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정일의 플라톤 추방] 문명비판 의식의 아포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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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병석은 『양들에 관한 기록』(모악2021)에서 시인을 “다른 세상으로 가는 입구”(「공중의 어떤 입구」)를 찾는 사람이라고 규정한다. 시인만 그럴까. “배추밭 한 뙈기라도 가꾸어 보았거나, 거름 한 짐이라도 져본 사람/ 쌀 한 포대든 밀가루 한 포대든 져본 사람/ 만년 말단에 머무른 책상 노동자든 아니든/ 길가 작은 꽃집 주인이든 아니든/ 호숫가 수타면 반점 주인 혹은 배달원이든 아니든/ 시를 썼든 아니 썼든”, 누구나 새로운 세상을 꿈꾼다.

새삼 말할 필요도 없겠지만, 시인은 시를 씀으로서 다른 세상으로 가는 출구를 찾는다. 시인은 다짐한다. “나는/ 시력과 사력을 다해 기록해두려 한다”(「혜성이 모두 친절하진 않다 1」), “나의 일과는/ 부딪혀오는 바람과 지푸라기의 내력까지 남김없이 적는 일”(「혜성이 모두 친절하진 않다 2」), “명백한 어떤 화(和)의 순간을/ 물의 주름에 오래도록 나는 기록해 두고 싶네!”(「물 아래 화의 순간」) 장르 불문, 글로 씌어진 것은 모두 기록이다. 그런데 시인은 이번 시집의 표제작이 된「양들에 관한 기록 1」에서 자신의 기록을 “진술서”라고 칭한다.

진술서는 죄를 지은 사람에게 요구되는 글로,「양들에 관한 기록 1」과「양들에 관한 기록 2」를 종합한 진술서의 도입부는 다음과 같다. 먼저 아버지가 있었다. 아버지는 집이 숨을 쉬지 못할 정도로 양(가족)들을 억압했다. 집안에는 “양들이 타는 냄새”(「- 2」)로 가득했고, 가족들은 “자주 실신하며 서정시처럼 신경증”(「- 1」)에 걸렸다. 헛기침하는 아버지는 어디에나 있었고, 시간마저 그의 손아귀에 놓여 있다. “오늘이나 내일은 아버지의 소유일 게 뻔하다” 양들이 평화를 구하는 방법은 단 한 가지, “아버지를 에워싸고” 도는 것, 즉 아버지를 모시고 경배하는 것이다. “마지막 한 마리 양이 쓰러질 때까지”(이상「- 2」)

양과 아버지의 싸움을 가족 안에서 벌어진 투쟁으로만 한정할 필요는 없다. 아버지가 집안에서 전권을 행사하는 가부장제는 얼마든지 국가로 치환할 수 있다. 가부장제는 국가의 보증으로 지탱되었으며(호주제가 오랫동안 유지되어온 이유다), 국가는 근대의 가치로 치장된 ‘가족 사랑’이라는 전근대적 장치를 통해 통치의 이득을 얻는다(가장이 직장을 잃으면 가족끼리 보듬어 넘어가야 하는 문제로 귀착된다). 나아가 양과 아버지의 관계는 “하늘의 태양은 왜, 언제나 감추기에만 급급한가/ 식물과 동물의 아버지여, 그대가 숨긴 것은 과연 무엇인가”(「낙타의 꿈」)이라는 구절이 암시해주듯이, 인간과 신의 관계로 확장된다. 양은 그 순진함과 비천함으로 아주 오랜 시대부터 신에게 바쳐지는 제물로 사용되어 왔기 때문이다.

이어지는 진술서에 따르면, 아버지(왕ㆍ신)는 노쇠하면서 양의 도전을 받았다. “난데없이/ 양들이 아버지를 뜯어먹으려 덤빈다”(「- 1」) 노쇠한 아버지와 왕은 물론이고 신마저 새로운 도전자의 일격에 쓰러지는 것은 인류학적 진실이자(J. G. 프레이저의『황금가지』참조), 계몽주의의 승리를 실증한다. 여기서 끝나면 좋으련만, 아버지에 대한 반항은 원죄로 남는다. 보시라. “죄란 죄는 모두 화톳불에 던지고/ 세상 밖에 있는, 어떤 세상 안으로/ 가만히 낙과를 기다리는 과일처럼”(「혜성이 모두 친절하진 않다 2」), “죄를 털고 일어나고 싶지만/ 연기에 잠긴 마을처럼 실행은 늘 어렵다”(「산촌, 나의 죄」), “사막으로 가는 네 죄와 내 죄의 길”(「산촌, 나의 죄」) 그리하여 시인은 카인처럼 “나는 추격당하고 있다”(「도망치는 미이라」)라고 부르짖게 된다.

현대시는 유토피아에 대한 열망과 그것에 비례하는 문명비판이라는 두 가지 기획을 품고 있지만, 정작 현대시를 현대시답게 만들어주는 것은 미처 기획되지 않은 죄의식이다. 이 죄의식은 통치 기술이 심어놓은 고도의 지배 기술이자(나약해진 아버지, 혹은 망명을 떠나는 국부(國父), 암살당한 대통령만큼 우리를 유순하게 길들이는 것이 또 어디 있으랴), 그 자체로 아버지를 뛰어넘기 위한 저력이 된다.『양들에 관한 기록』의 나머지 시편들을 그 고투에 맞추어 해독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