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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서울의 봄>이 흥행을 일으키며 또다시 한국 현대 정치사에 대한 대중적 관심이 고조되고 있다. 이 상황에서 한국인들이 역대 대통령의 공과에 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가늠할 수 있는 여론조사 결과가 나왔다.
한국갤럽은 지난 11월 28일~30일 역대 대통령의 개별 공과를 평가하는 여론조사를 실시했다. 한국갤럽은 이 조사를 2012년, 2015년, 2021년에도 실시한 바 있다. 이번에는 윤보선, 최규하 전 대통령과 현역인 윤석열 대통령을 제외한 역대 대통령 10인을 두고 ‘잘한 일이 많은가/못한 일이 많은가’를 물었다(전국 만 18세 이상 1009명을 상대로 무선전화 면접으로 실시되었으며 응답률은12.4%고 표본오차는 95% 신뢰수준에 ±3.1%포인트다. 자세한 사항은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 참조).
전국에서 가장 긍정평가 받은 대통령은 노무현과 김대중
가장 긍정평가가 높았던 것은 노무현, 김대중 전 대통령(이하 ‘전 대통령’ 호칭 생략)으로, 노무현은 긍정 평가 70% 대 부정 평가 15%였고 김대중은 68 대 14을 기록했다. 박정희는 61대 25였고 2012년에 비해 긍정평가율이 9%포인트 줄었다. 김영삼은 40 대 30이었는데 2015년 조사에서 16%에 불과했던 긍정평가율이 2021년 조사에서 41%로 대폭 상승했고 이번에도 거의 같은 수준으로 나타났다.
긍정평가율과 부정평가율이 가장 비슷하게 나타난 전직 대통령은 직전 대통령인 문재인으로 긍정 38 대 46이었다. 이승만과 이명박은 각각 30 대 40, 32 대 54가 나왔다. 이명박의 긍정평가율은 2015년 12%에 비해 20%포인트나 올랐다. 2015년 긍정평가율이 9%에 불과했던 노태우도 이번에는 21 대 49를 기록했다. 이번에 문재인과 함께 처음 포함된 박근혜는 21 대 66이었다. 그리고 꼴찌는 18 대 71이 나온 전두환이었다.
요컨대 노무현, 김대중, 박정희는 초당적인 지지를 받고, 이 뒤를 최근 긍정적 재평가가 늘어난 김영삼이 따르고 있다. 반면 군사반란과 비자금 조성 문제로 역대 대통령 최초로 형사 처벌받았던 전두환, 노태우와 역대 대통령 중 유일하게 파면당한 박근혜는 하위권 3총사를 형성하고 있다. 그리고 이승만, 이명박과 문재인은 각각 국민의힘 지지층과 민주당 지지층에게서만 주로 지지를 받으며 한국 정치의 진영 대결을 벗어나지 못한 상태다.
그렇다면 이번 조사의 대구경북 응답자 98명은 어떻게 답했을까? 가장 긍정평가가 높은 대통령은 긍정평가 상위권이자 경북 출생으로 대구에서 대학을 다닌 박정희였다. 박정희는 전지역에서 긍정이 부정을 웃돌았고 광주/전라에서도 46 대 35를 기록했는데, 대구경북의 긍정평가율은 무려 74%였고 부정평가는 16%에 그쳤다.
박정희에 대한 긍정평가는 국민의힘 지지층이나 노년층에 국한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다만 전국적으로 박정희 긍정평가가 2012년에 비해 낮았고 연령대가 낮아질수록 긍정평가도 낮아지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대구경북에서도 앞으로 긍정평가가 더 오르지 않을 공산이 있다.
생전 대구경북에서 고전했던 노무현, 김대중, 김영삼
사후 지역에서도 높이 평가받아
박정희 다음으로 대구경북에서 긍정평가를 많이 받은 대통령은 국민의힘 계열 전직 대통령이 아니라 노무현, 김대중이었다. 이 두 전직 대통령은 전지역에서 긍정평가가 더 높았다. 대구경북에서 비교적 긍정평가를 낮게 받기는 했지만 노무현은 63 대 19, 김대중은 57 대 18을 기록했다. 참고로 노무현이 고향인 부산/울산/경남에서 받은 평가는 68 대 20으로 대구경북과 큰 차이가 나지 않았다.
생전 정치하는 동안 대구경북에서 고전을 면치 못했던 김대중, 노무현의 ‘역사적’ 선전은 곱씹어볼 대목이 많다. 대구경북이 유독 박정희만 높게 평가한다면 개발독재 지지가 높은 지역이라는 단정에 힘이 실린다. 하지만 김대중과 노무현까지 높게 평가받고 있는 것은 박정희시대 산업화와 김대중-노무현시대 민주화, 후기 산업화가 하나로 연결되어 긍정적으로 기억되고 있다는 뜻이다.
실제로 지역사회를 다녀보면 “박정희와 김대중(또는 노무현) 두 대통령만은 높이 평가받아 마땅하다”고 말하는 주민들이 흔하기도 하다. 이것은 “윈-윈하면서 원만하게 역사적 평가를 하자”는 심리의 발로로도 읽을 수 있다. 나아가 최근 정치권에서 벌어지는 역사 전쟁에 지칠 만한 사람이 많을 것이라고 헤아려볼 수 있다.
한편 김영삼도 35 대 27로 대구경북에서 호평을 받았다. 김영삼의 고향인 부산/울산/경남에서 42 대 32가 나온 것과 별 차이가 없었다. 이 또한 특이한 현상이다. 김영삼은 재임 초반부터 이미 대구경북에서 민심 이반을 겪었다. 김영삼 정부 초기의 개혁 조치들은 전국적인 열광을 이끌어냈지만 대구경북에서는 “우리 지역 대표 정치인들이 정치 보복을 당하고 있다”는 불만이 터져 나왔다. 마침 산업적으로도 위기가 찾아오던 시기가 그때였고, 위천공단 문제까지 불거지며 지역 민심은 극도로 악화되었다. 집권당은 1995년 대구시장 선거에서 패한 데 이어 1996년 총선에서도 대구에서 제1당 지위를 자유민주연합에 내주게 된다.
