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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뉴스민은 ‘대구 아트 시사저널 표출지대’와 전재 계약을 맺고, 온라인으로 글을 게재합니다. 원본은 표출지대를 통해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가장 뼈아픈 장소를 이야기할 때 대개 아우슈비츠를 떠올린다. 1940년 독일 제3제국 최대 규모의 강제 수용소였던 이곳을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는 이유는 국가가 자신들의 치부임에도 계속 수면 위로 끌어올려 참회하는 태도를 보이기 때문이다. 국가에게는 부끄러운 일일지라도 역사는 기억할 때 그 의미가 선명해진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역사를 제대로 바라보는 것의 중요성을 알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오히려 부당한 역사 속의 뼈아픈 희생과 고통을 엄폐하려는 태도를 취한다. 그것이 많은 사람들이 기억해야 할만한, 자국민이 주도한 민주 항쟁의 자랑스러운 뿌리 역사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여태까지 10월 항쟁은 잊혀지고, 곡해되어 왔다. 오랫동안 ‘좌익 주도의 폭동’이라는 시각 때문에 정부 차원의 진상 규명 시도 또한 없었다. 그러나 10월 항쟁은 민중이 좌익 단체의 선동에 이끌려 진행된 것이 아니며 미군정 반대 폭동도 아니었다. 당시 배곯는 국민, 특히 여성과 어린이, 스님과 학생에 의한 ‘쌀을 달라’는 대중 시위이자 대중 투쟁이었고 국가폭력에 의한 민간인 희생사건이었다.
하지만 위와 같은 오해로 대구 10월 항쟁은 그동안 ‘10.1 사건’, ‘10월 폭동’, ‘10.1 소요’ 등과 같이 불리며 제대로 된 명칭조차 부여받지 못했다. 10월 항쟁은 이후 경북 등으로 퍼져나가 전국적인 항쟁이 일어나는 데 영향을 미친 해방정국 최대의 사건이므로 충분한 주목과 연구가 필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가의 이데올로기에 휩쓸려 이리저리 명칭이 뒤바뀌었다. 그러나 유족들의 부단한 노력 끝에 2009년 해당 사건을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로부터 좌익 주도의 폭동이 아니라는 진실 규명 결정을 받았다.
이때 결성된 10월 항쟁유족회가 가장 많은 희생자가 발생한 달성군 가창면(당시 가창골)에 ‘10월 항쟁 등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자 위령탑’을 건립하고 매년 합동위령제를 지내기 시작했다.
지난 10월 6일 열린 77주기 합동위령제는 해당 위령탑이 위치한 용계체육공원에서 진행되었다. 같은 날 19시에는 동성로 한일극장 앞 특설무대에서 진실규명, 명예 회복 및 정신 계승을 위한 대구경북시도민대회가 열리기도 했다. 그 외에도 문학제와 사진전, 기억길 걷기 등 다양한 행사를 통해 10월 항쟁을 알렸다. 그러나 10월 항쟁은 이런 노력이 있음에도 7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세상에 제대로 알려지지 못하고 있다.
그 이유 중 하나로 대구시의 지지부진한 태도가 있다. 대구시는 위령탑의 제막식조차 3년째에 이르도록 미루고 있으며 부분적으로 지원해 주던 예산마저 30퍼센트 가량 삭감하는 등의 지금 세대와 과거, 미래의 세대에게도 꼭 필요한 역사적 진실을 감추고 축소하려는 행보를 보인다. 과거를 바로잡고 기억하는 것을 민간의 영역에만 기대어서는 안 된다. 하물며 역사를 기억하는데 예산을 줄이고 잘못된 과거를 반성하지 않는 모습은 더욱더 국가가 지녀야 할 모습이 아닐 것이다.
