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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해 겨울, 주인공 가족에게 닥친 일
중3 도윤은 검도 유망주다. 성적이 쏠쏠하고 실력을 인정받아 체고 진학이 예정되어 있다. 아마 이후엔 체대, 그리고 실업팀으로 진로를 꿈꾸고 있을 테다. 시골에서 하우스 농사를 짓는 부모님과 남동생에게 도윤은 자랑스러운 딸이자 누나로 여겨진다. 야무진 눈에 탄탄한 체격을 가진 도윤은 대련에서도 돋보인다. 이제 겨울 대회를 앞두고 합숙에 들어갈 찰나, 충분히 입상 실적이 있는 도윤은 이번엔 쉬어갈 참이다.
남동생 지후는 가을에 누나의 시합 모습을 보고 곧잘 따라하곤 한다. 하우스에서 부모님이 일하는 동안 곁에서 지후는 막대기로 여기저기 찌르고 쳐보면서 누나 따라쟁이를 한다. 그러다 찢어진 시설물에 손을 베어 병원에 급히 후송가게 된다. 하지만 문제는 이걸로 끝이 아니다. 아빠가 지후를 병원에 데려간 사이에 홀로 하우스에 남았던 엄마가 일산화탄소 중독으로 쓰러져 겹으로 병원 신세를 지게 된 것이다. 주변에선 지후가 내려치던 배관이 구멍나는 바람에 누출로 엄마가 쓰러진 거라며 수군거린다.
아빠는 엄마가 입원한 병원에 상주해야 하고, 도윤은 남동생을 돌봐야 하는 상황에 봉착한다. 지후는 다친 손바닥을 일단 봉합하긴 했지만 패혈증 우려로 계속 소독하고 치료해야 한다. 당연히 누나 도윤의 몫이다. 동생의 부어오른 손바닥을 소독해주는 도윤의 눈에 새빨간 소독약이 선연한 피처럼 비춰진다. 무슨 생각에서일까? 도윤은 갑자기 굳이 안 가도 될 대회 합숙에 가겠다고 고집을 부리기 시작한다. 아빠는 도윤이 이기적이라며 집안 상황을 좀 생각하라 타박하지만 누나바라기인 지후는 자기 혼자 괜찮다며 도윤 편을 든다.
우격다짐으로 합숙에 합류한 도윤은 실력을 인정받아 고등부와 연습 대련을 하고 도장 스카웃 제안을 받아 뿌듯해한다. 사소한 부상은 아무렇지도 않다. 하지만 연주를 비롯한 동료들은 도윤의 합숙 합류가 마뜩치 않다. 체고 진학을 위해 실적을 쌓아야 하는데 생태계 파괴자 레벨인 도윤이 갑자기 참여하니 자신들에게 조명이 돌아올 일은 사라졌기 때문이다. 주변의 차가운 시선 속에서 애써 버티던 도윤에게 급한 전화가 연거푸 날아들기 시작한다.
◆ 도농복합지역의 사회경제 인프라 묘사가 은근 비범한
대구영화학교 1기 출신 박찬우 감독은 영화학교 수료 후 첫 작업인 <국가유공자>로 적지 않은 주목을 받은 바 있다. 그런 감독의 차기작은 역시 가족 내의 묵은 갈등과 분출하는 욕망, 상실의 슬픔들로 채워진다. <아무 잘못 없는>에도 일정부분 감독의 자전적 경험담이 반영되어 있다지만 굳이 그 부분을 강조해 실제 사실과의 비교체험을 부각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그렇게 흘러가기 시작하면 영화는 그 자체가 아니라 일종의 진실게임 퍼즐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영화 속 세계의 이야기는 누구라도 겪을 수 있을 법한, 조금 진득한 우리 주변의 삶과 풍경의 재현으로 간주하면 족할 요소들로 잔뜩 채워져 있다.
우선 우리는 주인공 도윤의 삶과 조건을 고찰해야 한다. 왜 그가 매 국면에서 그러한 판단을 내리는가에 대해 이해하려면 그 과정은 필수전제가 될 테다. 감독은 여기에서 지역(향토)적 특성을 십분 활용하는데 그리 특별해 보이지 않는 묘사이지만 마치 손자병법 지형편의 정수를 터득한 모양새라 은근히 비범한 표현력이 관측된다.
주인공의 집은 농사를 짓는다. 지역은 대구 옆 경산이다. 지방 소도시는 대개 작은 도시구역과 주변의 읍면으로 구성된다. 도윤의 집은 그중에서도 한적하고 넓은 공간인 읍면에 해당된다. 즉 우리가 상상하는 전형적인 작은 시골마을 동네인 것이다. 밤이 되면 다들 각자의 집에 머물고 거의 모든 활동이 중단되는 그런 동네 말이다. 부모님의 노동력으로 지탱하는 소규모 농업으로 삶을 영위하는 가족경제가 한눈에 역력하게 드러난다. 이런 동네라면 약국에 가려 해도 차가 필요하다. 아픈 이가 생기면 병원이 아니라 보건지소를 찾아나서야 할 판이다. 아니면 구급차를 불러야 한다. 우리가 미디어로 접하며 남의 일로 흘려듣는 시골 지역의 인프라 부족현상이 체감되는 공간인 것이다.