그럼에도 김영삼이 높게 평가받은 것은 그가 민주화 대통령이라는 데는 많은 사람들이 분명히 동의한 결과일 것이다. IMF 사태를 기점으로 대중의 혹독한 비난을 받기는 했지만 사반세기의 세월동안 사람들의 감정도 크게 누그러진 것으로 보인다. 또 김영삼은 국민의힘 계열 대통령 중 유일하게 사법적 처벌을 받지 않은 대통령이다. 한때 그는 노태우와 함께 국민의힘 지지층이 가장 부끄러워 했던 대통령이었지만 이제는 가장 자신있게 내세울 수 있는 지도자가 되었다.
타지와 달리 이승만, 이명박, 박근혜 긍정평가 더 높지만
전두환, 노태우는 연고지인 대구경북에서도 부정 평가 우세
또 한편 대구경북에서는 여느 지역에서 부정적으로 평가받는 몇몇 대통령에 대해서 부정평가보다 긍정평가가 더 높은 현상도 나타났다. 이승만은 긍정 41 대 24를 기록했다. 38 대 32가 나온 부산/울산/경남을 더 포함해, 영남 지역에서만 긍정평가가 더 높았다. 이는 영남 주민들이 동향 출신 대통령들에게 우호적인 수준을 넘어서서 이념 성향이나 역사 인식이 보수쪽으로 확연히 기울었음을 의미한다.
부산/울산/경남에서도 부정평가가 더 높은 이명박에 대해서도 대구경북에서는 긍정 52 대 부정 33이 나타났다. 재임 중반에 수도권 규제완화와 친박 세력과의 갈등, 4대강 논란으로 대구경북 민심 이반을 겪었던 그에 대해 지역민 평가가 호전된 것은 국민의힘 지지층 내지 보수층이 결집한 결과라고 풀이될 수 있다. 후임자 덕도 있다. ‘박근혜, 문재인과는 달리 유능했다’는 평가도 있고, 이 평가의 선두에 2030 남성이 서 있기도 하다. 4대강 논란이 아직도 가닥을 잡지 못하는 것도 이명박 부정평가 확산을 저지한 측면이 있을 것이다.
지역민의 박근혜 평가는 긍정 45 대 부정 37이었다. 부산/울산/경남에서도 26 대 59가 나오는 등 타지에서는 부정이 긍정을 압도했다. 박정희의 딸이면서 대구에 지역구를 둔 그에 대해 동정 여론이 상당히 작용한 결과로 보인다. 하지만 긍정평가가 부정평가를 제압할 정도는 아니고 이명박보다 7%포인트나 낮은 것도 놓칠 수 없는 대목이다. 박근혜 동정 여론은 국민의힘 지지층에 국한되어 있으며 박정희와 박근혜가 분리되는 현상이 대구경북에도 있다고 볼 수 있다.
김대중-노무현과 문재인이 분리되는 현상도 뚜렷하다. 전국적으로도 그렇고 대구경북은 더더욱 그렇다. 문재인은 긍정 23 대 부정 58을 기록했다. 역대 대통령 중 가장 낮은 평가를 받은 것이다. 긍정평가율은 지난 2022년 대선에서 민주당 후보가 지역에서 득표한 수준과 비슷하다. 노무현, 김대중, 박정희, 김영삼과 달리 이명박, 박근혜, 문재인은 정당 대결 구도에 갇혀 있는 것이다.
그런데 전두환, 노태우는 진영에 의지하는 것조차 만만치 않다. 초당적으로 저평가받고 있고 대구경북에서도 마찬가지임이 드러났다. 대구 태생인 노태우는 긍정 27 대 부정 36을 기록했다. 노태우가 그나마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은 지역 응답자 37% 덕분에 압도적 부정평가를 면했다면, 전두환은 37 대 54를 기록해 긍정보다 부정이 확연히 높았다. 1995년 그가 구속될 때 대구경북 여론에서 강한 반발이 나타났던 것과는 대조적이다.
1995년 ‘골목 성명’ 전두환, 이제 막다른 골목에
대구경북에서 전두환 부정평가가 높은 것은 그동안의 시대 변화가 다른 지역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결과로 보인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를 높게 평가한 시민들의 비중은 자연적으로도 줄 수밖에 없었다. 전두환이 감옥에 머문 기간은 2년 반도 안 되지만 5.18이나 12.12-5.17에 대한 조명은 꾸준히 이뤄졌다. 출판물, 영화, 만화를 통해 신군부의 죄악을 상기시켰던 문화예술인들의 공로도 크다.
보수층 입장에서도 박정희라면 몰라도 전두환을 ‘못 잃어’할 필요성도 작았을 것이다.1960년대 초에 집권해 1980년이 밝기 전에 세상을 떠난 박정희에게는 ‘그때는 어쩔 수 없이 독재를 한 측면이 있다‘는 변호라도 있었지만 전두환에 대해서만큼은 ’용서할 수 없다’는 풍조가 강했다.
이로써 전두환은 고향과 그 부근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민주 한국의 타자(남)’가 되었다. 전두환이 검찰 수사를 거부하며 서울 연희동 자택 앞에서 이른바 ‘골목 성명’을 발표하고 고향 경남 합천으로 도주해버린 것이 1995년 12월 2일. 28년동안 그는 막다른 골목으로 몰려왔다.
김수민 객원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