피해자와 유족들은 기억 속에서 존재를 인정받는다. 그러나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유족들은 10월 이야기만 나오면 덜컥 겁을 내며 ‘좌익’ ‘빨갱이’로 몰릴까 이야기를 삼가고 쉬쉬했다고 한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국가의 ‘빨갱이 혐오’ 심리 주입에 따라 10월 항쟁에 대한 인식과 태도가 판이하게 갈리었기 때문이다. 시위와 항쟁, 자유를 위한 투쟁은 ‘좌익’의 것이 아니다. ‘빨갱이’ ‘좌빨’의 프레임을 만들어 시위 자체의 인식을 폄하시키고, 계엄령과 군을 동원해 무력 살상 진압을 하며 공포심을 조장한 국가는 시위, 항쟁, 투쟁을 아주 특수하고 지극히 극단적인 일로 만들어 버렸다. 항쟁과 같은 사건에 대한 제대로 된 역사 연구와 인식개선이 꾸준히 이어져야 하는 이유이다.
이는 역사 인식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며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실과도 크게 동떨어져 있지 않다.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5월 2일 “가짜 평화 아닌 압도적 힘에 의한 평화”로 “튼튼한 안보를 구축할 것”이라 했다. 그러나 과연 그 ‘평화’ 속에 선별된 국민만 있다면 진정한 평화라 할 수 있을까? 마치 자신의 말을 지키는 듯 지난 5월 31일 집회와 시위를 향한 무장경찰과 캡사이신 및 살수차를 사용한 폭력적인 탄압이 6년 만에 다시금 돌아왔다.
또한 지난 9월 26일에는 탱크와 무장 군인들이 시청광장을 활보했다. 국군의 날 행사로 탱크, 장갑차, 군인들이 거리에 나온 것이다. 무려 100억 원의 예산을 소모해 진행된 군사 행진을 본 한 시민은 지켜지고 있다는 감각은커녕 ‘계엄령이 선포된 줄 알았다’라며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시민들의 생활반경으로 서슴없이 들어오는 무장경찰과 군인은 마치 사라지지 않은 과거의 잔재를 엿본듯하다.
각종 비리와 국민의 생존을 위협하는 정치행태 앞에서 가만히 있지 않고 일어나 할 말을 하는 것은 국민의 기본권이자 의무를 다하는 행동이다. 그런 국민을 향해 무력을 사용해 진압하는 것은 국가권력을 시민이 아닌 일부 권력가 혹은 일부 권력을 가진 시민을 위해 휘두르는 꼴이다.
차우미 10월 항쟁유족회 이사는 “우리 사회가 10월 항쟁의 역사적 진실을 마주하는 것은 유가족들의 고통을 나의 고통처럼 마주하는 것이며 그것은 바로 나와 내 후손이 살아갈 이 땅의 민주주의와 보다 성숙한 우리의 미래를 마주하는 것”이라는 뜻을 밝혔다. 유가족들은 자꾸만 휘발되는 기억을 붙잡기 위해 위령제를 지내고, 탑을 세우며 제대로 된 역사를 연구하고, 입에서 입으로 사건을 옮긴다.
이들이 서로 이야기 나누며 기억을 공유하고 그것을 기록하는 행위는 얇은 실을 애써 붙잡고 역사를 잊지 않으려 하는 듯한 모습이다. 역사를 잊은 민족은 미래는 물론 현재도 제대로 살아갈 수 없다. 역사의 한 부분이 은폐된 채 곪아 간다면 결국 우리는 다시 그 역사의 고통을 대물림받고 말 것이다. 이 땅에서 물려줘야 할 것은 성숙한 역사의식을 가진 사회이며 그것이 진정한 민주주의로 가는 실마리가 될 것이다. 더 이상 부당한 역사 속에서 희생당한 유족만이 눈물 흘리고 그치는 것이 아닌 전 세대가 다 같이 공감하며 울어줄 수 있는, 무엇보다 국가가 책임지는 세상 속에서 우리는 살고 싶다.
글_표출지대 김지민, 최령은
pyochuler@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