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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6년 음력 4월 초, 훈련도감 군사 박성인이 청교淸橋의 술집에서 폭행당해 3일 만에 사망했다. 살인사건이었다. 다행히 이 사건은 한량인 이주귀가 때렸다는 주위의 진술로 인해, 처음부터 범인이 특칭되었다. 이주귀는 한량(이 당시 한량은 무과 합격자 가운데 관직에 나가지 못한 사람을 의미)으로, 신분은 양반이었다. 좌우 포도청에서 이주귀 행적을 쫓는 동안, 의금부는 그의 형 전임 부사 이주봉을 잡아들여 이주귀의 행적을 탐문했다. 의금부의 공초는 관료들에게 저승사자나 마찬가지였다. 결국 이주봉은 이주귀가 파주에 있다고 털어놓았다.
범인은 잡혔고, 사건은 일단락되는 듯했다. 그런데 한 달이 지나지 않은 어느 날, 한양 중부에 사는 박종복이 형조를 찾아 와 “제 동생 박성인이 같은 동네 사람 김형수와 서로 다투다 그에게 맞아 사망했습니다”라고 고변하면서, 사건이 다시 복잡해졌다. 범인을 다 잡았다고 생각한 형조는 발칵 뒤집혔다. 박성인 살인범으로 이주귀가 조사를 받고 있는 상황에, 갑자기 피해자 가족들이 다른 사람을 범인이라고 지목했으니 말이다.
피해자 가족들의 진술부터 들어야 했다. 아버지 박중현은 자신이 들은 이야기라면서 당시 상황을 진술했다. 아들 박성인이 청교 술집에서 술을 마시는 사이, 양인 김형수가 양반인 한량 이주귀, 최영건 등과 함께 술집에 들어왔다. 술을 주문하는 과정에서 군사 박성인과 한량 이주귀, 최영건 사이에 시비가 붙었다. 양인 주제에 양반들 앞에서 술 마시는 예를 지키지 않았다며 한량들이 육량전으로 박성인을 때렸고, 이로 인해 박성인은 급히 몸을 뺐다. 그런데 그 뒤를 양인 김형수가 따라와 다시 때리는 바람에 며칠 뒤 사망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양반과 양인 사이에 발생한 싸움에 김형수가 개입되면서 박성인이 사망했다는 진술이었다.
김형수가 잡혀 들어왔다. 그런데 김형수는 어안이 벙벙해 보였다. 김형수는 자신도 박성인에게 맞았을 뿐이고, 그 뒤의 일은 알지 못한다고 진술했다. 김형수와 이후 이주귀의 진술에 따르면, 당시 최영건과 이주귀, 그리고 김형수가 청교 술집에 갔을 때 박성인이 먼저 술을 먹고 있었다. 그러다 이들이 들어가자, 박성인이 그들에게 예를 표했지만, 이주귀는 이를 보지 못해 응대하지 못했다. 이렇게 되자 박성인이 술김에 이 둘에게 욕을 했고, 이주귀와 최영건은 포수에 불과한 훈련도감 군사가 양반에게 욕한다면 육량전으로 그를 때렸다. 김형수는 이 상황을 말리기 위해 박성인을 부축해 나왔는데, 박성인은 오히려 김형수가 양반들과 결탁해서 자신을 괴롭힌다면서 김형수가 정신을 잃을 정도로 때렸다. 이로 인해 김형수 역시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 억지로 집에 귀가한 게 전부라고 했다.
