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정일의 플라톤 추방] 엎어지기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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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분석의 창시자인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초기 저작에서 오이디푸스콤플렉스가 정신적 삶의 중심적 원동력이라고 말했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남자 아동은 성욕동을 타고났으며 심지어 어머니를 소유하고 싶어 하는 동시에 자신을 아버지의 경쟁자로 여긴다고 한다. 하지만 아동은 아버지가 신체적으로 강하며 아버지와 정면으로 싸우다가는 자신이 거세당할 것임을 알기 때문에 공격 본능을 감추게 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억제된 본능은 사라지지 않고 무의식에 기입된다. ‘아버지-어머니-아들’이 주인공인 이 자극적인 서사는 대개의 인간 관계가 낳은 갈등에 잘 들어맞는다.

프로이트가 처음으로 오이디푸스콤플렉스를 발설한 이후로, 그의 핵심 사상이나 마찬가지인 이 개념은 많은 도전을 받아 왔다. 중국의 문필가 린위탕(林語堂)은 한 명의 아이를 조부모(祖父母. 할아버지·할머니)를 비롯한 여러 가족이 공동으로 키우는 중국에서는 프로이트의 학설 같은 것을 꺼내놓았댔자 우스꽝스럽기만 하다고 코웃음 쳤다. 또 질 들뢰즈와 펠릭스 가타리는 인간 관계나 사회 질서에 대한 해석이 오이디푸스콤플렉스라는 극장으로 축소되는 한 오이디푸스콤플렉스 바깥에서 벌어지는 자본과 권력의 음험한 작동을 보지 못하게 된다고 말한다.

허다한 반(反)오이디푸스주의자 가운데 인류학자 어니스트 베커는 가장 강력한 반오이디푸스주의자다. 그는 20세기 후반의 걸작으로 반드시 거론되어야 할『죽음의 부정』(한빛비즈,2019)에서 아동의 삶을 추동하는 근본적인 동력은 성욕동이 아니라 자기확장(나르시시즘)과 죽음에 대한 공포라고 말한다. 프로이트는 남아를 특권화했으나 베커는 남아와 여아를 가리지 않는데, 아동은 유아기 동안 자신의 의도대로 조종되는 어머니를 보면서 자신을 텔레파시를 가진 초능력자 곧 신이라고 생각한다. 이와 같은 나르시시즘이 위축되면서 혼동을 맞게 되는 것은 아동이 죽음을 감지하면서부터다. 죽음은 자기확장의 욕망을 아무런 쓸모없는 똥으로 만드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므로, 베커는 이 모순적인 상황에 직면한 아동은 물론이고 영원을 갈망하지만 필멸하고 마는 인간을 ‘똥 위에 앉아 있는 신’이라고 부른다.

자기확장이 가로막히고 죽음의 공포에 사로잡힌 아동은 어머니로부터 아버지에게로 관심을 이동시키게 된다. 아동에게 어머니는 몸과 땅이라는 결정론에 매여 있는 것처럼 보이며 자신이 신체적으로 취약한 존재에게 완전히 의존해 왔다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된다. 죽음의 공포에 짓눌린 남아와 여아는 모두 어머니로 표상되는 성에서 달아나려는 욕망에 굴복한다. 그들은 조금만 구슬리면 아버지와 그의 세계에 자신을 동일시한다. 아버지는 신체적으로 더 중립적이고 더 뚜렷한 힘을 가졌으며 몸의 결정론에 덜 매여 있는 것처럼 보인다.

베커에게 오이디푸스콤플렉스는 남아가 어머니를 두고 아버지와 벌이는 한 판의 대결이 아니라, 남아와 여아 모두가 순수한 신체성을 가진 존재인 어머니보다 더 추상적인 힘을 가진 아버지와 합일하려는 아동의 방향 전환을 가리킨다. 그래서 베커는 억압을 내장한 ‘오이디푸스콤플렉스’라는 부정적 용어 대신에 ‘오이디푸스 기획’이라는 긍정적 용어를 만들어 썼다. 전자가 인간의 근원적 힘을 성욕동으로 보는 프로이트의 기본 가설과 연관되어 있다면, 후자는 죽음에 대한 공포에서 비롯한 ‘죽음의 부정(=극복)’이 인간의 근원적 힘이라는 베커의 가설과 연관된다.

인간의 리비도(성욕)가 승화된 것이 문명이라고 프로이트가 말했다면, 베커는 인간이 죽음을 극복하기 위해 만든 것이 문명이라고 말한다. 비유하자면, 피라미드나 남산 타워에서 권력자의 임포텐츠(Impoten: 발기 불능)를 발견하기보다 필사(必死)에 대한 공포와 불멸에 대한 열망을 보라는 것이다. 이와 같은 반오이디푸스 논지는『죽음의 부정』의 전모가 아닌 절반에 해당한다. 나머지 논지는 죽음을 부정하려는 나의 노력이 타자에 대한 부정 즉 폭력과 전쟁으로 실현된다는 것이다. 베트남전쟁이 한참이던 1972년에 출간된 이 책에서 베커가 하려고 했던 말은 분명하다. 국가는 죽음 공포를 가진 인간의 심리를 이용하여 ‘죽지 않는 영웅’이 되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