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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사회의 단면을 지역에 천착해 재현하는 감독의 행보
장주선 감독은 첫 단편 <조의봉투> 이후 <장학생>-<프리즈마>-<겨울캠프>로 이어지는 후속작업을 통해 한국사회 내에서 비주류에 속한 존재들을 꾸준히 소환한다. 감독 본인부터 서울 패권과 유리된 지방에서 정규 코스를 밟지 않고 영화작업을 수행하는 실제가 작품 속 세계관과 균형을 이루는 모양새다. 이 영화 안과 밖의 조화는 의외로 독립예술영화 작가들에게 결정적인 요소로 작용한다.
감독의 영화적 세계관에는 하나의 패턴이 발견된다. 모녀로 구성된 한 부모 가정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현실에서 겪을 법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특질이다. 이는 초기작인 <조의봉투>에서 취업준비생인 주인공에 감독 본인과 동 세대의 애환을 꾹꾹 담아내던 일반적인 또래 창작자들의 경향을 넘어서는 차이점으로 기능한다. 후속 작품부터 감독의 시야는 ‘엄마’라는 존재에 대해 착목하기 시작한다. 적지 않은 이들이 피상적이거나 그저 받기만 하는, 그러면서도 늘 티격태격하게 마련인 해당 존재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이 꾸준히 느껴진다. 여기에서 보다 더 확장해 서로 다른 세대를 연결하는 여성연대의 전망까지 감독의 세계관이 확장되고 있음을 증명해주는 작업들을 선보이고 있다.
<장학생>은 학교 급식실에서 일하는 중년의 엄마 -대입을 준비하는 고등학생 딸, <프리즈마>는 30대의 구직활동에 지친 엄마 – 아직 많이 어린 딸, <겨울캠프>는 영양사로 근무하는 30대 엄마 – 지병을 가진 초등학교 고학년인 딸을 중심축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물론 엄마와 딸, 둘이 똑같은 비중으로 평행하게 이야기를 풀어가지는 않는다. <장학생>은 딸이, <프리즈마>와 <겨울캠프>는 엄마가 중심이 되는 구성을 취한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그중 세 번째이자 최근작에 해당하는 <겨울캠프>는, 엄마가 주역이지만 딸의 서사 또한 상당부분 비중을 갖추면서 공동주인공에 가까운 형태를 선보인다. 이런 균형감각은 흥미로운 변주로 호기심을 이끈다.
◆ 도시라는 정글에서 살아남기 위한 모녀 각자의 싸움
은혜는 이번 가을, 학교 급식실에 영양사로 새로 취업했다. 위생 등 문제로 외부에선 제대로 보거나 알 수 없는 급식실이라는 공간은 하나의 ‘작은 사회’, ‘닫힌 사회’의 표상으로 기능한다. 이 밀폐된 공간 안에서 상대적으로 젊은 영양사와 중년의 조리장/조리원들 간 원활한 관계는 필수조건이다. 서로 사이가 돈독해야 일이 척척 돌아가게 마련인데 이 과정에서 텃세로 느낄 구석이 발생하지 않을 리 없다. 갓 부임한 나이 어린 신입 영양사인 은혜에겐 상황이 만만치 않다. 전임자는 얼굴도 못 본 터라 업무 인수인계부터 제대로 파악이 어렵다. 게다가 기존 관행을 중시하는 인력들과 원만하게 적응해야 하는 과제로 은혜는 분주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그런 은혜에겐 초등학교 고학년쯤 됨직한 딸 주영이 있다. (아빠는 이 가정에서 언급되지 않는다. 이혼한 걸로 추정만 될 뿐) 주영은 방과 후 동아리 활동으로 아이돌 그룹의 댄스를 부원들과 맹훈련하는 중이다. 주영 또한 엄마를 닮아서인지 매사에 원리원칙주의자다. 고된 연습에 지쳐 나가떨어진 부원들을 몰아세우며 좀 더 호흡을 맞추자 요구하지만, 아이들은 지치고 힘들다며 떡볶이를 시켜먹자고 권한다. 이때 주영의 표정이 묘하게 변한다. 실은 주영은 아토피 피부염이 심해 식단을 조절해야 하기 때문이다. 또래들이 즐겨먹는 떡볶이 같은 ‘단ㆍ짠’ 메뉴는 절대금기다. 어쩌면 엄마가 직업을 영양사로 정한 것도 자식의 건강을 돌보기 위해 이것저것 배우던 결과가 아닐까 싶을 정도다.
은혜는 여전히 새로운 직장에서 업무파악에 여념이 없다. 그런데 식재료 발주에서 뭔가 어긋나기 시작한다. 대체 예전에 이 급식실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었던 걸까. 석연찮은 미스터리에 다가서기 시작하면서 은혜는 의혹에 빠진다. 꼼꼼한 뒷조사 끝에 결국 진실에 도달하게 되지만 그 결과는 더 큰 혼란으로 은혜를 이끈다. 그렇게 말 못할 고민을 짊어진 채 시간은 흘러 겨울방학이 다가온다. 딸의 아토피 치료를 위해 은혜는 고가의 클리닉 캠프를 물색한다. 비용이 상당히 많이 들어가기 때문에 절약하고 또 절약해야 하는데 마땅히 들어와야 할 돈(양육비)은 차일피일 미뤄지기만 한다. 반드시 주영과 함께 겨울캠프에 참여하리라 별러 왔기에 은혜는 포기할 수 없다.
