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비053] 김현진 감독 작품선

간섭과 참견 대신 애정과 위로에 목마른 지역 청년세대의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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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역’+‘독립’ 영화라는 대전제는 유효한가

‘지역영화’, 혹은 ‘로컬영화’라 불리는 일군의 작품들은 21세기 한국독립영화의 새로운 방향이나 전망으로 요 몇 년 동안 꾸준히 거론되는 중이다. 다양성과 새로운 시도가 과거의 정치성을 대신해 한국독립영화의 성격에 부합된다는 판단과 함께, 제도권 영화학과와 상업극장 개봉으로 목표치가 맞춰지면서 닮은꼴로 획일화되는 문제점을 극복할 대안적인 성격으로도 주목받게 된 것이다. 여전히 수도권으로 집중된 자원과 환경에 비해 턱 없이 열악하다지만, 지역에서 오랫동안 자리를 지키며 활동해 온 이들에게는 격세지감이 느껴질 만큼 일정 부분 지역에서 영화를 하는데 이것저것 방편이 생긴 건 의심의 여지가 없다.

상업영화 제작환경이 ‘충무로’로 상징되는 서울 중심으로 굳어진 지 오래고, 아무리 영화진흥위원회가 부산으로 내려오는 등 상징적인 조치를 취해도 기울어진 운동장이 바로잡힐 기미는 요원하다. 그런 상황에서 지역을 지키며 영화를 만드는 이들은 자연히 독립영화인으로 본인이 원하건 원치 않건 규정될 운명이다. 이 숙명을 거스르고 지역에서 영화산업을 활성화하겠다고 천명하면 괜히 사기 아닌지 불신하게 될 지경이다. 안되는 건 노력해도 안 된다는 숙명론인 셈이다. 그런 가운데 지역 영화정책은 자연스럽게 독립영화 지원과 육성 외엔 다른 수가 없게 마련이다. 이는 역설적으로 특정 지역의 독립영화 제작이 ‘지역성’과 묶이는 상황을 빚어내는 현황으로 수렴되기도 한다.

여기에서 기묘한 모순이 발생한다. 지역 내에서 영화창작 지원을 꾀할 때는 ‘로컬영화’라는 구호를 빼놓을 수 없다. 지역의 고유한 문화와 사회를 담아내는 것은 물론 외부로 유출될 청년 인재를 지역사회에 유지하는 역할로 지역영화 지원정책을 설명하는 건 전국 어딜 가나 공통된 논리이다. 하지만 예산과 정책을 결정하는 공무원과 유력자들을 찾아다니며 애쓰는 실무가들의 노고와는 별개로, 정작 그 주역이라 할 신진 창작자들이 자기 ‘동네’에 과연 뿌리를 내리고 뼈를 묻고 싶은지 물어본다면 썩 반응이 좋지 못한 편이다. 태어나고 자라서 활동하는 곳이 익숙한 ‘지역’일 뿐, 더 나은 조건이나 계기가 있다면 기꺼이 이전을 고려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개인의 선택을 뭐라 할 수도 없다.

이는 영화뿐 아니라 현재 2030세대의 전반적인 정서이기 때문이다. 대구와 광주, 부산과 전주의 청년 영화인들은 각자의 지역색보다 청년세대라는 정서와 배경이 그들의 삶에서 더 결정적 조건임을 깨달은 지 오래다. 그런 상황적 조건은 이들이 세상에 선보이는 작업 결과물을 통해 드러난다. 지역에서 만들어진 영화라 해서 지역의 개성을 전제하고 드러내기보다는 세대 특성이 묻어나는 부분이 압도적이 되어간다. 야속할 순 있지만 굳이 원치도 않은 동네방위대 노릇을 강요할 수도 없다. 김현진 감독이 선보여온 일련의 작업은 그런 추세의 한 기준점으로 흥미로운 관찰대상이 되어준다.

◆ 다른 듯 같은 모양, 감독의 필모그래피

<복날> 2020.

