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비053] 어느 독립영화감독의 가족 시네마

<바보아빠>, <집 속의 집 속의 집>, <다섯 번째 방> 속 10년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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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독립영화가 가족을 다루는 방식 ‘썰’

2010년대 이후로 한국독립영화는 과거에 독재정부와 사전검열에 맞서던 정치사회적 저항에서 다양성으로 중심이 이전된 것으로 흔히 설명된다. 특히 예전에 비해 기술 발달로 영화 창작 진입 턱이 현저히 낮아진 상황에서 주요 창작 층인 20~30대들의 관심사와 정서를 반영하는 방향으로 자연스럽게 변화된 상황이라 보면 이해가 쉬울 테다. 과거에 비해 집단적 사회변화에 매진하기보다는 다양한 기호와 관심을 선보이며 개인과 주변의 일상을 관조하는 경향이 주류를 이루다 보니 전시대의 작품들에 비해 보다 좁고 섬세한 가시거리 내 범위 위주로 영화 속 세계가 형성되는 경향이다. 그 가운데에서 ‘가족’이란 소규모 공동체가 주요 배경으로 비중이 커지게 된 것은 당연한 귀결일 테다.

즉 ‘수신제가치국평천하’ 중 ‘치국평천하’가 퇴조하고 ‘수신제가’가 강조되는 셈이다. 그중에서도 ‘수신’은 동 세대가 겪는 애환과 보편적 관심사를 반영하는 흐름과 조응하며 현재 독립영화판에서 ‘사적 경향’이라는 거대한 주류가 되었다. 그리고 이를 조금 더 확장하는 경로로 가족이 뒤이어 등판한다. 하지만 과거 창작경향에 비해 ‘사회는 우리 힘으로 바뀌지 않는다!’는 체념이 지배적인 정조가 된 상황에서 ‘가족’을 통해 본인과 대 사회적 시야 중 택일(혹은 합일)하며 작가적 태도를 아로새기는 데 이르기에는 다수 창작자가 아직 경험이 일천하거나 협소한 게 사실이다. 거창하게 세계관까지는 아니더라도 나 자신이 포함된 세계에 대한 분명한 입장과 태도가 받쳐주지 못한 상황에서 ‘가족’은 그저 캐스팅하기 용이하고 상대적으로 익숙한 피사체로 그치곤 한다.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가족영화는 결코 안일한 선택이 아닌데도 말이다.

대구에서 태어나 자랐지만, 영화전공학과 진학 후 부산으로 거점을 옮겨 활동 중인 전찬영 감독은 지난 10년간 대구의 본가를 방문하면서 가족들을 카메라에 담았다. 그저 일상기록을 넘어 가족사의 특정 부분, 그것도 굳이 타인에게 드러내기 망설여질 만한 내용들이 다수다. 경상도, 그 중에서도 보수적인 색채가 더 짙은 대구경북지역에 남아 있는 (‘정상가정’과는 다소 거리감 있는) 자기 가족들을 향한 감독의 혈연으로서의 복잡한 심경, 그리고 가족 내부 갈등 상황의 근원을 탐구해 미시적인 테두리 내에서 보편적 구조와 역학관계로 규명해나가는 감독의 태도는 10년간 꾸준히 발전해 왔다. 이제는 초반 작업에서 두드러지던 특정 가족 개인에 대한 애증을 넘어 가족의 역사를 서술하는데 성공을 거두는 중이다. 과연 지난 10년 동안 감독과 가족들에겐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 무능한 가장에 대한 애증어린 관찰, <바보아빠>

