 계단이 그래 질든동. 올라가도 끝이 없어. 거기 가서 뭐할래 카며 물어보니 무슨 고무공장이라 카던가 다닌다 캐. 참 거기 보내놓고 올라 카이 발걸음이 안 떨어지드매. 참 마이 울었으요. 못 입히고 못 먹이고 가고 싶은 학교도 못 보내고. 집에 오이 밤새도록 잠이 옵니까? 안 오지. 진정을 못 했지.
그러다 한 번은 딸이 올라왔는데 손을 요래 볼끈 쥐고 안 피는 기라. 그래 “니 와 손을 안 피노?”카니까 그제야 보여주는데, 바늘가 그 고무 안 드가는 걸 찔러노니 손이 성한 데가 없어요. 내 보면 기분 상한다고 손을 쥐고 있는 기라. 참 손 만치 보며 또 울고. 그래하며 야간에 공부 할라면 또 얼마나 힘들겠노. 야간 고등이라도 나오이 귀가 밝아가지고 뭐라도 잘합니다.
낮에는 운동신을 맨드는데 즈그는 고무신을 신었어. 가뜩이나 보들한 손인데, 그 신을 바늘로 둟을라 카니 얼마나 힘이 드나. 손이 성한 데가 없어예. 그거 보고 내 스트레스 받아가 몸이 좀 아팠다 카이. 즈그는 엄마 아파가 죽을랑가 싶어서 애간장이 타는 기라. 지금도 내가 뽀시락 뽀시락 일어나가 있으면 캅니다. 내 건강해서 참 좋다고.
큰아들은 고등학교 때 수학여행 갈라 카대. 누이도 안 가고 동생도 아무도 안 가는데 우예 보내겠노 카니까 친구들이 따라가자 칸대. 그래 니 가고 싶나 물으니 친구들이 가자니 가고 싶대. 그래가 대접 잘 받고 갔다 왔지. 딴 것들은 수학여행이고 소풍이고 없었어. 막내이가 고등학교 가가지고 수학여행을 갈라는데 지는 안 갈란다 카대. “엄마 돈도 없는데 안 갈게”카며 보내줄라 캐도 안간다 캐. 아침에 친구들 버스 타고 가는 소리가 나이께네 이불을 덮어쓰고 울어삿는기라. 나는 못들은 체하고 가만히 있었지. 한참 있디 나오길래 “니 수학여행 가고싶제?”카니 “아니․․․”카는데 눈물이 마 뚝뚝 흐르는 기라. 그렇게 키았다.
제일 한 되는 게 자슥들한테 잘 못 해준기지. 이것도 부모라고 한 가지 해 준 것도 없고․․․ 누가 지나가며 보고는 “이 집은 보리쌀 갖고 밥 묵나”카면 쪼매 섞어서 먹는다 캐. 그게 밥이라 소리를 못해서. 지금은 뭐 내 해먹고 싶으면 얼마든지 해먹지만 이제는 맛있는 것도 먹고 나면 속이 안 편해서 싫고 작게 물수록 편코 그렇습니다. 사람이 속고 사는 기 인생이라 카디 이런 건가 싶어요.
이제 와서는 우리 큰아들도 카고 큰 며느리도 칸다. “엄마야, 나이 많이 먹으면 여기 들어올 참인데 철탑 때문에 우째 살겠는교”. 그라면 내가 카지. 우리가 막는다고, 와서 살라고. 있는 재산 이거는 못 내삐릴 거 아니가. 우리는 끝끝내 말릴라고 신경 쓰고 있다. 이 재산을 우예 모은 재산인데.
우리도 그렇지만 우리 안 시어른이 스물아홉에 혼자가 됐어예. 바깥어른이 서른 하나에 돌아가셨거든. 그때부터도 몸조리도 안 하고 밭매고 했다고. 그 재산을 다 뺏기면 우짜겠노. 아들 공부 못 시킨 죄로 논이라도 악착같이 벌어가 사놔야 안 되겠나 카니 살 여지도 없는 기라. 그래 한평생이 이리 허무하게 다 가뿠는데 인생이라 카는 게 이긴가 싶다.
예전에 할매 할배들 계실 적에 내 주머니에 돈이 없으면 좀 빌리 주이소 하며 다녔지. 다른 이는 잘 안 빌려줘도 두 어른은 참 잘 빌리 줬지. 나동댁이는 아들이 은행에 댕기고 좀 사니까 용돈을 약간 받았어. 내는 그 집에서 빌리가 저 집 거 갚고, 저 집에서 빌리가 딴 집 돈 갚고 그래 돌려막기를 했어. 나동댁이가 친구라고 내가 돈이 없으면 나동댁이한테 “나동댁이야, 돈 있그등 쫌 줘. 내 수일 내로 우예가 주꾸마” 카면 빌려 줘. 한날은 나동댁이가 대구에 나가서 전화를 하는데 “집 안 구석 어디에 돈 찡가놨다. 빼가라” 카는기라. 참 마음은 기쁘나 아무도 없는 집 들어가기가 그래 참 힘들데.