▲영화 <복날> 스틸 사진

최근에 직장을 그만둔 ‘무영’은 고용노동청에서 실업급여 상담 후 지하철 정거장에서 오랜만에 친구 ‘준희’를 만난다. 마침 복날이라 둘은 삼계탕을 먹으러 간다. 하지만 곤란한 일이 무영에게 거듭 닥친다. 불안정한 미래를 대비하는 부적과 같았던 다이어리를 잃어버린 것이다. 다행히 준희의 은근한 조력이 이어지며 복날의 사건ㆍ사고는 적당히 수습된다. 무영은 순응하는 삶을 쭉 살아오다 과감히 일탈을 감행했다. 하지만 주위에 자신 있게 이야기하지도, 새 출발선에 서지도 못하는 중이다. 애써 괜찮은 척하지만, 자꾸만 구멍이 터지고 무심코 꺼냈던 사소한 거짓말은 그를 더 곤혹스럽게 몰아간다. 하지만 이미 한번 저지른 무영은 서서히 ‘회복탄력성’을 발휘하기 시작한다. 준희는 친구를 염려해 선의의 거짓말을 하고, 무영이 회복되는 과정을 조력한다.

특이하게도 영화는 서울에서 상당 부분 촬영 과정이 이뤄졌다. 굳이 자신이 거주하는 동네를 배경으로 삼아야 한다는 법도 없고, 감독도 굳이 그런데 얽매이고 싶지 않은 눈치다. 사실 영화 속 주인공의 상황을 감안해 본다면, 주변에서 원하는 방향대로 특별한 의문 없이 열심히 살아왔던 무영의 현재 자리가 수도권이 되는 게 더 그럴싸해 보이기도 한다. 특히 극 중 주인공의 상태를 암시하는 장치로서 가파른 주택가의 수직계단을 오르내리는 장면은 역시 서울의 다닥다닥 산동네가 더 적절하다는 느낌이다.

▲영화 <복날> 스틸 사진

영화는 젊은 또래 세대 삶의 태도와 하고 싶은 걸 하고 살아야 한다는 행동강령을 급하지 않게 느릿느릿 ‘일상물’ 방식으로 풀어낸다. 그런 스타일 덕분에 잔잔한 힐링과 함께 밋밋하게 느낄 이들도 꽤 나올법한 이야기 구조를 취한다. 이 영화 속엔 악인의 괴롭힘이나 극단적 사건 같은 자극적인 요소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인생에서 어쩌면 분기점이 될 선택을 결행한 후 낯선 상황에 직면한 주인공이 하루 동안 겪는 소소한 시련으로 가득하다. 그리고 난국을 풀어가는 과정을 통해 성장 또는 치유의 문법을 선보이는 정석적 구조를 숨기지 않는 결과물이다.

<배웅> 2021.

‘준영’은 코로나19로 거의 개점휴업 상태인 대구의 한 게스트하우스 스태프로 머무는 중이다. 원래는 준영 외에 또 다른 스탭 ‘서인’이 함께 했지만, 그는 얼마 전 말없이 사라져 버렸다. 하지만 준영은 그런 서인을 하염없이 기다리는 중이다. 둘은 다시 만나지만 그것은 재회라기보단 이별 직전의 짧은 배웅에 가깝다.

이야기 진행은 논리적 서사로 풀이하기엔 불친절한 편이다. 세상 모든 일이 딱딱 아귀가 맞아떨어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라면 답답해할 정도로 영화는 준영과 서인이 머물던 인적 없는 게스트하우스의 실내, 아니 ‘미로’로 관객을 끌어들인다. 우리는 각자의 밀실에서 코로나 시절 몇 년을 견뎌왔지만, 다른 이들이 그 시간을 어떻게 버티거나 혹은 무너졌는가에 대해선 상상에 맡기거나 외면하곤 한다. 하지만 <배웅>에서는 원래 가장 고립과는 거리가 멀던 만남의 공간, 게스트하우스 인적이 끊어진 상황을 통해 북적대던 여행자들이 사라진 그 공간의 숨 막히는 적막과 고독의 감정이 영화 속을 가득 채운다. 그 공간의 ‘지박령’인 것처럼, 준영은 서인을 기다리지만 돌아온 서인은 어쩌면 다시는 못 볼지 모르는 작별을 전달한다.