▲영화 <바보아빠> 스틸 사진

대학 영화과 수업의 일환인 워크숍 과제로 고심하던 감독은 2010년대 이후 학생영화의 마르지 않는 샘물 혹은 최후 보루처럼 투입이 결정되는 가족 이야기를 선택한다. 그리고 본인의 아빠를 타깃으로 잡는다. 여기까지만 놓고 보면 아주 전형적이고 안일한 태도로 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후로 감독은 10년에 걸쳐 집요하게 아빠와의 애증관계를 탐구하게 된다. <바보아빠>는 바로 그 장구한 도전의 출발점이다. 과연 감독이 영화를 통해 확인되는 결말까지 각오했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감독에게 아빠는 대개 긍정적인 가장으로서의 존재감과는 까마득히 거리가 멀다. 시작부터 카메라는 감독의 인식을 대행하는 것처럼 아빠의 한심해 뵈는 외관을 집요할 정도로 클로즈업해 선보인다. 우리가 한국의 중년남성 캐릭터를 떠올릴 때 부정적으로 묘사될법한 전형적인 이미지가 한가득 펼쳐지는 것이다. 화면 속에서 아빠는 한국적 가부장의 거의 유일 덕목이라 할 가족부양 경제활동(시쳇말로 가족을 먹여 살리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으니 생사여탈권을 그 대가로 거머쥔다는 설정)의 책임을 제대로 수행하지 않는다. 그는 아내에게 살림살이를 떠넘기고 별 볼 일 없는 한량의 삶을 하루하루 대책 없이 보내는 중이다. 영화는 공식적으로 아빠란 존재를 그렇게 규정하고 있다.

그런데 정작 그런 공식화와는 별개로 카메라가 비추는 아빠는 한심하긴 하지만 미워할 수만 없는 존재감을 선보이기 시작한다. 아빠는 딸이 손사래를 치는데도 기어코 가는 길에 싸주겠다며 솜씨를 발휘해 음식을 만든다. 겉보기엔 느릿느릿해 보여도 소일 삼아 정원에 물을 주는 등 집안일도 수행한다. 백수라 하지만 집 한쪽 자리 잡은 작업공간에서 소파도 제작해 가끔 들어온 일감을 소화한다. 완성된 소파를 납품처에 배달하러 나갈 때는 동행한 감독과 부녀가 제법 합이 맞는 대화도 나눈다. 뭔가 공식 설정과 화면의 풍경이 엇박자가 심한 것 같다.

감독은 영화의 1/3 이상 분량이 지난 뒤에야 처음 등장해 내레이터 겸 등장인물로 임무를 수행한다. 아빠와 이것저것 이야기를 나누고 가족관계 일상을 소화하며 아빠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기록하는 중간에 종종 질문을 던진다. 썩 탐탁잖은 표정을 지으면서도 아빠는 딸의 촬영에 성심성의를 아끼지 않는 표정이다. 적당히 중년 한국남자다운 허풍을 섞어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누구나 전성시대가 있었다고 애써 강조하려는 본성처럼, 그 역시 문화예술 쪽의 활동을 준비하는 딸과 어울릴 겸 자기에게도 관련 소양과 추억이 있음을 꺼낸다. 학창시절 밴드 활동도 했다며 동년배들에겐 익숙할 테지만 자녀세대에겐 생경한 그룹의 이름도 언급해본다.

