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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을 잃어버린 세대에게 현실은 그저 건조한 일상의 연속일 뿐이다. 초등학교 시절 장래희망이 ‘대통령’이나 ‘과학자’에서 ‘공무원’, ‘건물주’가 되어버린 지 오래. 기성세대는 청년세대가 진취성이 부족하고 그 나이대 걸맞은 포부가 없다며 질타하지만 정작 당사자들은 어쩌다 태어났으니 살아가는 것일 뿐, 뭘 해 보려 해도 방도도 알 수 없고 앞세대가 통제하는 세상에서 의욕을 내봐야 별수 없다며 푸념할 따름이다. 그저 부모의 기대대로, 혹은 남들 가는 대로 따라가며 적당히 분위기 맞춰가며 살아가는 무의미함 가운데 찰나의 흥미 혹은 타인에게 부끄럽지 않은 ‘수준’ 유지가 몇 안 남은 흥밋거리가 되는 세태다.
성문종합영어와 수학의 정석 교재 시리즈는 아마 국내 출판도서 중 가장 광범위하게 공유되는 도서일 테다. 어쩌면 성경을 초월할지도 모를 만큼. 부모세대와 자녀세대가 함께 체감 가능한 책이 과연 얼마나 될까 따져보면 정말 그렇다. 적어도 이 시리즈들은 제목만 언급해도 3대가 통용되기 때문이다. 실로 교과서보다 더 막대한 영향력을 가졌을지도 모르고 누구도 우회할 수 없는 청소년기 삶의 가이드라인 같은 교재들이다. 만약 수학의 정석을 소화하지 못했다면 대학 입시는 포기했다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은 반응을 얻게 될 테다. 그런데 정말로 ‘정석’을 벗어나게 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이다운 감독의 단편영화 <민수의 정석>은 주인공 민수가 감행한 ‘탈주’의 기록이다.
◆ 민수만의 정석을 찾기 위한 좌충우돌 모험기록
학교를 휴학한 민수는 선배 정석과 함께 여행을 떠나기로 한다. 정석은 민수가 짜놓은 일방적인 여행계획에 고개를 이리저리 흔들면서도 기꺼이 동행이 되어준다. 민수가 렌터카를 빌려 단출한 일행은 교외의 천문대로 다음 날 아침 일찍 출발한다. 하지만 둘의 여행길은 순탄하지 않다. 정석은 인생 선배답게 이것저것 조언하지만 민수는 짜증을 부리며 그런 충고를 무시한다. 길에서 히치하이킹을 원하는 이방인을 접하자 정석은 그냥 지나치자 말하지만 민수는 머뭇거리다 그가 차에 올라타는 걸 막지 못한다. 다행히 수상한 이방인과 별문제 없이 행선지까지 동행하고, 이것저것 이야기도 나눈다. 하지만 히치하이킹을 하게 된 사연을 풀어내는 이방인에게 민수는 과도하게 반응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행선지에 이방인을 내려주고 여정을 이어가던 중 둘은 일단 밥을 먹기로 한다. 하지만 지갑이 사라졌다. 일행은 이방인을 의심해보지만 확인할 길은 없다. 그런 우여곡절을 겪다보니 민수는 더 예민해지기만 한다. 그는 느닷없이 이동수단인 렌터카를 반납하고 도보 무전여행을 선포한다. 정석은 민수의 급작스러운 변화에 질려버린다. 맞춰주려 노력하지만 대체 뭐가 그리 마음에 안 드는지 자꾸만 자기본위로 계획을 뒤집는 민수와 정석은 각자의 길로 헤어진다. 민수는 무거운 배낭을 짊어진 채 휴대전화 지도 앱에 의지해 홀로 천문대로 향한다. 하지만 지도가 잘못된 것인지 자꾸 산속으로만 들어가게 된다. 그 과정에서 막막하고 외로운 가운데 관객에게 그가 감춰둔 속내를 조금씩 열어 보인다.