▲영화 <배웅> 스틸 사진

영화 속 대부분의 유의미한 장면은 게스트하우스 내부에서 진행된다. 하기에 작품은 사실상 고도로 압축된 실내극 구조를 취하듯 느껴지기도 한다. 다국적 손님들이 오가는 게스트하우스 특성상 이국적 소품과 지도 같은 배경이 인적 끊긴 상황과 맞물려 이질감을 한층 더 배가시킨다. 세계지도와 각국 국기 문양으로 꾸며진 방들을 정리하고 청소하는 스태프 준영의 건조한 일상은 해당 공간의 성격을 만남의 광장에서 유배지의 풍경처럼 바꿔놓는데 어색함이 없다.

마침내 돌아온 서인과의 하룻밤. 둘은 젠가를 하다가 함께 라면을 먹고 맥주를 마신다. 둘이 신경을 집중하는 젠가는 과연 쌓아 올리기 위한 것일까 붕괴의 찰나를 위한 걸까? 그들의 머릿속이 괜히 궁금하다. 둘은 서로 다른 그림을 젠가, 그리고 함께 있는 찰나에 투영하는 듯 보인다. 이별주의 배경으로는 너무나 볼품없는 라면 냄비 풍경은 코로나가 아니라도 준영과 서인이 처한 상황이 안정되지도 지속하기도 힘들게 된 팍팍한 것이었음을 은유하는 듯하다. 텅 빈 게스트하우스의 황량함이 더욱 배가된다. 침묵의 밤이 지나고 결국 ‘배웅’의 시간이 다가온다. 어쩌면 그들은 다시 만나지 못할 이별을 맞고 있는지도 모른다.

영화는 코로나19 치하의 게스트하우스가 처한 상황을 극화했지만, 굳이 팬데믹 시절이 아니라도 한곳에 뿌리내리지 못한 채 부유하는 청춘의 감성을 진하게 담아내려 한다. 정서적 접근에 주력하다 보니 하나하나 원인과 결과를 찬찬히 논증하기보단 결과만을 보여주고 그렇게 향하는 과정은 관객 상상에 상당 부분 맡긴 편이다. 그래서 집중력을 발휘하기 힘든 조건에서 본작을 만나면 궁합이 썩 좋지 못하다. 물론 모든 관객이 목욕재계하고 영화를 대할 순 없는 노릇이니, <배웅>이 전하려는 진한 상실과 이별의 정서를 온전히 만나게 될 이는 그리 많지 않을 테지만, 적어도 만든 이가 함께 나누고픈 깊은 슬픔의 정한은 크게 어긋남 없이 전달되는 편이다.

<고요 한가운데> 2022.

살아가면서 특정한 ‘죽음’을 접하는 시기가 있다. 육친의 죽음을 경험하는 건 대개 세대별로 특정 연령대를 거치게 된다. 대개 빠르면 10대에서 20대 사이에 조부모의 죽음을 맞이하는 게 가까운 일가친척 중 최초의 경험이 되곤 한다. 아직 죽음이 낯선 데다 함께 살았던 경우와 따로 살았던 경우의 느낌은 무척 다르게 마련이다. 함께 살았던 경우 맞벌이 가정이 늘어나고 조부모에 의해 돌봄을 받았다면 그 충격과 슬픔은 상당히 가팔라진다. 그러나 어쩌다 명절에나 볼 경우였다고 하면 그 질감은 순식간에 멀찍이 이격될 테다.

‘선우’는 상복을 입고 유가족의 일원으로 빈소를 지키고 있다. 할머니가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상주는 큰아버지 가족이고 선우는 작은집을 대표해 참석해 있다. 딱히 큰아버지 식구들이 선우를 차별하거나 박대하지는 않지만, 그는 이 자리가 편치 않다. 상가를 방문한 일가친척과 이웃들을 대하기가 거북스럽다. 여기엔 이유가 있다. 선우의 아버지, 즉 고인의 둘째 아들은 생존해 있지만 빈소에 오지 않았다. 모두가 그의 부재를 이상하게 여기거나 불편해한다. 어디 해외에 나가 있더라도 급거 귀국해서 모친의 마지막 길을 모셔야 인간의 도리를 다하는 법일 텐데, 대체 왜 나타나지 않느냐는 무언의 질시, 그리고 공개적인 힐책이 선우의 주변을 포위하듯 밀려든다.