▲영화 <바보아빠> 스틸 사진

아마 감독이 제목 작명에 반영했을 것 같은, 아빠 자신이 존경하는 정치인으로 언급하는 ‘바보 노무현’이 그가 읽던 책 표지로 등장한다. 영화를 만들던 시점에서 이미 한참 전 고인이 된 전 대통령의 존재감은 가족 울타리 바깥세상에 대한 언급이나 조명과는 거리가 먼 본 작품에서 예외적으로 활용되는 동시에 중의적인 복합적인 레이어를 영화에 추가시킨다. 해당 부분은 자신의 영락한 처지를 스스로 인식한 중년남성의 자존감 유지를 위한 필사의 노력 중 하나일 테다. 또래 가부장들이 자녀와 소통하거나 환심을 사기 위해 흔히 구사하는 수단인 경제력의 부재 상황에서 어떻게든 딸과 관계를 이어가고자 애써 청년세대와 교감을 과시하는 허위가 애잔하게 그려진다. 어쩌면 이런 장면들은 비록 무능력한 아빠에 대한 원망이 전제돼 있을지언정 도매금으로 스테레오타입으로 삼기는 곤혹스럽던 딸이 아빠의 색다른 단면을 보여주고 싶었던 심리의 반영일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이율배반적으로 뒤섞이는 공식/비공식적 태도는 기묘한 감각으로 점차 혼재되어간다. 책임감 없는 가장에 대한 자녀세대의 통렬한 비판 마당으로 예상되었던 영화의 기조는 미워할 수 없는 귀여운 구석도 있는 아빠의 발견처럼 원 궤도를 벗어나면서 원래 기획과 꽤나 동떨어진 결과로 치닫는다. 그런 모순적인 상황이 신기하게도 ‘가족’이라는 혈연공동체의 복잡한 본질과 직면하는 형상화에 도달하는 것이다. 이런 반전이 작업과정에서 감독이 방향을 급속 변침한 결단인지, 아니면 차마 원래 설정으로 단호하게 끝장을 보지 못하는 안일함의 증명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그런 엇박자의 감각은 영화에서 가족이란 유서 깊은 최초의 공동체가 가질 수밖에 없는 복잡다단한 면모에 대해 쉽게 정식화하길 유보하는 세심함과 연결된다. 극단적인 단절은 오히려 쉬울 텐데 멀리 돌아가는 수고를 피하지 않고 감수하려는 태도다. 아빠를 탐탁잖게 여기긴 하지만 그가 자신을 무척이나 아낀다는 걸 새삼 체감하게 된 딸의 딜레마를 숨기지 않는 진심이 전제되었기 때문이다. 이후 작업을 통해 감독은 카메라의 물리적 거리는 더 근접하되, 피사체를 관찰하는 시선은 간격을 두는 시도를 심화해나간다.

◆ 가족 내부를 해부하는 구조로의 시선 확장, <집 속의 집 속의 집>

전작 <바보아빠>로부터 4년이 지난 후, 감독은 새로운 작업을 세상에 선보인다. 역시 애증 가득한 대상인 아빠가 주요하게 등장하지만, 과거 작품에서는 카메라를 든 채 아빠를 기록하는 포지션이던 감독은 두 번째 시도에선 본인 자신을 전면에 드러낸다. 다양한 변주로 선보이는 ‘데칼코마니’ 효과가 본 작업을 단순히 형식적 실험을 초과해 핵심적인 주제의식으로 펄펄 끓어 넘치듯 표출된다. 이번 영화에서 감독은 단순 관찰이 아닌 구조적인 전개를 기획하고 실행한다. 테크닉과 주제의식, 소재 활용이 어우러지면서 얼핏 과잉되어 보이면서도 균형감을 벗어나지 않는 선에서 효과적으로 메시지를 전달하는 발전상을 선보인다.

▲영화 <집 속의 집 속의 집> 스틸 이미지

안타깝게도 4년 후의 현실은 감독의 기대와는 달랐다. 전작에서 무능한 아빠를 질타하다가도 자신을 향한 가족으로서의 애착을 새삼 확인하면서 깊숙하게 찌르고 베기보다는 후일을 기약했던 감독의 희망 섞인 기대와는 상반된 상황이 화면 가득히 펼쳐진다. 하지만 아빠를 향한 분노에 찬 배신감이 영화 전체를 채우는 것과는 좀 다른 질감이다. 감독은 부정하고 싶지만 마치 아빠에게서 고스란히 물려받은 것 같은 마뜩잖은 면모를 자꾸만 스스로에게서 찾아낸다. 이 때문인지 감독은 아빠와 본인과의 관계를 더 집요하게 파고들기 시작한다. 그와 함께 자신을 질곡에 빠지게 만든 가족의 구조와 원인 규명을 위한 시도에 도전한다. 전작에선 엄마만 등장했지만, 이번에는 동생들까지 화면에 등장시킨다. 아무리 가족이 타자들에 비해 섭외하기 만만하다 해도 노력이 깃든 대목이다. 썩 반가울 리 없는 가족구성원 내 치부를 다루는 작품 방향성으로 볼 때 상당한 각오가 보태진 도전이다.