관객에게 민수의 상황은 잘 모르겠지만 뭐가 꼬여도 단단히 꼬인 분위기다. 하지만 정말 혼자가 되고 난 뒤부터 그가 직면한 상황이 조금씩 관객에게 전해지기 시작한다. 민수는 지금껏 주변 분위기에 적당히 맞춰가며 학창시절 보던 수학의 정석 교과서처럼 살아왔다. 하지만 이제 한계에 봉착한 상태다. 대학 생활은 공허하고 몇 안 되는 절친 혜지와는 사소한 일로 결별한 상태로 보인다. 아마 존재의 위기 그 자체일 테다. 그 막막함을 우회 혹은 돌파해보려 어렵게 결단한 미지의 세계를 향한 모험 길도 극중 곧잘 스쳐가는 꼼꼼하게 나름대로 꾸며둔 여행 경로와는 어긋나게 전혀 순탄치 않다. 그런 위기의 누적이 극대화되면서 민수는 이제 온통 쇠사슬로 칭칭 묶인 것처럼 사방이 갇힌 형국이다.
◆ 민수만의 사연을 넘어, 지금 청춘세대 비망록
휴학을 저질렀다. 하지만 뾰족한 계획 같은 건 없다.
절친 혜지와는 이제 더 이상 친구가 아니라고 선언해버렸다.
젊어서 고생은 사서 한다지만 넘어지고 뒹굴고 꼴이 말이 아니다.
막막한 심정 누구에게라도 SOS를 치고 싶지만 자존심에 망설이며 시간만 흘러간다.
영화 속 민수의 상태를 요약하면 대충 이렇다.
이렇게 영화 속에서 우리의 민수가 선보이는 해프닝들은 대책 없이 민폐로 보이지만, 조금만 입장 바꿔놓고 생각하면 곧 비슷한 연령대의 청년세대 다수가 인생에서 한번 이상 겪게 마련인 상황에 불과하다. 누구나 각자의 평범한 일상을 영위하다가도 난관에 봉착해 겪어봤음직한 공감이 영화 중반을 경유하며 형성되기 시작한다. 사실 따져보면 민수의 고민이 그리 특별할 것도 없긴 하니.
주인공이 느닷없이 휴학과 여행을 결심한 건 인간관계 탓이 커 보인다. 한 번도 등장하진 않지만 민수가 늘 의식하는 존재가 있다. 베일 속에 가려진 과거의 절친 혜지다. 선배 정석의 말을 듣자면 둘은 각별한 관계였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제 뒤틀려 있다. 그런데 왠지 칼로 물 베기처럼 사소한 문제로 기인한 것처럼 보인다. 그냥 풀면 되지 않을까 싶은데도, 관계에 서툴어져버린 핵가족 세대라 그런지 민수는 그런 선택지를 취하지 못한다. 감정 표현이나 대인관계가 어렵기 때문일 테다. 그냥 눈 딱 감고 먼저 화해의 손짓 한번 날리면 생각보다 혜지와의 관계는 쉽게 풀릴지도 모른다. 히치하이킹으로 렌터카에 올라탔던, 민수와 정석보다 10년쯤 인생선배로 보이는 이방인이 풀어내던 사연이 딱 그렇다. 하지만 민수는 그런 게 가능하다 믿지 못하는 눈치다.
결국 민수는 결단만 하면 될 직항로에 도전하는 대신 계속 변죽을 울리듯 주변에 수소문할 뿐, 먼저 손을 내밀지 않는다. 두렵기 때문에 망설이기만 한다. 자신이 두렵듯 상대도 그럴지 모른다는 공감과 배려에 아직 이르지 못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서 고생을 거듭한다. 산에서 길을 잃고 누군가와 나누던 대화 가운데 민수는 그런 불안을 폭발시키고 만다. 하지만 아직 그에겐 기회가 남아 있다. 자신을 버리고 가버린 줄만 알았던 선배 정석이 돌아와 그를 기다리는 중이다. ‘정석’을 벗어난 민수가 대안적인 ‘정석’을 발견하는 순간이다. 그렇게 고마운 정석이 반가우면서도 그가 여기저기 구르고 뒹굴다 거지꼴이 다 된 자신을 위로하니 애써 센 척하며 별일 아니라는 투로 응하는 모습이 민수답다.
