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네팔 출신 로미(가명, 40대) 씨는 2003년 피난 차 한국에 산업연수생으로 입국했다가 미등록 이주노동자가 됐다. 왕정 통치 시절 왕정에서 일했는데, 네팔 공산당이 세력을 키워가며 분쟁이 벌어지자 위협을 느껴 한국에 왔다. 대구 성서공단 섬유공장에서 일을 시작한 로미 씨는 입국 1년 만에 미등록 이주노동자가 됐다. 상상 이상의 장시간·고강도 노동인데다, 임금이 체불되거나 적게 지급되는 일도 있어서 견디지 못해 일을 그만두고 다른 공장으로 옮겨갔기 때문이다.
베트남 출신 이주노동자 응우옌 아잉(가명, 20대) 씨는 한국에서 ‘불법체류자’로 불리는 미등록 이주노동자다. 18살에 결혼 업체를 통해 처음 본 남편과 결혼해 한국에 왔다. 아잉 씨는 한국에 와서야 국제결혼의 현실을 깨달았다. 문화나 언어 차이는 배워 메꿔나가면 됐지만, 남편과 나이 차이가 24살이 났고 살림을 하려 해도 시어머니가 허락하는 것만 사거나 쓸 수 있었다. 극단적인 폭력은 없었지만, 결혼 생활에 적응하지 못한 아잉 씨는 집을 나왔고 미등록 이주노동자가 됐다.
로미 씨와 아잉 씨는 7일 오전 11시 대구출입국외국인사무소 앞으로 향했다. 이곳에는 이들과 유사한 사정의 미등록 이주노동자 30여 명도 모였다. 강제 추방 위험을 무릅쓰고 집회에 참석한 이들은 떨리는 마음으로 “강제 추방 반대”를 외쳤다. 이날 집회에는 미등록 이주노동자를 제외하고도 100여 명이 함께 했다.
아잉 씨는 대구출입국 앞에서 매주 열리는 집회 소식을 들으며 가슴이 아팠다. 한국의 출입국 제도 문제이긴 하지만 정작 당사자인 본인은 추방 우려 때문에 몸을 숨겨야 했기 때문이다.
자책하던 아잉 씨는 지난해 말부터 시작된 법무부의 합동단속으로 벌어지는 일들을 보며 용기를 내기로 했다. 합동단속 과정에서 이주노동자가 미등록이라는 이유로 중범죄자처럼 붙잡혀 추방되는 모습을 봤기 때문이다. 길 가다 불심검문에 잡혀 추방되기도, 교회에 예배보러 갔다가 추방되기도, 출신국 내한 공연을 보러 갔다가 단체로 추방되는 모습도 봤다.
대구에서 아잉 씨가 했던 일은 나쁜 일이 아니라 한국이 필요로 하는 일밖에 없었다. 아잉 씨는 제조업체에서 CNC 가공으로 부품을 만들었고, 구미에서 휴대전화 부품을 만들다가 이불 공장, 플라스틱 공장에서도 일했다. 그동안 급여는 최저임금을 밑돌았고, 퇴직금을 받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당사자로서 직접 나와서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이번 주에 논공 베트남 식당에서 아는 사람이 점심 먹다 잡혀갔습니다. 교회에서도 잡혀갔습니다. 공연 보러 갔다가 잡혀갔습니다. 어디 나가기가 무섭습니다. 그래도 여기에 나왔습니다. 우리 문제를 직접 이야기 하고 싶었습니다. 우리는 한국에서 월급도 적게 받으며 한국 사람들이 안 하려고 하는 일을 합니다. 제도가 이상해서 미등록이 되는데 미등록이라고 마구 잡아 추방하는 건 잘못입니다. 우리도 인권이 있습니다.” (아잉 씨)
“불안하지만, 그래도 어렵게 휴가 쓰고 나왔습니다. 화납니다. 기도하는 사람 잡아가고, 슈퍼 가는 사람 잡아가고. 바로 이웃집 사람도 잡혀갔습니다. 한국에서 필요 없는 사람들이면 왜 오라고 했습니까. 어느 나라가 이렇게 심하게 강제 추방 합니까. 우리는 기계도 노예도 아닙니다. 사람이 살 수 있게는 해줘야지 일만 시키고 부품 바꾸듯 추방하는 게 인권입니까.” (로미 씨)
이날 집회에는 농민과 목사도 나와 강제추방 중단을 외쳤다. 성주에서 딸기 농사를 짓는 박수규(59) 씨는 “얼마 전 여주에서 이주노동자 단속으로 농민들이 일손이 없어 발만 동동 구르고 있다. 농사는 시기를 놓치면 1년 농사가 망한다”며 “요즘 농촌에는 젊은 사람도 없고, 이주노동자 없이 농사짓기는 불가능에 가깝다. 열악한 환경과 혹독한 일을 감당하는 이들을 미등록이라고 추방하면 농촌은 굉장히 힘들게 된다”며 농촌 현실을 설명했다.
고경수 대구평화교회 목사는 “최근처럼 이렇게 무자비하고 반인륜적인 강제단속을 한 사례도 보지 못했다. 출퇴근하는 사람들 붙잡아 불심검문하고 토끼몰이식으로 잡아간다”며 “암 환자라고 의사가 확인했는데도 그 사람을 체포해 간다. 미등록이라는 이유만으로 기본적 생활도 하기 어려운 곳이 이 나라”라고 말했다.
이어 “출신국에서 배우고 성장한 이주노동자를 들여와 한국은 한 푼도 투자하지 않고 힘든 일터에 보낸다. 이들은 노예도 기계도 아니”라며 “미등록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강제단속을 해서는 안 된다”고 덧붙였다.
한편 법무부는 지난해 말에 이어 올해 3월부터 2개월간 합동단속에 나섰다. 법무부는 앞으로도 분기별 1회(연 4회) 정례적으로 합동단속을 할 계획이다.
한동훈 법무부장관은 “올해가 불법체류 감축 5개년 계획을 추진하는 첫해인 만큼 엄정하고 집중적인 단속을 통해 체류질서 확립에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밝혔다.
미등록 이주노동자 단속 강화 분위기 속, 태국인 가수의 내한 공연에 참석한 미등록 이주노동자 158명을 강제단속하거나 지역에서는 경찰이 교회에서 예배 중인 미등록 이주노동자 9명을 붙잡아 대구출입국에 넘기는 사례도 확인됐다.(관련 기사=대구 경찰, 예배 중 미등록 이주민 체포 논란 대책 마련 검토(‘23.4.6))
박중엽 기자
nahollow@newsmi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