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듯 같은 역사] 추석을 보내는 그들의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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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7년 음력 8월 12일, 예안에 사는 김택룡은 제수용 고기를 구하지 못해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추석이 이틀 앞으로 다가왔지만, 주위에 소 잡는 사람이 없었던 탓이었다. 다행히 같은 고을에 권전룡이 허가를 받아 소를 잡는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조카를 보내 고기를 구했다. 일단 한숨 돌리고 있는데, 종 천실이 와서 선조 무덤의 벌초를 마쳤다고 고했다. 조상의 묘의 벌초인지라 마땅히 산에 올라 감독해야 할 일이었지만, 70의 노구를 끌고 가봐야 방해만 될 일이었다. 천실의 평소 일하는 성실성을 믿기로 했다.

추석 이틀 전, 김택룡의 아들 김숙은 제 죽은 어머니와 그 아버지인 외조부 제사를 위해 요산으로 길을 떠났다. 아들 덕에 올해도 김택룡은 장인과 아내 제사에 참가하지 않아도 되었다. 종 논복이 김숙을 모시고 요산까지 갔다가 돌아와서는 제 부모 무덤 벌초를 하러 갔다. 추석은 추석인 모양이었다. 김택룡은 종 은종을 시켜 두부를 만드는 데 쓸 콩을 누님 집에 보냈다. 다음 날 누님이 함께 가동의 선조 산소에 함께 오르자고 해서, 그때 사용할 두부를 만들도록 청한 참이었다. 흐린 하늘이 걱정이었지만, 나이탓에 말을 듣지 않는 몸을 생각하면 가능할 때 한 번이라도 더 산소에 오를 참이었다.

추석 하루 전날, 김택룡의 논을 경작하는 능금이 어디서 구했는지 쇠고기를 선물로 보내왔다. 그리고 전날 소를 잡은 권전룡 역시 전날 판 고기와 별도로 고기를 좀 더 보내왔다. 안 그래도 제수용 고기밖에 마련하지 못해 아쉬운 터였는데, 추석을 핑계로 식구들이 쇠고기 맛이라도 볼 수 있게 되었다. 김택룡은 누님과 함께 산소에 오른 김에 추석 절제를 하루 당겨 지낼 생각이었지만, 비가 와서 결국 아들 김숙의 집 대청에서 신주를 모시고 절제를 지냈다. 제사를 파하고 생질 정득의 집에서 제사 음식을 가지고 음복하면서 여러 식구들과 오랜만에 늦은 밤을 함께 보냈다.

그러나 모든 추석이 이해 김택룡이 보낸 추석과 같을 수는 없다. 1596년 추석, 오희문은 비가 오는 날씨에도 불구하고 제물을 지고 조상들 산소에 올랐다. 비가 개기를 기다렸지만 결국 개질 않아, 돗자리로 상석 위를 가리고 제물을 차렸다. 조부모님과 아버지, 그리고 죽전 숙부의 묘에 차례로 제물을 차리고 절을 올렸다. 조부모님 산소에서 첫 절을 올리던 오희문은 감격으로 몸을 일으키기 힘들었다. 4년 전 발발했던 임진왜란으로 온 가족이 흩어져 있는 데다, 전쟁으로 인해 산소를 찾기도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4년 만에 제대로 올리는 추석 성묘였다. 비로 인해 도포가 젖어 몸을 가누기 힘들었지만, 이렇게 조상들의 산소를 찾을 수 있는 상황만으로도 감사하기 이를 데 없었다. 오희문에게 1596년 추석은 특별하기 이를 데 없었다.