도윤은 이런 시골마을에서 검도 특기자의 길에 매진한다. 한국의 학원체육에서 검도는 화려하게 주목받는 분야는 아니지만 세계 3강의 한 축 정도는 되는 지명도를 갖는 은근 실속 있는 종목이다. 실업팀도 여럿 있고 관련 인구도 60만 정도로 추산되는 저변 탄탄한 종목이다. 무엇보다 큰 장점은 다른 학원체육 종목에 비해 상대적으로 뒷바라지 경비가 덜 들어가는 편이라는 점이다. 집의 전폭적인 지원을 기대하기 어려운 도윤으로선 안성맞춤인 종목인 셈이다.
◆ 성공의 절박함 속에서 주위를 둘러보기란 힘든 나이, 열여섯
주인공의 나이는 16살 겨울, 이제 중3에서 고1 진학을 준비하는 시간이다. 세상 물정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고 집에서 자기를 받쳐줄 건수는 딱히 기대하기 어려워 보인다. 꿈 많은 소녀는 어떻게든 자기 실력으로 성공해서 시골을 탈출해야만 한다. 안 그러면 인생 출발부터 망할 각이다. 요즘처럼 온통 미디어와 SNS 곳곳에서 부추기는 실체를 알 수 없는 해괴망측한 계급과 차별 아래에서 아직 어린 주인공은 인생역전을 위해 자신이 가장 자신 있는 것에만 집중하려 한다. 능력주의의 순수한 발현이다. 그런데 순항하는 것만 같던 길에 먹구름이 밀려들기 시작한다.
자신은 오직 노력해서 잘하고 싶을 뿐이다. 그런데 도무지 주변이 안 도와주는 것만 같다. 엄마는 아프고 아빠는 집에 들어올 수 없다. 어쩌면 남동생이 이 모든 사태의 원인제공일지도 모른다. 괜하게 동생이 미워진다. 딱히 밉지는 않더라도 팅팅 부어오른 동생의 손에 빨간약 바르다 보면 기분이 우울해진다. 벗어나고 싶다. 탈출하고 싶다. 내가 인정받고 노력한 만큼 평가받는 곳으로 떠나고 싶다. 그런 생각이 주마등처럼 도윤의 뇌리에 엄습했을 테다. 그래서 기어코 고집을 부려 체고 진학을 위해서라면 굳이 안 가도 될 겨울 합숙에 합류한다. 하지만 그걸로 끝이 아니다.
무한 경쟁이 격화된 한국사회에서도 특히 체육특기자의 길은 바늘귀처럼 좁다. 미국처럼 학원체육에서도 학점과 성적을 강조하지 않는 대신, 오직 실적에만 극한으로 매몰되는 병폐를 지적받지만 실적지상주의로 인해 개선될 틈이라곤 전혀 보이지 않는 한국 현실은 오래 전부터 지적받지만 개선될 기미가 없다. 특출하게 잘하는 선수라면 상위학교 진학이나 프로진출이 확정되면 주변을 위해 양보하거나 혹은 끼워 팔기(?!)로 동료들을 구제해야 하는 게 당연한 미덕처럼 받아들여지는 상황에서 도윤의 돌발 행보는 주변 친구들의 질시를 한 몸에 받기 딱 좋은 짓이다. 친한 동료이던 연주의 배신감은 그중에서도 가장 직설적이다. 너 때문에 내 진학은 글렀다는, 다들 너에게 그런 감정을 품고 있을 거라는 섬뜩한 토로는 욕설이나 폭력을 수반하지 않았는데도 공포 그 자체로 다가온다.
그런 가운데 도윤의 가족을 덮쳤던 비극은 2막으로 치닫는다. 여기에서 도윤의 가족이 처한 물리적 환경이 도드라진 역할을 그것도 악역으로 해낸다. 엄마는 상대적으로 의료 환경이 잘 갖춰진 대구 시내 병원 중환자실에서 산소 호흡기를 달고 하루하루 고비를 넘기는 중인데 남동생 지후 역시 최소한 경산시내로는 나와야 제대로 된 응급치료가 가능하다. 4인 가족은 둘로 찢어져야만 임기응변으로 대처가 가능한 것이다. 아빠가 근심하며 합숙훈련을 만류하던 건 이런 현실적 고민에서다. 이제 예전처럼 시골 인심이라 해서 이웃집에 어린 동생을 자기 가족처럼 맡아 달라고 할 형편이 아닌 것이다.