한편 주영은 아토피로 인해 학교생활에 애로가 꽃피는 중이다. 타인의 아픔을 배려하기보단 차이를 꼬투리 삼아 갈라치기하는데 익숙해진 요즘 아이들 세태 때문에 주영은 아이들과 다투고 학교에서 은혜를 소환하기에 이른다. 엄마인 은혜는 자신이 보여 온 대쪽 같은 성격처럼 주영에게 불이익을 당하지 말고 전말을 다 밝히자고 말하지만, 딸은 엄마 말대로 다 될 줄 아냐고 반문한다. 그리고 엄마가 강압적으로 자신의 의사를 존중하지 않고 밀어붙이는 건 생각하지 못하냐며 은혜에게 반항한다. 뭐 하나 제대로 되는 게 없다. 과연 이중의 숙제를 어떻게 풀고 은혜는 주영과 화해할 수 있을까.
◆ 사회적 약자가 거대한 불공정에 직면할 때 선택의 딜레마
은혜는 홀로 아토피를 갖고 태어난 딸을 키우며 생활을 책임져야 하는 존재다. 여기저기 찾아보면 급하게 도움 얻을 데가 없으랴마는, 기본적으로 단독자로서 세상을 헤쳐 나가야 한다. 게다가 혼자 몸도 아니고 부양가족에 대한 양육책임까지 짊어진 채다. 그럼에도 적당히 눈치 보며 분위기에 타협하지 않고 자신이 옳다고 믿는 원리원칙에 충실하며 까칠하단 소리를 들을 정도로 규정을 준수하려는 캐릭터다. 하지만 그런 대쪽 같은 스타일 때문에 필연적으로 성격이 모난 취급을 감수하며 사람들의 오해도 사고, 규정을 지키려다 어쩔 수 없는 반목도 겪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특히 딸과의 반목에서 두드러지듯, 더 심각한 문제는 엄격하게 원칙에 충실하고 자기 정당성을 믿다 보니 어쩔 수 없이 독단적인 면모가 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자신은 틀리지 않았다고 정색하는 장면들, 급식과 위생 점검에 몰두하며 조리사들의 질려하는 표정을 외면하는 순간들, 딸에게 아토피 치유를 위해 캠프 참가나 식이요법을 종용하는 것도 하나하나 틀린 건 없다. 자신은 틀린 게 없는데 왜 본인이 헌신하는 가족까지 자신의 희생을 오해하는 것일까 은혜는 무척이나 서운할 테다.
하지만 ‘조반유리造反有理’란 사자성어처럼 세상은 원래 모든 반항이나 반란에는 나름대로 각자의 이유가 있게 마련이다. 개별의 사정과 상호 간 입장이 엇갈리며 충돌하는 가운데 파열음 속에서 선을 지키기란 결코 쉬운 노릇이 아니다. 특히 한국사회처럼 ‘유도리’가 법제도보다 더 우위에 선 관행으로 행세하는 사회에선 더욱 그렇다. 은혜가 자신의 어려움을 감내하며 사수해온 원칙과 기준은 점점 흔들릴 수밖에 없는 운명에 빠져 들어간다. 자신이 조금만 절개를 낮춘다면 모두가 만족하고 소소한 이익도 챙길 수 있을 때 개인의 윤리적 선택은 복잡한 양상을 띠게 마련이다.
◆ ‘겨울캠프’라는 유토피아를 넘어 우리 곁 ‘파랑새’를 찾는 모험
제목의 ‘겨울캠프’는 은혜가 딸 주영과 함께 지금의 수고로움을 기꺼이 감내하며 도달하고자 하는 현실의 ‘유토피아’다. 비싼 경비를 대가로 치러야 하지만 이 약속의 땅에 도착하기만 하면 자녀에게 은혜가 품고 있던 천형과 같은 트라우마는 해소되리라 은혜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은혜에겐 겨울캠프는 자신이 현재 감당해야 할 수난을 기꺼이 짊어지게 해주는, 자기 이름처럼 ‘은혜’로운 종교적 숭배의 대상인 것이다. 하지만 그런 당위에 질식된 은혜는 정작 딸 주영의 섬세한 마음은 통 헤아리지 못한다. 대부분의 부모가 빠져들곤 하는 정서적 함정이자 상호 소통과 수평적 관계형성에 여전히 애먹는 우리시대 어른들의 한계점이다.