큰아버지도 곤혹스럽다. 질문은 상주를 맡고 있는 그에게도 어김없이 쏟아지기 때문이다. 동생이 받아야 할 비난을 형과 조카가 나눠 맡고 있는 셈이다. 그래서 서운한 속내를 드러내지 않고 싶지만 어쩔 수 없이 배어나는 중이다. 아직 청소년인 선우는 그런 공기에 민감할 수밖에 없다. 사정이 물론 있겠지만 시골 어르신들에게 굳이 꺼내 봐야 본전도 못 찾을 거란 생각에 슬금슬금 자리를 피할 뿐이다. 하지만 결국 임계점이 다가온다. 꼬치꼬치 캐묻는 집안 어른들의 못마땅한 표정과 시선은 끝내 선우가 묻어뒀던 이유를 폭로하게 만든다. 아빠 대신으로 고역을 감수하려던 각오도 부질없다. 장례식장을 뛰쳐나갔던 선우는 하지만 끝내 다시 발걸음을 돌린다. 타협이라기보다는 가족의 사정을 헤아리고 올 수 없는 아빠를 대신해 가족의 도리를 다하기 위해서다. 마침내 며칠간의 고행이 끝나간다. 발인하는 현장 한구석엔 그런 선우의 수고를 위로하듯 어떤 기이한 광경이 펼쳐진다.

영화는 절박한 사정 때문에 시련을 겪고 있지만, 그런 가족의 사정을 외면당한 채 남들처럼 한몫해주기를 압박하는 몰인정한 사회적 기준에 대한 설움과 함께 그런 부당함을 감당해야 하는 청소년 주인공의 수난을 그려낸다. 하지만 특이점이라면 대개 이런 소재를 설정할 때 취하는 중심축인 ‘가족’의 화해나 혹은 붕괴가 <고요 한가운데>에선 별 비중이 없다는 점이다. 큰집을 비롯해 얼굴도 잘 알아보기 힘든 대가족의 중력장은 아빠의 사정 때문에 딱히 교류가 드물던 선우에겐 별로 영향력이 없었던 참이라 급작스럽게 그가 감당해야 할 적응 준비도 되어 있지 못하다. 그 때문에 바늘방석에 앉은 것처럼 고생하는 그가 의지하는 건 역설적으로 자신이 피부로 겪어온 ‘소가족’ 간의 이해와 배려다.

▲영화 <고요 한가운데> 스틸 사진

대개 아빠를 중심으로 엄마가 보조하고 아들이 아빠의 대를 이어가던 가부장제 권위는 선우의 가족에선 존재하지 않는다. 아빠는 남들에겐 인정받기 힘든 사정으로 제구실을 못한 지 오래이고, 엄마는 아빠의 뒷바라지에 다른 건 신경 쓸 겨를이 없다. 그런 가운데 아빠 몫을 치를 결의를 다지고 상가를 지키지만, 선우의 속마음은 털어놓을 수도, 이해받기를 기대하기도 어렵다. 물려받은 전통과 예식이 그렇게 중요한 것인지, 실제로 고통당하는 이들의 사정보다 상위에 있는 존재인지 선우는 꾹꾹 참던 분노를 터트리지만, 자신이 이곳에 오게 된 배경을 떠올리며 입술을 깨문다. 그렇게 이해받기를 포기한 채 참고 견디는 주인공의 초상은 온전히 이해받지 못하는 청년세대의 심리상태와 닮았다. 시점과 초점의 미세한 변주를 통해 영화는 독특한 맥락과 심상을 조성한다. 결말의 초현실적 장면은 감독이 정말로 소중하게 생각하는 게 무엇인지 전하는 도구로 잔상을 새긴다.