우리 그 당시에 고생 안 했다 칼 수가 없다. 살림이 없어서 우리 아들 수학여행 한번을 못 보냈어요. 소풍도 보낼라 카이까 아 손에 쥐아가 보낼 게 있어야 보내지. 보리도 없지 쌀 떨어졌지. 선생은 아만 보내라 캐도 보리밥도 못 싸주는데 어째 보내노. 다른 아들은 운동신 신고 소풍 가방 메고 가는데 고무신 신고 우째 가노.
자식들 못 해준 게 한인데, 이때까지 모은 거 해도 줄 것도 없으예. 논 한 마지기 있는 거 하고 집 하나 하고 밖에 없으니께. 이게 전부라요. 송전탑 저것 때문에 이제 문제라 카이. 이 재산이라도 팔라 카면 팔리나. 옛날에 이십 삼십 하던 거 이제는 오만 원도 안 하니 팔지도 못하지. 우리 아들이 “시내도 철탑 마이 있는데” 카는기라. 그것캉 다르지. 어떤 마실 이야기를 들어보이 그 마실에는 철탑 들어와가 오 년 만에 암 걸린 사람이 나오고 소 새끼들도 옳은 기 하나도 없어진 기라. 전신에 빙시를 놓아요. 그래가 우리도 악착같이 말릴라 안 캅니까.
저것 들어와가 좋은 게 하나 없다요. 줄 걸어 노면 소리도 그렇게 난다 카대요. 비 오는 날은 밤새도록 울어서 여기 못 있는대요. 또 문만 열어도 줄 걸려 있는 거 보면 속 터질 기고. 시내에 철탑 서 있는 거 봤다 아입니까. 그래가 우리는 이래 말맀다 카이. 들어와가 좋을 게 하나 없다. 저것 들어서뿌면 땅값도 없다 칸께네. 또 사람 몸에 좋을 것도 하나 없어. 우예 하든가 말리야 안 되겠나.
첨에 공사 들어올 때 말린다고 힘들었지. 나는 그거 말리다가 용역 놈이 손을 푹 찔러가꼬 피가 철철 나는데도 넘사시러버가 옷에 싸고 가마이 있었어. 용역들 덩치 커다란 놈들하고 싸우는 것도 힘들고, 순 경찰 놈들도 한전 놈들 편만 들고. 내가 한창 싸울 때는 여기 속이 꽉 맥히가 풀 데가 없어요. 영감한테 화풀이라도 좀 할라 카면 몇 마디 화풀이 좀 하다가 나가야 되지 안 그러면 다부 화가 더 올라오고. 내 마음이 얄궂어서 병이 와도 이제 오지 싶다.
세상에 우리 편이라고는 여기 오는 단체 사람들밖에 없어. 사람들이 많이 와줘서 너무 고맙지요. 그렇게 도와주는데 이 송전탑을 못 뽑으면 우얄까 싶어. 뽑아가 마실에 송전탑 들일라 카는 인간들 코띠를 납닥하게 하고 싶은데. 경찰 놈들도 한전놈들도 국가도 다 필요 없고 다 납닥하게 해야 돼. 보상금 받을라고 우리가 이 짓 한다 카는데 돈 몇 푼 받을라고 한거면 벌써로 치았지. 그거 답답은 거 같으면 벌써 시마이 했지. 남이 머라 캐도 우리는 우리대로 살면 돼요. 인생살이가 우리 질대로 가면 되는 거지. 그냥 단체 사람들이 도와주는 거는 이래 감사하지예. 우리도 사람이라고 도와주러 온다 싶고. 머시로 보답하겠노. 힘이 안 돼가.
우리가 이만치 왔는 것도 참 많은 사람이 도와 준 덕택이고 그래가 인쟈 싸워도 힘도 나고 합니다. 할마이 몇이서 용역들이랑 싸울 때 끄잡아 내리고 끌리고 할 때는 참 우예 살꼬 싶으디 참 그래도 한 분 한 분 오시가 도와주는 힘으로 이때까증 밀고 나와서 인쟈 용기도 생기고 힘도 생깁니다.
평소 뵙던 김선자 할머니의 모습은 유쾌했다. 그 유쾌함으로 일상을 옥죄는 스트레스를 이겨내려는 듯했다. 한전이 용역을 동원해 송전탑 공사를 강행하는 극단적인 상황의 경우에서도 할머니는 입심 좋게 그들을 풍자했을 것이다.
인터뷰를 시작하며 자식들 이야기가 나왔을 때, 김선자 할머니의 눈매가 쳐지며 목소리에는 물기를 품었다. 수십 년 전, 풍요롭지 못했던 세월에 쌀밥 해먹이고 다른 집처럼 자식들을 수학여행 한 번 못 보내줬다는 죄책감이 아직까지도 가슴속에 응어리져 있는 듯했다.
김선자 할머니가 할 수 있었던 것은 그저 악착같이 일해서 삶을 꾸려가는 것뿐이었으리라. 그렇게 흘린 땀과 한숨으로 꾸린 재산. 한평생을 맞바꿔 꾸린 재산이다. 적정한 금전적 보상이라? 애초부터 불가능했던 것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