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듯 같은 역사] 조선의 관료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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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 전인 1710년 6월 증광문과를 통해 이제 막 관료의 길을 걷고 있는 노상추에게 1711년 6월은 참으로 고역이었다. 영남 출신 출사가 거의 막혀 있던 시점에 대과에 합격했기 때문에 이는 개인의 영예를 넘어 영남 전체의 영예이기도 했다. 이 때문에 그에게는 다른 합격자들보다 더 무거운 성실함이 요구되었고, 그만큼 처음 맞는 한여름의 뙤약볕은 힘들기 그지없었다.

젊고 능력 있다고 생각되는 합격자들이 배치되는 승문원에서 관직 생활을 시작한 것은 젊은 권상일에게 행운이었다. 비록 지금의 시보 정도인 권지 벼슬이지만, 외교문서를 담당하는 승문원의 생활은 나라를 대표하는 관리로서의 능력을 키우는 일이었다. 외교문서의 특성상 꼼꼼하게 문건을 살펴보고 정리하는 능력부터 국가 간 정무감각을 익히는 데까지 고른 소양을 요구했다. 게다가 승문원의 수장인 도제조는 보통 의정부의 삼정승이 겸직했기 때문에, 고위 관료들과 함께 관직생활을 하는 행운도 주어졌다.

그러나 시보 정도에 불과한 권지의 역할은 주로 문건을 정리하고, 겸직 관원들이 대부분인 승문원 관료들의 집과 근무처를 찾아 이를 확인 받는 일이었다. 한 여름 뙤약볕 속에서 문건을 들고 이리저리 다니다보면, 평생 과거 공부만 준비했던 그의 체력은 늘 쉽게 고갈되곤 했다. 막 과거에 합격한 신입관료들 대상의 ‘군기 잡기’였던 신참례나 허참례 이후부터, 승문원의 업무는 대부분 신입 관료들을 과로 상태로 몰아넣었다. 그러나 신입 관료 권상일을 괴롭히는 것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6월은 인사 평가의 계절로, 그는 첫 인사평가를 앞두고 있었다. 당시 중앙뿐 아니라 지방까지 대부분의 관료들은 6월과 12월에 표폄, 즉 인사평가를 받았다. 지방관의 경우 그들이 속한 도의 감사로부터 평가를 받았고, 중앙 관서의 경우 각 관서 수장이 이를 평가했다. 그런데 이제 막 권지로 출발하는 신입 관료들에게 첫 인사 평가는 이후 그의 관직 생활을 결정할 수 있었다. 만약 처음부터 하下를 받으면 다른 관료들과 마찬가지로 바로 파직이었으니, 이만저만 신경 쓰이는 게 아니었다. 다행스럽게도 1711년 승문원 표폄은 지방에 내려가 있는 관료들이 많아 조금 연기되었다.

표폄의 연기로 한숨 돌리는가 싶었던 권상일은 다시 월과月課 앞에서 숨이 턱 막히는 느낌을 받았다. ‘월과’란 말 그대로 매월 부과되는 일이다. 각 관서의 입장에서는 매월 해야 할 일일 수 있지만, 관료들에게 월과는 매월 치르는 시험 성격이 강했다. 시대별로 월과의 형태는 조금씩 달랐지만, 당시 신임관료 노상추에게 내려졌던 월과는 계절별로 3개의 시나 글을 짓는 방식이었다. 보통 계절 초 성균관 대사성이 9개의 주제를 제시하면, 이 가운데 3개를 골라 계절의 마지막 달에 글을 제출해야 했다. 평균 한달에 한편 꼴이기는 했지만, 과중한 업무로 인해 미루다보면 마지막 달에 3편의 월과로 발을 동동 굴러야 했다.

이 월과는 과거 시험에 합격한 관료들이 시험을 칠 당시의 실력을 유지, 또는 늘기를 바라는 이유에서 이루어졌다. 과거 시험 과정에서 치러야 하는 시詩나 부賦, 또는 책문과 같은 글을 매달 써야 했으니, 만만치 않았다. 게다가 행여라도 제출하지 않으면 인사 고과에 하下로 반영되어 파직되었고, 제출해도 그에 대한 평가는 인사평가 고스란히 반영되었다. 신입 관료 입장에서는 여간 신경 쓰이는 일이 아니었다. 더 큰 문제는 허참례나 신참례 같이 일종의 군기 잡기 과정에서 선배들의 월과까지 써내는 경우도 종종 있었으니, 월과라는 말만으로도 경기驚氣를 일으킬 지경이었다.

그런데 신임관료 권상일의 시련은 이 정도에서 그치지 않았다. 기록이 있던 6월 6일로부터 약 보름 뒤인 6월 20일는 시사試射에 참여해야 했다. 시사는 말 그대로 활쏘기 시험이다. 원래 문관의 월과는 글을 짓는 것이고, 무관의 월과는 활쏘기 테스트였다. 그런데 문관은 글을 짓는 일과 별도로 매달 20일 활쏘기 실력을 테스트 받았다. 문관들의 경우 아예 활을 쏴 보지 않은 사람들도 많아, 이 역시 이만저만 문관들을 괴롭히는 일이 아니었다. 물론 이는 문무를 겸비한 관료를 양성하기 위한 일환이었지만, 권상일처럼 평생 글이나 읽었던 문관의 경우만 해도 그 자체가 고역이었다.

문관으로서 기본 업무만 해도 하급직의 특성상 정신을 차리기 힘든데, 거기에 매달 글쓰기와 활쏘기 테스트까지 이루어졌으니, 이제 막 관직에 나서는 신입관료 입장에서는 보통 일이 아니었다. 특히 6월이었던 당시 승문원에는 많은 관리들이 자리를 비웠고, 이로 인해 권상일은 승문원을 대표해서 이 모든 일을 감당해야 했다. 이렇게 몇 달 버티다 결국 휴가를 청해 고향인 상주로 말머리를 돌렸던 이유였다.

조선의 관료 대부분은 대과 합격을 통해 관직에 진출했는데, 이들 대부분은 당시로서는 시대의 천재들이었다. 정기 과거 시험인 식년시의 경우 3년 단위로 단 33명을 선발했고, 간혹 비정기적인 시험의 경우에도 이 수를 넘는 경우는 없었기 때문이다. 양반이 아무리 적었다고 해도 수만 명이 이 시험 하나에 목숨을 걸었기 때문에, 합격 그 자체로 그는 자신의 천재성을 증명했다. 하지만 조선 조정은 이러한 천재들도 그냥 두지 않았다. 매월 월과를 통해 실력을 테스트하고, 문무를 겸비한 관료로 성장할 수 있도록 독려했다. 이러한 시스템은 갓 입직한 관료들을 조선 최고의 인재로 성장하도록 도왔다.

그러나 이렇게 선발되고 양성된 천재들 대부분은 무능하고 게으르며 윤리적이도 않은 왕 앞에 굴복했다. 물론 이들에게는 대체로 두 가지 선택지가 있었다. 관직을 버리고 낙향하거나 또는 왕의 수준에 맞는 인간형으로 변모되는 것이다. 그러나 당시 천재들 대부분은 후자를 선택했다. 물론 뛰어난 왕도 있었고, 그러한 왕을 만들기 위해 촘촘한 왕세자 교육 시스템과 경연 등을 운영했던 조선이었다. 그러나 세습되는 최고 권력은 그러한 시스템에도 불구하고 대부분 무능하고 게으르며 윤리적이지도 않아서 당대 최고 천재들마저 자기 수준에 맞추게 했다. 대부분의 시대 최고 천재들이 무능한 왕 하나를 넘지 못했던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