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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 영일의 옛 현 가운데 하나였던 현일延日 현감을 지낸 장익張翼이 주부(여러 관아의 실무 책임자인 낭관직 가운데 하나)에 제수되었다. 1808년 윤5월 25일이었다. 장익은 영남 사람으로 알려져 있었던 터라 같은 영남출신이었던 노상추 역시 은근히 그가 관직 생활을 이어가는 것이 반갑기도 했다. 그런데 그가 다시 관직에 오른 이유가 조금은 특이했다. 벼슬을 내려 준 왕에게 감사 인사하는 의례인 사은숙배謝恩肅拜 자리에서 이조판서는 영남 인사인 그에게 관직이 내려진 이유를 설명했다.
당시 장익은 윤택성尹宅星이라는 인물과 함께 후보군에 올랐던 듯했다. 당시 문관의 인사를 담당했던 이조판서는 “윤택성은 부모의 나이가 80세 가까이 되었고, 장익은 그의 부모가 작년에 이미 회혼례를 지냈다고 합니다. 그래서 장익을 수망首望으로 삼았습니다.”라고 말했다. 조선의 인사는 이조에서 인사대상자를 3순위까지 추천한 후 왕이 최종 결정하도록 했는데, 장익은 수망, 즉 3명 가운데 1순위로 추천되었다고 했다. 그런데 그 추천의 이유가 특이했다. 바로 장익 부모가 회혼례를 할 정도로 장수했기 때문이었다. 회혼례란 결혼 60주년을 말하는 것이니, 누가 들어도 80은 훌쩍 넘은 나이의 양친이 아직 함께 살고 계신다는 의미였다.
지금 관점에서 보면 어떻게 이게 인사 추천의 이유가 될까 싶겠지만, 유교 이념을 기반으로 하는 조선 사회에서 이 역시 관직을 내리는 중요한 이유가 될 수 있었다. 조선 시대에는 그야말로 ‘나이가 벼슬’인 경우도 종종 있었기 때문이다. 세밀한 규정을 모두 말하기에는 지면이 짧지만, 보통 70세~80세 정도까지 탈 없이 장수하면 양민의 경우에는 1계급의 관직을 제수하고, 관직에 있는 사람이면 증직贈職, 즉 직위를 올려 주었다. 물론 이 관직은 실직이 아닌 명예직에 불과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이만으로도 벼슬을 내릴 이유는 충분했다. 이는 유교적 이념에 따른 공경의 정신을 구체적인 제도로 실현했던 결과였다. 이처럼 국가는 국가대로, 지방은 지방대로 나이 많은 사람을 예우하도록 했다.
조선의 이러한 문화에서, 부모를 잘 모셔 무탈하게 회혼례까지 치를 정도였다면, 그 자식 역시 칭찬받아 마땅했다. 유교의 기본 덕목인 효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조선에서는 능력에 따라 관직을 주고 인사를 진행하는 것도 중요했지만, 그만큼 이념을 드러낼 수 있는 인사 역시 필요했다. 조선의 관직은 원론적으로 ‘개인 수양을 넘어 그 도덕성이 그 주변과 지역을 교화시킬 수 있는 범위’만큼 주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물론 ‘원론’이 그랬다는 말이다. 대체로는 능력 있는 관리가 중요했지만, 경우에 따라 유교적 이념을 드러낼 수 있는 상징에 대해서도 예우할 필요가 있었다. 장익의 관직은 효를 중시하는 조선의 문화를 상징하는 일이었다. 조선은 이처럼 능력이 아닌 이유로도 관직에 오를 수도 있었고, 승진할 수도 있었다.
당연히 그가 근무처로 떠나기 전에 인사를 했던 사람마다 이를 화제로 올렸다. 특히 당시 좌의정은 장익이 인사를 하러 오자마자 대뜸 “그대의 양친이 회혼을 했다고?”라면서 그 사실을 물어왔고, 장익은 그렇게 대답해야 했다. 그러자 좌의정은 그가 장張 씨라는 사실에 착안하여, “그대는 혹 여헌 장현광의 자손인가?”라고 물어 왔고, 장익은 머뭇거릴 사이도 없이 ‘그렇다’고 대답했다. 장익이 영남 사람으로 부모가 회혼례를 치를 정도로 잘 모셨으니, 좌의정은 행여 그가 장현광의 후손이 아닌가 물었던 터였다.