◆ 16살 도윤은 검을 쥔 채 물러서지 않을 것이다
도윤은 절반은 이기심에, 절반은 그저 아직 어린 나이에 감당해내기 힘든 비극을 회피하고자 계속 도망을 다녔지만 현실의 악령은 집요하게 그를 따라잡는다. 그리고 일정한 파국이 도윤과 남은 가족에게 닥쳐온다. 그 비극을 아직 어린 주인공은 어떻게 받아들여야만 할까.
2023년 8월 대구단편영화제에서 처음 관람하게 된 결말은 관객이 도윤의 행보를 추측할 순 있지만 온전히 눈으로 확인시켜 주지는 않는 귀결이었다. 하지만 감독은 영화제 상영본보다 좀 더 구체화된 결말이 존재한다고 관객과의 대화에서 밝혔다. 그 버전을 직접 확인할 기회를 운 좋게 얻었다. 극장에서 봤던 영화 버전에 비해 보다 모든 게 구체화되어 한 눈에 들어왔다. 결국 주인공은 자기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것, 인생을 걸어야 할 데에 도전하는 길을 택한다. 누군가는 매몰차다고, 누군가는 독하다고 혀를 내두를 테지만 도윤에겐 다른 선택지가 없다.
주인공은 자신의 선택에 책임을 지기 위해, 가족의 이해와 희생에 보답하기 위해, 무엇보다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호구를 뒤집어쓴 채 표정을 숨기고 죽도를 휘두른다. 도윤의 검기는 재빠르고 방어태세는 두텁다. 그는 검도의 양가적인 측면, 즉 상대를 쓰러뜨려야 한다는 결투와 승리의 쾌감 vs ‘검선일여’라는 수양과 득도의 경지, 두 경계에서 줄타기를 거듭해나갈 운명이다. 하지만 도윤은 망설이지도, 후퇴하지도 않을 결의로 충만해 보인다. 그에겐 물러설 자리가 남아 있지 않다. 자신의 한 발, 한 발이 내딛는 무게감을 그해 겨울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소녀는 전진한다.
지역 독립영화 특성상 독립영화 출연진 중에도 팬덤을 구축한 배우를 섭외하기란 힘든 노릇이다. <아무 잘못 없는>의 배우들 또한 대중적으로 얼굴이 익은 이는 거의 없다. 하지만 지역 독립영화를 꾸준히 확인해 온 이들이라면 감독의 전작 <국가유공자>에서도 애증 가득한 부자 관계를 보여줬던 박일용 배우가 선보이는 인간적인 아빠 역할, 주인공 도윤 역을 맡은 한기옥 배우의 입술 지그시 깨물고 견디는 연기, 누나를 의지하는 남동생 지후 역 전민우 배우의 천진난만함, 그리고 역시 지역에서 주목받는 작업을 선보이고 있는 장주선 감독의 전작 <장학생>에서 주인공 역할로 인상적인 캐릭터를 선보였던 연주 역 조예주 배우들의 얼굴이 반갑게 뇌리에 박힐 법하다.
영화의 전체 러닝타임은 영화제 버전 38분에서 감독이 의도한 결말이 추가되면서 40분이 넘어가는, 단편으로선 헤비급 중량감으로 완성되었는데 이 분량 측면에서 다소 체급 논란이 발생할 법하다. 일단 국내 영화제 상당수에서 단편 러닝타임 제약에 직면하는 문제 해결이 필요할 테다. (개인적으론 이 기준은 예외의 폭넓은 인정 혹은 기준의 수정이 필요하다는 소견이다) 그것보다 근본적으로는 큰 궤도를 이탈하지 않고 주인공의 의식 흐름에 따라 스토리가 전개되지만 다소 뜸을 들이는 것처럼 보이는 호흡 속도에 대한 감독 자신과 관객의 판단일 것이다. 감독이 추구하는 속도감이 그의 영화에서 차지하는 비중과 함께 전개 상황에서 공전주기를 관객이 꽤 오래 기다려야 한다는 대기상태와의 조율은 결국 감독 본인의 판단 몫이기 때문이다.
<작품정보>
아무 잘못 없는 Not anyone’s fault
2023｜한국｜드라마｜41분
감독/각본 박찬우
출연 한기옥(도윤 역), 전민우(지후 역), 박일용(일식 역), 이지영(혜정 역),
조예주(연주 역)
촬영/조명/색보정 전상진(컬러플러스)
PD 김태오
미술 이지헌, 김재은
분장 유태경
동시녹음 송현직
사운드 최지영
조감독 김재은
스크립터 장병기
배급 협동조합 컨티뉴이티
2023 24회 대구단편영화제 애플시네마 경쟁 관객상, 지역영화 배리어프리 지원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