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백 앞에서 만나”가 만들어 온 기억

[인터뷰] ‘대구백화점을 둘러싼 지역민의 기억과 미래유산으로서의 의미’ 논문 쓴 유은정 씨
‘길 위의 다방’, ‘꿈의 백화점’ 그리고 ‘민주화 운동의 무대’
‘대구시민의 쇼핑은 대구백화점으로’
유통 대기업도 몰아내던 위세
백화점 쉬는 날이 상인들도 쉬는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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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백 앞에서 만나.”

오랜 시간 지역민 사이에 통용된 이 말은 어떤 힘을 가질까.

2021년 6월 폐점 후 건물과 땅을 매물로 내놓은 대구백화점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는 시각은 많지 않다. 오히려 ‘유통 대기업과 지역기업이 경쟁하는 게 무리’라는 경제 논리가 지배적이다. 대구백화점이 가진 역사‧문화적 가치에 주목하겠다는 행정기관의 의지도 찾아볼 수 없다.

눈길은 다른 곳에 쏠린다. 동대구역 복합환승센터와 연결된 신세계백화점은 초대형 규모를 자랑하며, 지난해 리뉴얼 오픈한 더현대대구는 문화‧예술 시설을 늘려 젊은 층을 줄 세우고 있다. 이들에겐 지역 경제를 견인한다는 칭찬이 쏟아진다. 투자도 변화도 멈춘 대구백화점이 문을 닫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순서다. (관련기사=[‘대백’ 폐점 1년] ② 뭐가 됐던 빨리···속 타는 상인들, 손 놓은 지자체 (‘22.08.12.))

▲유은정 씨와의 인터뷰는 9월 29일 오전 전화로 진행됐다. 유 씨는 올해 4월 ‘대구백화점을 둘러싼 지역민의 기억과 미래유산으로서의 의미’라는 제목의 논문을 발표했다. (사진=유은정 제공)

1996년생 연구자 유은정 씨는 영남대학교 문화인류학과 대학원에서 ‘대구백화점을 둘러싼 지역민의 기억과 미래유산으로서의 의미’(2023년 4월)를 주제로 석사학위 논문을 썼다. 대구백화점이 단순히 상품을 사고 팔던 공간이 아니라, 지역과 동고동락을 함께한 미래유산이란 의미 부여에서 시작한 연구다.

논문은 대구지역 백화점사(史)부터 대구백화점의 탄생, 지역민 기억 속 대구백화점까지 짚어가면서 “이미 사라져 버린, 혹은 사라질 위기에 처한 문화자원을 미래세대에 전달하고 기억할 방법을 함께 고민하자”고 제안한다. 전시, 동판 설치 같은 대구백화점을 기억하기 위한 방안도 덧붙는다. 연구자가 미래세대에 전달을 고민해야 한다고 말하는 기억은 “대백 앞에서 만나”에서부터 시작된다.

‘길 위의 다방’, ‘꿈의 백화점’ 그리고 ‘민주화 운동의 무대’

유 씨가 ‘대구백화점’을 논문 주제로 잡은 것엔 시기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 지역에 필요한 이야기를 하고 싶어 입학한 대학원에서 근현대 문화유산 관련 논문 주제를 고민하던 2021년 여름, 대구백화점 본점이 문을 닫는다는 뉴스를 봤다. 지역민에게 일상적이고 당연한 공간이던 대구백화점이 허무하게 사라지는 것에 대해 기록을 남겨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동성로 중심에 있는 대구백화점은 지역의 랜드마크로 기능했고, 그 앞 광장은 자연스레 약속의 거점 역할을 했다. 유 씨가 인터뷰한 어떤 이는 ‘길 위의 다방’이라는 표현을 썼다. “대백 앞에서 만나”라는 말이 대구에서 이뤄지는 거의 모든 만남의 출발과 같았다는 설명이었다. 요즘과 달리 내비게이션이 없었던 시기에도 대백 앞은 쉽게 찾을 수 있는 장소였다.