장현광張顯光(1554~16378)이 어떤 인물이던가? 그는 구미 인동仁同 출신으로, 스스로 퇴계학을 직승한다고 자임했던 인물이었다. 성리학과 역학 등 학문에 뛰어났으며, 이로 인해 17세기를 대표하는 성리학자 가운데 한 명으로 꼽힌다. 특히 그는 병자호란이 발발하자 영남에서 의병을 일으켜 자신의 학문을 실천으로 증명했다. 물론 병자호란이 너무 빨리 끝나는 바람에 그의 의병 창의가 아무런 도움이 되지는 못했지만, 실천하는 유학자로 조선인들에게 기억되고 있었다. 다시 말해 장현광의 후손이라는 말은 영남의 명문가 자손이라는 의미였고, 좌의정은 장익에게 이를 확인했던 터였다. 장익의 입에서 그렇다는 대답이 나왔으니, 그는 어느 순간 장현광의 후손이 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사실이 조정에 알려지자, 문제가 발생했다. 그를 알고 있던 사람들 사이에서 사실 확인이 필요하다는 말들이 흘러나왔기 때문이다. 실제 장익의 양친이 나이가 많은 것은 사실이었다. 아버지의 나이가 78세였으니, 충분히 회혼이 가능한 나이기는 했다. 그런데 문제는 어머니였다. 알고 보니 그의 어머니는 계모인 데다, 당시 나이 역시 70세밖에 되지 않았다. 장익의 어머니와 회혼한 것도 아닌데다, 계모가 아버지와 회혼했다고 하기에도 계모의 나이가 너무 적었다. 아무리 조선시대라 해도 10살 이전에 결혼한다는 것은 상리에 맞지 않았다. 그에게 관직을 내려 준 이유가 거짓으로 드러났다. 그런데다 얼마 뒤 그는 장현광의 후손도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 갑자기 물어 온 질문에 얼버무리다 그렇게 되었다고 핑계를 댔지만, 조상의 가계에 철저했던 조선에서 이는 핑곗거리가 아니었다.
장익이 부모와 거짓 조상을 팔아 관직을 샀다는 소문이 조정 내 스물스물 퍼지더니, 결국 인사를 단행했던 이조판서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그러나 이미 사은숙배는 했고, 왕명으로 관직에 임명된 상황이었으니 이조에서 당장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결국 이조판서는 화만 내면서 “이러니 영남 사람들을 믿을 수 없다.”면서 영남 사람들을 싸잡아 욕하기 시작했다. 장익으로 인해 애먼 영남 사람들만 욕을 얻어먹는 형국이 되었다. 실제 문제는 인사 검증을 철저하게 하지 않은 이조였지만, 그는 이를 활용하여 영남을 욕하는 근거로 삼았다. 장익으로 인해 영남은 부모 팔아 벼슬을 사는 집단이 되어 버렸다.
요즘도 정치인의 거짓말은 거짓말도 아니라는 말이 쉽게 회자 된다. 영화 <정직한 후보>는 정치인들의 거짓말이 얼마나 심한지를 풍자하는 내용으로, 선거를 위해 있는 어머니도 없다고 하는 우리네 정치를 풍자했다. 권력을 잡을 수만 있다면, 없는 부모도 있어야 하고, 있는 부모도 없애야 하는 상황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인 듯하다. 또 한 가지! 정말 양친의 회혼이 관직 임용의 첫 번째 조건이었다면 이를 정확하게 검증하는 것은 이조의 몫이다. 권력을 잡기 위해 거짓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으면 이를 정확히 가려 표를 주지 않는 게 우리의 몫이듯 말이다. 하긴 거짓이 발견되어도 선거에서 다시 표를 주는 우리 현실을 보면, 당시의 이조를 탓할 일만은 아닌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