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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째 뭉그적거리던 일을 올해 초 결행했다. 은행 가서 자동이체로 빠져나가는 목록을 뽑은 다음 몇 개의 후원금을 해지했다. 월 만 원의 얼마 되지 않는 돈이지만 후원해야 할 곳이 해마다 늘어나다 보니 감당하기가 버거웠다. 그 후 뉴스민 소식을 들었다. 뉴스민은 살려야지. 뉴스민 후원금을 만 원 더 늘렸다.
어느 날 이상원 기자로부터 전화가 왔다. 후원주점 티켓을 100장 줄 테니까 우리 동네 사람들에게 좀 알려 달라고 한다. 흔쾌히 알겠다고 했다. 기고글도 써 줄 수 있겠냐고 한다. 그러겠다고 했다. 공수표 남발하듯 막 대답했다. 뉴스민은 살려야지. 전화를 끊고 걱정이 시작됐다. 그러다 어느 글에선가 보니 영남대 이승렬 교수께서 뉴스민을 살리기 위해 거금을 후원했다고 한다. ‘그래, 사람들에게 얘기해 보고 안 되면 티켓 100장쯤 내가 감당하면 되지.’ 생각하니 마음이 가벼워졌다.
‘우리 동네 사람들’, 그러니까 우리 동네(시지동)에서 공동육아로 아이를 키웠거나 아이를 키우고 있는 사람들을 말하는데, 이들 120명이 있는 ‘조합수다방’에 뉴스민 이야기를 꺼냈다.
“지난 겨울 누군가 이 조합방에 올려준 <어른 김장하> 다큐를 보며 다들 마음이 맑아진 경험 하셨을 텐데, 저희가 그 어른처럼 혼자 힘으로 지역 언론 하나를 어떻게 할 수는 없지만 함께 힘을 모으면 가능하지 않을까 싶어서 여기다 얘기해 봅니다. 3·1절 아침, 대한독립을 위해 태극기 한 번 흔드는 일이라 생각하며 동참하시는 거 어떨까요?”
뉴스민을 아는 사람들이 말을 보태주어 후원을 하거나, 후원을 늘리거나 티켓을 구매하겠다는 댓글이 달렸다. 그중 가장 적극적으로 후원주점 티켓을 팔아준 이가 있었는데, ‘초코우유’(‘우리 동네’에서 통하는 별명)였다.
초코우유는 대구시 산하 위수탁 기관 중 한 곳에서 근무하는데, 5년 전 그 기관이 위수탁 전환기에 석연치 않은 이유로 고용승계가 이뤄지지 않고 부당해고될 처지에 놓였다. 동네 엄마들과 초코우유의 사연을 듣고 답답해하면서도 우리가 뭘 어떻게 할 수가 없어 뉴스민 천용길 기자에게 전화해 도움을 요청했다. 이상원 기자가 취재를 해 그 기관의 상황과 행태에 대해 집요하게 보도했다. 덕분에 초코우유는 해고되지 않고 지금까지 근무 중이다.
금호강에 사는 얼룩새코미꾸리도 그러하듯 우리는 모두 정치와 그에 따른 행정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작은 물고기 한 마리처럼 힘없는 우리에게 어떤 문제가 닥쳤을 때 그건 모두 사소한 것이 돼 버린다. 하소연할 곳 없는 우리에게 기댈 언덕이 뉴스민이다. 아사히비정규직해고노동자, 학교급식노동자, 대구장에인차별철폐연대, 사드 반대 투쟁을 이어가는 주민들의 기댈 언덕인 뉴스민이 이 정도로 어려운 상황인 줄 몰랐다. 뉴스민은 살려야지. 뉴스민이 사라진다면 우리는 대구 시민으로서 너무 쪽팔리니까.
지난달 뉴스민 후원주점이 있는 날 퇴근하자마자 서둘러 갔더니 내게 후원티켓을 사준 남편이 동네 아빠들과 일찌감치 와서 1층에 앉았다. 나와 그곳에서 만나기로 한 사람들은 가장 먼저 와서 2층 창가 쪽에 자리를 잡고 기다리고 있었다. 속속 자리가 채워지고 먼저 온 사람과 나중에 온 사람들이 눈짓으로 혹은 악수를 나누며 인사하기 바빴다. 코로나19로 몇 년간 함께 모이는 자리가 거의 없다가 간만에 떠들썩한 잔치가 벌어졌다.
10월항쟁유족회 선생님들도 오셨다. 그분들은 매월 줌으로 강의를 듣는다. 미국에 근거를 둔 진실화해평화위원회가 주최하는 강의여서 강사가 한국 사람이라도 강의를 온라인으로 진행할 수밖에 없는데, 일흔이 넘은 유족회 회원들이 온라인 강의 접속이 쉽지 않아서 주말 아침 반월당 사무실에 모여 강의를 듣는다. 그때마다 노트북과 큰 화면을 연결해 강의를 들을 수 있도록 해주는 사람이 천용길 기자이다. 두어 시간의 강의가 끝나기를 기다려 기자재를 정리해 급하게 주말 알바 가는 모습을 나도 몇 번 보았다. 그게 미안하고 고마워서 그 자리에 참석한 것이다.
그날 2층에 두 칸뿐인 여자 화장실 중 한 칸의 변기에 문제가 있었다. 레버가 고정되지 않아 물을 내리기 어려웠다. 많은 사람들이 맥주를 마시니까 화장실이 얼마나 붐볐겠는가. 그런데 두 칸 중 한 칸에 문제가 있으니까 줄이 길어졌다. 누군가가 조심해서 레버를 내리면 된다고 알려주자 사람들은 불편하나마 그 칸도 들어가기 시작했다. 줄을 서도, 화장실이 복잡해도, 두 칸 중 한 칸에 문제가 있어도 아무도 화내지 않고 환한 표정으로 손을 씻고 거울에 비친 낯선 이에게 가벼운 묵례를 나누며 친근감을 표시한다. 아, 여기가 대동세상 아닌가.
집에 가려고 내려와 남편에게 갔더니 다들 기분이 좋은 상태였다. 낯선 이와 합석해서 새로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뭐가 그렇게 좋으냐고 물어보니까 같이 온 동네 아빠가 일찍 와서 여기저기 살펴보고 준비 과정도 지켜보았는데, 준비하는 스텝들의 표정이 한결같이 밝고 기운이 좋아서 저절로 기분이 좋아지더란다.
대동세상이 달리 있으랴. 가난한 이들의 풍요로운 마음이 모이는 곳 아니겠는가. 월 만 원의 후원 하나 더 하는 걸 망설이는 쪼잔한 내가 싫어서 생전 처음 부자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우리는 다시 지갑을 열거나 몸 부조를 하며 함께 행복하다. 못된 사람은 끼일 자리가 없는 곳, 그날 뉴스민 후원주점에서 흘깃 대동세상을 보았다.
이정연 천내중학교 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