유 씨는 대구백화점이 개점한 1969년부터 1980년대 초반, 1980년대 중반부터 1990년대 중반, 1990년대 후반부터 2021년으로 시기를 나눠 당시를 기억하는 지역민을 만났다. 인터뷰이를 만나기 위해 지인의 지인을 소개받고, 모바일 중고마켓에서 구인을 하기도 했으며, 발품도 팔았다. 동성로 상인, 대구백화점 전 근무자부터 50~90대 지역민까지 두루 만났고 ‘혼수·크리스마스·어린이날·청바지·메이커’ 같은 일상적인 키워드를 던져 그들의 기억 속 ‘대백’을 끄집어냈다.

1970년대 대구백화점은 엘리베이터와 에스컬레이터를 구경하러 가는 ‘꿈의 백화점’으로 인식됐다. ‘구경은 대구백화점에서, 구매는 교동시장에서 했다’는 증언이 많을 정도로 소비보단 경험의 공간으로서 기능한 시기다.

유 씨는 “백화점에서의 소비가 일상적으로 허용되지 않던 시절의 대구백화점은 꿈을 실현하게 해주는 공간이었다고 구절한 데서 ‘꿈의 백화점’이라는 소제목을 땄다. ‘당시 생일, 입학, 졸업 등 인생에서 의미 있을 때 가던 공간이었기 때문에, 이 시기 대구백화점은 누구에게나 좋은 기억이었을 것’이라는 이야기가 인상 깊었다”고 설명했다.

1980년대엔 민주화 운동의 중요한 무대가 됐다. 당시를 기억하는 인터뷰이는 “대구에서 사람이 가장 많이 모이는 장소였기 때문에 시국을 알리기 좋은 장소였고, 누구나 찾아오기 쉬워 시위의 1차 집결지로 많이 활용됐다”고 회상했다.

유 씨는 “1987년에 이르러 대백 앞 광장과 같이 열린 공간에서 목소리를 낼 수 있었던 건 사회적 분위기가 조성됐기 때문에 가능했으며 그 기저에는 지역민의 지지가 바탕이 되었다. 인근 상인들은 가게 안으로 시위에 참여한 지역민을 데려오거나 김밥과 박카스를 사주는 등의 방식으로 지지를 표현했다”고 전했다.

‘대구시민의 쇼핑은 대구백화점으로’
유통 대기업도 몰아내던 위세
백화점 쉬는 날이 상인들도 쉬는 날

유 씨가 연구 과정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건 ‘대형자본 백화점과의 역전’이다. 1970년대 신세계백화점이 대구에 진출하면서 대구 백화점 업계는 대구백화점, 동아백화점, 신세계백화점 3파전 형태로 잠깐 운영됐다.

대구백화점은 ‘대구시민의 쇼핑은 대구백화점으로’라는 마케팅을 펼쳤고, 신세계백화점은 개점한 지 3년 만에 철수했다. 여기엔 1973년도 발생한 석유파동이나 지역에서 입지를 탄탄하게 굳혀가던 나머지 백화점의 위세가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50여 년이 지난 지금은 상황이 완전 역전돼 신세계백화점을 비롯한 유통대기업 백화점이 지역 소비의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역전된 상황에 밀려 폐점 후 1년 넘게 그 역할을 찾지 못한 대구백화점은 주변 상인들에게 애증의 공간이다. 이들은 대구백화점이 잘 되어서 자신들의 휴일도 백화점 쉬는 날에 맞추던 시절을 지나왔다.

▲대구백화점의 예전 모습 [사진=대백 홈페이지, 뉴스민 DB]

유 씨는 “50여 년의 시간적 층위를 다져온 대구백화점은 어느덧 없으니만 못한 도심 속 거대한 흉물이자 애물단지로 전락한 신세가 됐다”며 “대구백화점 본점이 문을 닫은 후 동성로 상인들도 마음이 편치 않다. 오랜 세월 대구백화점과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사진관을 운영한 인터뷰이는 문 닫은 대구백화점이 곧 자신의 미래를 보는 것 같다고 했다”고 말했다.

이어 “논문을 통해 우리와 가까운 시대를 대변해 줄 문화 자원이 너무 쉽게 사라지기 때문에 이를 기억하기 위한 논의가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며 “대구백화점뿐 아니라 동아백화점, 한일극장, 제일서적같이 오래 한 자리에 있다 사라진 곳은 단순히 공간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무작정 없어지면 안 된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를 대변하는 것에 대한 중요성이 공론장에 올라왔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김보현 기자
bh@newsmi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