1741년 최흥원이 맞은 추석은 말 그대로 최악이었다. 고을의 돌림병으로 인해 추석날까지 피접생활을 하고 있던 탓에 사당문을 열 수도 없었고, 조상들에게 예를 갖추는 것도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휘영청 떠 오른 밝은 달을 보자, 최흥원은 몇 년 동안 겪은 집안의 크고 작은 일을 떠올렸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는 병을 얻으셨으니, 그 불효를 감당하기 힘들었다. 게다가 집안은 송사에 휘말렸고, 아내와 아들 용장까지 사망하는 아픔을 겪었다. 최흥원 자신도 몇 차례 병을 얻었다가 겨우 살았는데, 이렇게 다시 돌림병으로 피난 생활을 해야 하니, 스스로의 신세 역시 딱하기 이를 데 없었다. 어떤 일이 있었냐는 듯 떠 오른 보름달은 늘 같은 모습이지만, 최흥원은 가족들에 대한 그리움으로 눈물을 훔쳐야 했다. 그렇게 또 한 해의 추석이 지나가고 있었다.

1803년 추석, 한양에서 무관으로 근무하던 노상추는 성동일과 함께 영도교 근처에 있는 고암鼓巖 모퉁이에 자리를 잡았다. 당시 어린 순조가 추석을 맞아 태조 이성계의 능인 건원릉과 영조의 능인 원릉에 직접 제사 지내기로 했는데, 이를 위해 이동하는 행렬 자체가 장관이었기 때문이다. 수십 년 무관으로 근무하면서 왕의 행렬 호위를 한 적도 많았지만, 그래도 대가의 행렬을 구경하는 것은 또 다른 맛이었다. 한양 도성민들 입장에서 이는 추석맞이 대규모 이벤트 가운데 하나였다. 새벽에 대가가 떠나기 때문에 떠나는 행렬을 구경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았지만, 유시(오후 5시~7시)에 돌아오는 대가 행렬은 그야말로 인산인해였다. 동대문으로 불리는 흥인지문興仁之門은 대가 행렬을 구경하기 위한 사람들도 발디딜 틈이 없을 정도였다. 오죽하면 노상추가 보기에 도성의 백성들로 인해 도성이 동쪽으로 기운 듯했을까!

그러나 모든 추석이 이렇게 즐거운 것은 아니다. 1751년 당시 경상감사 조재호는 추석 다음날인 음력 8월 16일 안타까운 기록을 남겼다. 유학幼學 이정권의 아내 윤씨에 대한 기록이었다. 그녀는 그해 태어난 한 살배기 아들과 함께 대구 본가에 가던 중, 금호강에서 발을 헛디뎌 그 아들과 함께 사망했다. 추석을 맞아 본가를 방문하는 귀녕길이었는데, 끝내 친정으로 돌아가지 못한 불귀의 객이 되었다. 추석을 맞아 일어난 사고는 이뿐만이 아니었다. 같은 날 안동부에서는 22명이 탄 나룻배가 영호루에서 출발하여 강을 건너 언덕에 정박하다가 바위 모서리에 부딪혔다. 이로 인해 배는 그대로 뒤집혔고, 22명 모두가 익사하는 참극이 발생했다. 노비 8명을 포함하여, 약초꾼과 포수, 양반 등 많은 사람들이 신분과 직업의 귀천 없이 한배를 탄 운명을 맞았다. 사람들의 이동이 많아, 많은 사람을 태운 게 원인이었다.

2023년으로 연도만 바꾸면, 이들의 추석 역시 우리들의 추석과 다르지 않다. 오랜만에 가족들이 만나 조상 묘를 벌초하고 차례를 지내며, 함께 음식을 나누고 정경은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또 어떤 이의 추석은 떠오른 달을 보며 가족에 대한 그리움으로 눈물 흘리는 추석이기도 하며, 또 어떤 이의 추석은 새로운 구경거리와 흥겨움으로 맞는 추석이기도 하다. 많은 사람들의 이동으로 인한 사고 역시 또 다른 우리네 추석의 모습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이듬해 추석에는 또 많은 사람들이 움직인다. 원래 추석은 가家 중심의 공동체 문화가 남긴 유산이지만, 말 그대로 ‘핵개인화 시대(빅데이터 전문가인 송길영 박사의 표현)’인 현대 사회에도 추석은 그렇게 다양한 모습으로 현대인을 찾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