영화가 시작되면 전작에선 관찰자 포지션을 분명히 하던 감독 본인이 곧바로 등판한다. 제목을 시각화하는 시도로 화면 속에서 집 안의 방에 누워있는 감독의 모습이 거듭 둔탁한 셔터 소리와 함께 겹겹이 지층을 이루며 쌓여간다. 곧이어 등장한 아빠는 동일한 방식으로 화면에 겹쳐진다. 그리고 전작에서 아빠의 치부를 표현했던 이미지에 대구를 이루듯 감독 자신의 현재 답답하고 잘 풀리지 않는 상황이 묘사된다. 아빠가 가족 살림을 지탱하는 엄마의 카드를 몰래 빼내던 것처럼 딸 역시 타지로 유학 후 쪼들리는 주머니 사정 때문에 동일한 유혹을 느끼는 것이 묘사된다. 어느새 딸은 자신이 절대로 닮지 말아야지 다짐했던 아빠의 전철을 스스로 밟고 있지는 않나 두려움에 휩싸인다.

그런 불안감은 의식의 흐름과 함께 이를 형식으로 드러내는 몇 가지 장치로 반복해서 강조된다. 몇 갈래 퍼포먼스를 통해 펼쳐지는 일련의 상징화 작업은 모든 게 다 00때문이야! 같은 편의적이고 단순화된 단정 대신에 가족이라는 울타리 내에서 해소되지 않은 부정적인 유산이 어떻게 마치 식민주의처럼 둥지를 튼 채 후과를 양산하는지 증명하는 결과로 드러난다. 감독이 성장한 본가 주택 구조를 활용하는 시각효과는 꽤 인상적이다. 단지 같은 구도에 인물들을 교차시킨다거나 거울을 통해 마치 내면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묘사되는 상징성이 그저 실제 상황의 나열과 접합과 다른 심층적인 호소력을 선보인다. 4년간 감독이 영화적으로 다양한 자양분을 흡수하고 고심했다는 게 각인되는 지점이다.

▲영화 <집 속의 집 속의 집> 스틸 이미지

추가로 엄마와 동생이 증언하고 확인해주는 새로운 발견들은 부녀관계에 대한 애증어린 고찰을 뛰어넘어 이 가족 전체의 지난 세월을 정리하고 규정하는 틀로서 <집 속의 집 속의 집>을 자리매김한다. 과거부터 아빠는 자신을 다양하게 포장해 왔었다. 잘나가던 쾌남이자 온라인에서 상위 1% 장기를 가진 존재로 설정한 데다 청년세대를 이해하고 배려하며 진보적인 정치적 입장을 갖고 있다 자부하는 아빠는, 하지만 정작 가장 오랜 세월 고생시켜온 엄마에게는 함부로 대하며 잘못을 해도 사과하지 않는다. 그런 아빠의 행태를 할머니가 엄호하고 어린 남동생은 아빠를 보며 닮아가는 것처럼 보인다. 반면에 경제적으로 무능하기에 자기 집에서 강짜를 부리면서도 가족들의 눈치를 보며 편한 듯 보여도 자유롭진 못한 아빠의 입지도 세밀하게 포착된다. 그런 가운데 가끔 폭발하는 아빠의 폭력성이 단순한 현장기록이 아닌 은유와 상징화로 표현되는 장면은 예전 작업과는 궤를 달리하는 지점이다.

