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듯 같은 역사] 이황의 선묘 배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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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일찍부터 예안(지금의 경상북도 안동시 예안면 일대)고을에 사는 김광계는 바쁜 외출 준비를 하고 있었다. 얼마 전인 1610년 윤3월 중순 경, 도산서원으로 퇴계 이황 선생을 선묘宣廟에 종사하기로 했다는 낭보가 날아들었다. 그리고 오늘(윤3월 25일) 조정에서 파견한 사제관이 예안에 도착한다는 소식이 도착했던 터였다. 선묘 종향이라니! 이는 이황 선생 개인의 영광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문중과 고을 전체의 영광이기도 했다. 퇴계학을 정통으로 잇고 있는 김광계 선생 입장에서도 이만저만 큰 영광이 아니었다.

이게 얼마나 큰 영광인지 이해하기 위해서는 ‘선묘’의 의미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선묘란 ‘선조대왕의 묘廟’인데, 여기에서 묘는 무덤이 아니라 ‘신주를 모시는 사당’이다. 선조는 2년 전인 1608년 승하했고, 1610년이 되면 3년 상을 끝내고 조선 선대 왕들의 위패가 모셔진 종묘에 배향된다. 이제 광해군의 시대가 열렸고, 선조 임금은 종묘에 들어 조선의 역사가 되었다. 대부분의 봉건 국가들이 그랬던 것처럼, 왕은 자기 재위 기간을 대표했다. 왕의 재위 기간 그 자체가 그의 역사이기도 했다. 번영과 발전의 시기였던, 고난과 퇴보의 시기였던, 왕은 자기 재위 기간 역사를 대표했다.

그래서 조선은 왕의 위패를 종묘에 배향할 때, 그 왕의 역사를 대표할 신하들도 함께 종향從享했다. 이 제도는 고려시대부터 있었는데, 당시에는 왕이 총애했던 신하들이 중심이었다. 그러나 조선에 오면 유학 이념에 따라 왕의 재위 기간 왕과 함께 그 역사를 책임질 신하를 종향하기 시작했다. 선조와 함께 선조의 재위기를 대표하고, 선조와 함께 왕도정치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했던 대표 신하들을 종향하는 게 원칙이었다. 이처럼 종묘에 종향되는 신하는 왕조가 지속되는 한, 자신이 종향된 왕과 함께 제사를 받으면서 그 왕의 시대를 대표했다.

종묘에 제향되는 일이니만큼 행사도 컸다. 광해군은 의례관儀禮官과 배진관陪進官을 파견해서 이 일을 국가 의례로 진행하게 했다. 특히 중요한 일은 종묘에 모실 위패를 제작하는 일이었다. 위패는 신위神位라고도 했는데, 이 말은 그 속에 신이 내재한다는 의미이다. 이 때문에 신위를 제작할 때에는 반드시 신이 계신 곳에서 해야 했다. 이황 선생의 가묘에 모신 신위 역시 이황의 장례 때 산소에서 제작했다. 이 때문에 종묘에 모실 신위는 그렇게 산소에서 가져온 신위가 있는 가묘에서 제작하는 게 원칙이었다. 당연히 그 행사의 장대함과 엄숙함은 말로 할 수 없을 정도였다.

당시 이 제사를 보기 위해 이황의 학문을 잇는 예조좌랑 금개琴愷을 비롯하여 영해부사 노경임盧景任, 풍기군수 성이민成以敏 등이 예안을 찾았고, 안동부사와 예안현감을 비롯한 지역 관리들 역시 행사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당시 도산서원에는 고을의 유생들을 비롯하여, 퇴계학인을 자처하는 인근 지역의 유생들까지 모여들어 발을 들일 곳이 없었다. 오죽하면 김광계가 많은 사람들 사이에 치여 의례 과정을 지켜보지 못하였을 정도이니 말이다. 이후 여기에 참여한 유생들 가운데 100여 명은 예안 경계까지 이황 선생의 위패를 전송했고, 그 중 몇몇은 한양까지 위패를 호위해서 다녀왔다. 그들이 얼마나 큰 영광으로 생각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 당시 선묘 배향은 이황 단독이 아니었다. 이황과 더불어 이준경李浚慶과 이이李珥도 함께 선묘에 들었다. 이 3명이 선조 시기를 대표하는 신하로 평가되었다는 의미이다.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선조의 재위기는 임진왜란을 극복했던 많은 공신들이 있었고, 사림에 의해 새로운 유학이 펼쳐지는 과정에서 많은 성현들도 배출되었다. 그럼에도 역사적 평가를 통해 단 세 명만 선묘에 종향했다. 이준경은 명종의 고명대신으로 선조를 왕으로 옹립하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했으며, 이황과 이이는 각각 퇴계학파와 율곡학파를 탄생시키면서 ‘한국 유학’의 중흥기를 이끌었다. 선조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임진왜란으로 인해 그렇게 후하지는 않지만, 선조 재위기는 사림의 정치가 새롭게 형성되었던 중요한 시간들이었다는 말이다.

그러나 보니 아이러니하게도, 이들 3명의 관계가 각별하거나 뜻을 모아 함께 선조 재위기를 이끌었던 사람은 아니었다. 이준경은 사림파의 개혁 정치가 성공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던 인물이지만, 젊은 개혁 사림파였던 이이로부터 탄핵을 받을 정도였다. 이준경과 이황 역시 홍문관의 선후배 사이였지만, 이들은 시대를 바라보는 입장과 학문적 차이가 커서 갈등을 겪기도 했다. 더욱이 이황과 이이는 주자학적 이념에 충실했지만, 학문적 차이로 인해 서로에 대한 평가는 박하기 이를 데 없다.

게다가 좀 더 엄밀하게 보면, 이준경을 제외하면 이황과 이이는 ‘선조만의 사람’도 아니었다. 물론 왕의 재위기 그 왕의 사람이 아니라는 게 말은 되지 않지만, 오로지 선조만을 위해 충성했던 사람은 아니라는 의미이다. 이는 이준경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선묘 종사는 왕과의 관계가 중요한 게 아니라, 종향되어야 할 이유와 역사적 평가가 더 중요했음을 알 수 있다. 한 시대를 왕 중심으로 읽는 시선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전체 역사의 발전사 속에서 왕과 함께 그 시대를 만들었던 사람들을 하나로 읽어 주었던 것이다. 그들 관점에서도 선조의 시대였지만, 동시에 이황과 이이의 시대였다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지금의 누구의 시대일까? 5년밖에 안 되는 너무 짧은 재임기로 인해 ‘대통령의 사람만 보이는 지금의 상황’에서 우리는 누구를 통해 이 시대를 평가할까? 이황만큼 이이가 평가되고, 그래서 이준경과 선조도 보이는 시대가 지금은 가능할까? 정치는 너무 강한데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