은혜는 충실히 급식실의 한 학기를 보내며 처음에는 꽤나 서먹했던 조리사들과의 관계도 훈훈하게 개선을 이뤄낸다. 그렇게 성공적인 학기를 마치게 되지만 타인에게 말하지 못할 고충 속에서 부정한 세상의 질서와 타협을 고민한 결과이기도 하다. 하지만 도둑질도 해본 놈이 잘 하게 마련이다. 윤리와 도덕을 자기 편의적으로 탈부착 가능한 이들은 타인을 해치는 일도 아무렇잖게 해내지만 평생 정직하게 살아온 은혜로선 여간 힘든 일이 아닐 테다. 결국 은혜의 앞길엔 모난 돌이 정 맞듯이 자신들의 치부가 켕기는 이들의 협잡에 시달리거나, 혹은 자신이 그토록 거부하던 카르텔에 편입되거나 하는 선택지만 남은 것처럼 보인다.
반면에 주영은 엄마의 보살핌이 절실하지만, 그것 또한 자신이 동의하고 수긍하는 방식으로 받아들이고 싶다. 그가 동아리 연습실에서 맹연습하는 소녀시대의 ‘다시 만난 세계’는 노래가 나온 뒤 2016년 이화여대에서 울려 퍼졌던 것처럼 원래 제작의도를 초월하는 확장세계관을 형성하기에 이른다. 그렇게 재탄생한 노래는 평범한 대중가요 유행을 뛰어넘어 청춘의 자유를 희구하는 송가로 한국사회에서 수용되는 중이다. 주영이 ‘다시 만난 세계’를 동아리 부원들 사이에서 솔선수범해 격렬하게 수련하던 순간은 곧 좌절과 회피를 넘어 이 가족이 다시금 떨쳐 일어나는 부활의 서사로 영화 속에서 긍정과 극복의 기운을 상징한다. 엄마와 딸은 각자의 풍파를 겪으며 시련에 휩싸이지만, 책임감에 허덕이던 은혜 대신에 오히려 수렁을 헤치고 나올 힘과 용기는 그저 보호받아야 할 대상으로만 여겨지던 주영에게서 비롯되는 게 신선하게 다가온다.
◆ [수난이대]의 21세기적 변환이라 할 이야기의 매력
그렇게 거칠고 잔혹한 세상에 단 둘이 의지해야 하는 모녀는 또다시 세계의 격랑에 마주할 수 있는 단합을 유지할 수 있게 된다. 마치 하근찬의 [수난이대] 속 부자관계가 70년의 시간이 흐른 뒤 자연스러운 사회역학 변화 속에서 모녀관계로 대체된 기분이 흠뻑 들 정도다. 생각해 보니 정말 판박이 느낌이다. 앞에서 서술되듯 <겨울캠프>는 당대의 잔혹한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한 가족공동체의 순수한 뼈대만을 남긴 채 그들의 위태로운 행로를 관객이 조마조마한 심경으로 지켜보게 만든다.
[수난이대]가 일제강점기에서 한국전쟁 시기까지 격동의 해방전후 8년 동안 평범한 민초들이 어떤 수난을 견디며 생존투쟁을 이어왔는지를 굳이 구체적인 정세해설 없이도 자연스럽게 부자 개개인이 겪는 비극으로 체감하게 해준다면, <겨울캠프> 속 모녀는 총알과 포탄이 날아다니는 실제 전쟁은 아닐지언정, 그에 못지않게 험난한 일상의 싸움을 누구의 관심도 받지 못한 채 끝도 없이 지속해야만 하는 처지다. 1950년대 부자와 2020년대 모녀는 형태는 다르지만 동일한 전쟁 상황에서 살아남기 위해 싸우는 점에선 동일한 셈이다. (심지어 [수난이대]의 작품 배경은 경북 하양이기도 하다) 절대적 빈곤과 복지개념 부재에서 상대적 빈곤과 시스템의 배제라는 조건 외형이 바뀌었을 뿐이다. [수난이대] 속에서 부자가 함께 건너던 외나무다리는 <겨울캠프>에선 모녀가 함께 손잡고 향하는 차가운 도시 배경으로 전환된 것이다.
장주선 감독은 3편(혹은 데뷔단편까지 포함하면 4편)의 연작 형태를 띠는 일련의 작품들로 세밀한 심리묘사와 함께 냉정한 사회적 환경 속에서 선량하지만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약자들의 생존투쟁을 풀어내왔다. 현실에서 흔히 거대담론에서도, 성공신화에서도 배제되기 십상인 변두리의 존재들을 향한 작가의 시선이 유독 부각되는 지점이라 하겠다. 현실의 세밀한 풍경 재현에 일정한 성과를 획득한 감독이 향후 차기작에선 또 다른 변주에 도전하기를 기다려본다. 혹은 견고한 중심축에 풍성하게 펼쳐지는 확장 서사를 선보이길 기대해본다.
<작품정보>
겨울캠프 WINTER CAMP
2022|한국|드라마|28분
감독/각본/편집 장주선
주연 우연서(은혜 역), 백송희(주영 역)
출연 김수정(조리장 역), 홍경숙(조리원1 역), 박은희(조리원2 역), 석효진(조리원3 역),
손호석(트럭기사 역), 서성희(식당사장 역)
PD 김재은
촬영/조명 고현석
미술/의상 김다은
분장 김현정
동시녹음 김태휘
제작 협동조합 컨티뉴이티
배급 협동조합 컨티뉴이티
2023 5회 서울여성독립영화제
2023 24회 대구단편영화제 애플시네마 경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