◆ 2030세대의 소망과 상처를 투영하는 거울로서의 영화

3편의 영화는 각각 상이한 설정을 취한다. 하지만 주요 등장인물들은 공통적으로 기성세대와 사회에서 권장하는 삶의 방향을 적극적이건 소극적이건 따르지 않으면서 주위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들이란 공통분모를 지닌다. <복날>의 ‘무영’은 주변의 기대에 부응하고자 ‘열공’해 서울에서 번듯한 직장생활을 하던 중 모종의 깨달음과 함께 잘 다니던 회사를 그만둔다. <배웅>에서 ‘준영’은 정규직 같은 안정된 직장에 도전하지 않고 부유하듯 게스트하우스 관리자로 머문다. <고요 한가운데>의 ‘선우’는 아직 성인이 되지 않은, 일정 시간을 유예받긴 했지만, 그가 영화 속에서 처한 상황은 고립무원 그 자체로 손색이 없다.

영화의 전반적 기조는 주인공 주위에 그를 이해해 주거나 위로해 줄 ‘친밀한 타인’이 존재하는가 여부로 결정된다. ‘무영’에겐 ‘준희’가 있다. 그의 조력과 수고 덕분에 무영은 어쩌면 재수 오진 날로 기억될 뻔한 불안한 하루를 무사히 마무리하고 새로운 도전을 준비할 마음의 안정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래서 <복날>은 감독의 작업들 중에서도 가장 해피엔딩에 가까운 결말로 기억된다. 반면에 후속작인 <배웅>은 코로나19로 인한 고립감이 더해지는 바람에 물리적으로 타인과 접촉이 불가능해진 상황을 반영해 고독감을 극대화한다. 그런 고립에 지쳐서일까, <고요 한가운데>에서 끝내 버틸 수밖에 없었던 ‘선우’가 간절히 원했을 테지만 끝내 허용되지 않았던 위로는 초현실적 장치로 대체된다.

3편의 연이어진 작업에서 등장인물의 연령대는 점점 낮아진다. 이것이 어디까지 의도한 것인지 알 길은 없지만, 제작진이 일상에서 피부로 느끼는 감정과 비전에 근접하던 게 점점 추상화되고 개별적인 위로와 치유를 희구하는 방향으로 흘러간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영화 속 배경은 점점 ‘대구ㆍ경북’ 지역으로 근접성을 띠지만, 딱히 그런 로컬의 그림자가 감독의 영화를 설명하는 데 크게 작용하진 않는다. 기성세대와 주류사회 시스템 속에서 자리를 잡지 못한 채,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며 무엇 하나 속 시원하게 질러볼 기회를 얻지 못한 세대의 일원으로서 구체적인 사회적 쟁점에 문제제기보다는 개인이 끄집어내지 못하는 속사정을 풀어내는데 감독의 초점은 명백히 기울어진다.

감독의 작업에서 짙게 묻어나는 정서 때문에, 영화가 그저 비슷비슷한 동 세대 특징을 공유할 뿐, 작품 자체로는 뚜렷한 개성을 선보이지는 못한다고 볼 수 있다. ‘영화’적 평가에선 그리 어긋나지 않는 분류일 테다. 하지만 ‘요즘 세대’가 진정으로 바라는 지점이 어떤 부분인지, 혹은 그들을 이해하고 소통하기 위해 염두에 둬야 할 결이 어떤 것인지 이해하고자 한다면, 이 감독의 영화가 전하는 풍경은 관찰 또는 경청할 별개의 가치를 획득할 수 있다. 그리고 아마 감독은 꾸준히 자신이 표현하고자 하는 자아를 이미지로 담을 궁리를 이어갈 테다. 모두가 널리 명성을 떨치고 금의환향하면 좋겠지만, 김현진 감독이 꾸준히 영화작업을 이어가며 지역에서 살아간다면 그 자체가 지역의 영화지원정책 성과를 확인하는 척도가 되어줄 수 있지 않을까.

<작품정보>

복날 Our Summer
2020│한국│드라마│30분
감독/각본 김현진
출연 박수연, 김우겸
배급 호우주의보

2020 21회 대구단편영화제 피칭포럼 대상
2022 19회 청주국제단편영화제 사회드라마부문 경쟁

배웅 The Farewell
2021│한국│드라마│20분
감독/각본/편집 김현진
출연 오은재, 김송은

2020 대구영화학교 2기 수료작

고요 한가운데 The Dead Hours
2022│한국│드라마│19분
감독/각본 김현진
출연 소정민. 박일룡, 이융희, 권도형, 이송희, 성석배, 이미정

2023 24회 대구단편영화제 애플시네마 경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