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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여성학 시간 강사로 일할 때 언제나 지역 문제로 강의를 시작했다. “남해는 육지 사람의 시각이고 제주의 입장에서는 북해죠. 제주(濟州)라는 말 자체가 건널 제, 육지인이 정한 것입니다” 남학생들은 안도(?)하고 여학생들은 ‘진짜 여성학’을 고민한다.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여성주의 교육이다.
한국 사회의 가장 큰 문제는 서울 중심주의다. 전 인구의 20% 이상이 서울시에, 절반 이상이 바로 옆에 살고 있다. 계급, 젠더, 환경, 노동, 교육, 부동산···. 대한민국의 모든 문제는 서울 중심주의 때문이다. 서울도 균질적이지 않고 환원주의에 반대하지만, 나는 서울이 해체되지 않는 한 그 어떤 변화도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서울의 32평 아파트가 68억에 거래된 적이 있다. 68억이면, 그냥 평생 호텔을 전전하며(?) 살아도 될 돈이다(매달 100만 원씩 8년 이상 저축해야 1억이다). 이런 사회에서 무엇이 가능할까. 서울 25개구의 평균 인구는 50만 명 정도. 같은 단위의 지방자치단체인 군(郡) 인구는 3만을 넘으면 다행이다. 2023년 3월 현재, 전체 인구가 2만 1,177명인 전라북도의 어느 군은 사람보다 소 숫자가 많다. 서울과 비서울, 제2의 분단이다. 서울 해체는 사회주의 혁명보다 어려운 일이 되었다.
부(富)의 절대 집중, 유무형의 자원 외에도 사회 운동, 지식, 사회적 약자 이슈도 서울에 집중되어 있다. 나는 계급 ‘의식’과 지역 ‘감정’이라는 말에 분노한다. 이런 언어에 익숙한 이들이 한국의 진보 세력이다. 마르크스주의 지리학자 앙리 르페브르는 소비에트 연방의 몰락 원인을 도농 격차라고 분석했다. 사회주의 사회의 도시 중심 정책은 자본주의와 다를 바 없었다. 인종과 젠더, 지역 차별 문제는 마르크스주의로 대표되는 새로운 사상에서 왜 제외되었을까(물론 마오 쩌둥이나 그람시처럼 혁명과 지역 문제를 동시에 고민한 이들도 있다).
사회주의든 페미니즘이든 생태주의든, 돋보이고 싶은 개인의 자아는 강력하다. ‘우리’는 성차별과 빈부 격차에 분노하지만, 소속 공간, 학벌, 외모주의에 취약하다. 플랫폼 자본주의는 여기에 기름을 부어 이른바 관종, 인플루언서, ‘모두가 작가’인 포스트 휴먼 시대를 탄생시켰다. 그래서 나는 보수의 반대말은 소박함이라고 생각한다. 서울 중심주의는 주류에의 욕망의 결과가 아닐까. 인종과 종교 갈등이 덜한 한국 사회에서 중심과 주변, 주류와 비주류의 이토록 강력한 구별 짓기는 서울과 학벌주의 없이 작동할 수 없다.
포스트 국민국가 시대는 국가 경계보다 메트로폴리탄들의 연대인 글로벌 시티(global cities)가 더 위력적인 상황을 뜻한다. 우리는 경남 사천(泗川), 충남 서천(舒川)과 서산(瑞山)을 구분하지 못한다. 개인적으로 한 곳에 연고가 있는 나는 이 차이를 한국인들에게 설명하는데 지쳤다. 대개 서울과 가까운 서산으로 수렴된다. 개성은 멀어도 뉴욕, 상하이, 도쿄의 브런치 문화는 익숙하다.
이러한 현상의 인프라는 기본적으로 규모의 경제인 자본주의와 매체의 확장 때문이지만, 대안이 없지는 않다. 지역 정체성이 서울과 거리 혹은 관계로부터 정해지는 원리를 인식하는 것이다. 지역 언론은 서울을 상대화하는 가장 큰 ‘무기’이다.
조한혜정의 말대로 “공략하기보다 낙후시켜야” 한다. 당연히, 서울은 세상의 전부가 아니다. 서울도 하나의 지방(province)이다. 서울을 지방화하자(provincializing). 나는 제민일보, 국제신문, 전남매일의 홈페이지에 자주 접속하는데, 전혀 다른 세상을 만난다. 차이에 대한 인식은 모든 앎의 기본이다.
이제 ‘뉴스민’이 추가되었다. 홈페이지에 “뉴스민은 대구 경북을 살아가는 노동자, 농민, 빈민, 여성, 장애인, 이주노동자, 청소년, 성소수자 등 사회적 소수자의 이야기를 담아내는 대구경북지역 독립언론입니다” 나는 이 글귀를 읽고 마틴 맥도나의 영화 <킬러들의 도시>가 생각났다. 흑인 장애인과 백인 장애인은 장애인 차별로 연대하는 대신, 피부색을 놓고 갈등한다는 얘기가 나온다. 백인 장애인은 비장애인을 동경하고, 흑인 장애인보다 우월하다고 좋아한다(?). 이는 여러 가지로 흥미로운 이슈다. 대구경북지역의 사회적 약자는 서울의 약자와 연대해야 하는가, 아니면 서울의 약자도 포함된 서울 중심주의와 싸워야 하는가. 아니, 소수자라는 단어에는 무조건 연대가 따라붙어야 하는가. 그것이 가능할까?
나는 연대 대신 단속(斷/續)의 연속, 맥락에 맞는 전술을 원한다. 그 ‘중심’에 여러 개의 ‘뉴스민’들이 파르티잔이 되길 응원한다.
정희진 서평가, <정희진의 공부>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