감독은 이번 작업에서 유독 스스로의 감정을 드러낸다. 울고 웃고 찡그리고 자신의 표정을 클로즈업하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자신의 영화인으로서의 불투명한 진로와 가족 내 해묵은 문제들의 시너지 효과 때문인지 확실히 이전에 비해 표정이 복잡하고 어두워졌다. 숨쉬기 힘들어 보일 때도 있다. 그래서일까? 감독은 수영에 몰두한다. 오래된 가족 내 모순이라는 지긋지긋한 무저갱의 늪에서 해방되기 위한 몸부림일 테니 수영 중에서도 생존수영 격이다. 하지만 고통에 치이면서도 해결을 포기하지 않던 감독의 자세는 마침내 5년 후 차기작이자 장편 데뷔작으로 가족 소우주를 집대성하기에 이른다.

◆ 내 가족의 역사책 초고를 완성하다, <다섯 번째 방>

다시 또 5년이 지났다. 2편의 연작 형태 단편을 선보인 감독은 이제 야심차게 장편 데뷔를 준비한다. 하지만 그저 단편을 잡아 늘이는 것으로 완성될 턱 없는 장편작업은 제법 오랜 시간을 필요로 했다. 그렇게 천신만고 끝에 세상에 선보인 <다섯 번째 방>은 감독과 더불어 서로 냉전과 열전을 오가는 아빠라는 기본구도에 마침내 이 가족의 실질 가장인 엄마를 출동시키기에 이른다.

▲영화 <다섯 번째 방> 스틸 사진

그동안 쌓아왔던 부녀간의 애증 그 자체인 네트워크에서 늘 주변부에 머물던 엄마는 이번 편에서는 당당한 주역으로 우뚝 솟아오른다. 그는 경제능력도 부양의지도 박약한 남편을 대신해 대외활동과 가족 살림을 동시에 소화하는 중이다. 하지만 어느 날 발생한 모종의 사건은 그렇게 헌신하던 엄마에게 자신이 이 가족에서 대체 왜 이런 푸대접과 무시를 받아야 하는지 심각한 자괴감을 퍼뜨린다. 단지 경제적 측면을 넘어 ‘집’이란 공간에서 엄마의 자리는 과연 어떻게 보장되는지에 대한 회의가 수반되고, 엄마는 버지니아 울프의 저 유명한 원작처럼 ‘자기만의 방’을 찾아 모험을 떠나게 된다. 그 과정에서 불꽃 튀는 가족 구성원 간의 토론과 갈등이 수반된다. 딸은 자신이 유년시절부터 경험해 온 평범하지 않은 가족 울타리 내에서의 삶이 어떻게 시작되어 지금에 이르렀는지를 고찰하며 구조화하는 작업을 진행해 나간다.

▲영화 <다섯 번째 방> 스틸 사진

<다섯 번째 방>은 감독의 지난 10년간의 탐구를 집대성하는 동시에 자기 가족에 대한 해부학적 관찰을 넘어 하나의 골격을 갖춘 보고서를 지향하는데 이른다. 물론 10년 전 감독이 품었던 의문과 고민은 아직도 온전히 해결된 것과는 거리가 멀다. 어쩌면 영영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감독(과 엄마를 포함한 가족 내 우군들)이 도망치거나 회피하지 않고 필사적으로 대면하고 응전한 결과는 흥미로운 중간정산에는 충분히 도달한 것으로 보인다. 장편 <다섯 번째 방>에 대한 세밀한 언급은 차후 본 작품이 보다 대중적으로 공개될 기회에 시행할 생각이다.

<작품정보>

바보아빠
2013|한국|다큐멘터리|22분
감독/촬영/편집 전찬영
출연 전성, 김효정, 전찬영

집 속의 집 속의 집 A House in a House, in a House
2017|한국|다큐멘터리|24분
감독/촬영/편집 전찬영
출연 전성, 전찬영, 김효정, 전나영, 전진호, 문옥이

2017 19회 부산독립영화제 심사위원특별상

다섯번째 방 Her 5th Room
2022|한국|다큐멘터리|77분
감독 전찬영

2022 24회 부산독립영화제 대상, 관객심사단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