◆ 식상하지 않게 진솔함을 압축한 단편영화의 매력 발견
감독은 물론 서로 교분을 이어온 지역의 영화동료들이 대다수를 점하는 제작진은, 민수가 하루 동안 선보인 시행착오를 그저 영화의 배경으로 녹이는 걸 넘어 동 세대라면 과반이상이 공유할 법한 감정들로 가득 채운다. 주인공이 자신의 경험 부족과 원인 제공으로 겪게 된 오류와 혼란이 당연한 듯 펼쳐진다. 하지만 적어도 다른 길을 출발해보긴 한지라 그 위기는 그저 일상에서 겪는 것들과는 차별화될 수 있다. 민수의 정체된 삶에서 핵심을 차지하는, 그렇기에 오롯이 극복대상이 되어야만 하는 ‘정석’ 교재(교과서와는 다르다!)에 비유된 민수의 모험은 곧 영화를 만든 이들이 녹여내던 청춘세대 ‘송가’처럼 전환된다. 그 끝에서 민수는 순기능만 남은 또 다른 ‘정석’과 함께 한다.
<민수의 정석>은 요즘 ‘학생독립영화’의 주류적인 경향과 닿아있는 작품이다. 그래서 흥미로운 관찰대상이기는 해도 새로운 경향을 발견하기 위한 긴장도는 비교적 낮은 편이다. 하지만 그저 안일하게 답습하는 것과는 분명 다른 결로 다가온다. 자기(세대)성찰적 시선을 탑재한, 해마다 무수하게 양산되는 또래 세대들의 단편영화 중에는 우려되는 측면이 적지 않은데, 이른바 ‘일기장’ 영화 경향이다. 자기의 일기장을 남에게 굳이 공개하지만 실은 보여주고 싶은 부분만 취사선택하는 인스타그램 감성과 ‘통’하는 영화들은 넘쳐나기 시작한 상태다. 이 영화는 그런 경향과는 선을 긋는 단호함의 미덕을 간직한다. 분명 장점이다. 감독 본인의 체험이 겹쳤을 극중 민수의 시행착오는 곧 자신의 치부를 고백하는 감독의 떨리는 필적에 다름없을 터이니.
그와 함께 호오가 갈리겠지만 피식 웃게 만드는 대목도 있다. 어찌 보면 아마추어티를 못 벗어나는 대목일 수 있지만, 엔딩 크레디트에서 추억의 홍콩영화 비디오 말미에 나오던 풍경이 등장한다. ‘B’ 컷 차원을 넘어 배우와 제작진이 함께 노출되는 제작현장 컷들이 마무리를 차지하는바, 일단 이 영화 제작현장이 훈훈한 동의와 격려로 차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순간으로 다가온다. 개별 단품으로 평가하자면 <민수의 정석>은 그렇게 특별하진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영화를 만든 이들의 의도를 이해하려는 자세로 보게 되면 흐뭇하게 관전할 수 있는 단편이다. ‘올해의 단편’을 꼽으라면 망설여지는 건 어쩔 수 없지만, 감독 이름 건 첫 단편영화로는 흐뭇하게 볼 수 있다. 거기에 추가적으로 세대 간 공감 토론과 소통 용도로 알찬 효용이 발견 가능한 작업이다.
<작품정보>
민수의 정석 A Journey to the stars
2022|한국|드라마|21분
감독/각본/편집 이다운
출연 이세령(민수 역), 전희연(정석 역), 이혜림(혜림 역)
촬영 전상진(컬러플러스)
PD 채수연
음악 김빛옥민
동시녹음 정교휘
조감독 채미영
촬영팀 김만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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