이제 다시 이주귀를 호출해야 했다. 그런데 재조사에 들어가자 이주귀는 처음과 다른 진술을 내놓았다. 자신이 박성인의 인사를 제대로 받지 않아 박성인과 갈등이 발생한 사실은 자신의 잘못이라고 했다. 이 때문에 박성인이 자신을 거칠게 대하면서 발로 차기도 했다. 그래서 이주귀는 양인 주제에 양반들을 때리려 한다고 생각하여 최영건이 가지고 있는 화살대를 빌려 화살촉으로 내리치려 하는데, 이를 최영건이 말렸다고 했다. 그래서 자신도 술집에서 나와 집으로 돌아간 게 전부였다고 했다. 그런데 그 다음날 김형수의 형 김형우를 만났는데, 그가 동생 김형수 전날 박성인에게 맞았다면 이를 포도청에 고발하러 가는 길이니, 좀 도와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고 했다. 연유를 물어보니 전날 김형수만 거기 남아 있었는데, 그 와중에 박성인이 다시 김형수가 한바탕 싸움을 벌인 듯했다. 이주귀는 아마 이 과정에서 김형수가 박성인을 발로 찼고, 이로 인해 박성인이 며칠 뒤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했다. 자신은 범인이 아니며, 자신이 도망간 이유 역시 부모 눈앞에서 살인사건의 혐의자로 잡혀가는 것을 피하려 했던 것이지, 도망친 것은 아니라고 항변했다.
사건을 처음부터 다시 확인해야 했다. 일단 사건의 발단과 서로 다툰 정황은 분명했다. 그리고 이주귀를 제외한 피해자 가족이나 김형수의 진술에 따르면, 이주귀가 육량전을 들고 박성인을 때린 것도 확실했다. 다만 그 이후 김형수와 박성인이 다시 다투는 과정에서 박성인이 사망한 것인지, 아니면 그 이전에 육량전에 맞아 사망하게 된 것인지는 정확치 않았다. 결국 형조는 박성인의 시신을 다시 검험했다. 그런데 이들은 이주귀의 진술을 기반으로, 화살대로 맞는 상처는 없다는 것을 통해 ‘화살대로 때리지 않았다’는 진술만 사실로 확인했다. 그러다보니 이주귀의 진술대로 김형수가 때린 듯한 발로 차인 상처도 있었다. 이를 본 형조에서는 결론이 뒤집혔다. 김형수의 폭력으로 박성인이 사망했다고 결론냈다.
그러나 이를 보고 받은 정조는 생각이 달랐다. 그는 우선 한 달여 만에 박성인 가족이 소송을 제기한 것에 의심을 가졌다. 이 시간이면 양반인 이주귀 집안에서 얼마든지 사안을 조작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이유에서 정조는 초기 검험 자료만을 갖고 형조의 입장을 세 가지로 반박했다. 첫째, 박성인의 몸에는 육량전으로 10대 이상 상흔이 있는데 이는 이주귀의 소행이 분명하다는 점이었다. 육량전 역시 위험한 흉기일 수 있었다. 둘째, 형조에서 올린 진술을 보면, 이주귀는 흉기(육량전)을 잡고 있었지만, 김형수는 맨손이었다. 맨손으로 사람이 죽을 가능성보다는 흉기에 의해 그렇게 될 가능성이 훨씬 높다. 그리고 정조가 중요하게 본 것은 세 번째였다. 정조는 이주귀가 행여 흉기를 사용하지 않았다고 해도, 양반 신분을 활용해서 김형수로 하여금 박성인을 때리도록 지시하고 사주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았다. 비록 김형수의 손에 의해 죽었을 수도 있지만, 그렇게 되도록 사안을 끌고 가면서 이를 지시한 사람이 실질적인 살인자라는 점을 명확히 했다.
정조의 판결은 정확했다. 사실 이러한 사건은 현재 수사 기법을 동원해도 명확하게 범인을 특정하기는 쉽지 않다. 다툼의 과정에서 어떤 주먹이 사망의 원인이 되었는지 정확하게 분석하는 것은 여전히 어렵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니 당시 양반들은 무식한 양민들 사이의 싸움을 정리하려 했고, 형조는 이러한 관점에 따라 사건을 처리했다. 그러나 조금만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면, 비록 김형수에 의해 박성인이 죽었다고 해도, 이를 사주하고 지시한 사람은 결국 이주귀였다. 이처럼 명확한 사안이 형조에서 흔들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보고 싶은 것만 보는 우리 법 현실과 너무나 닮은 지점이다. 정조가 아니었다면 또 다시 양반 무죄, 양민 무죄인 상황이 발생할 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