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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프랑수아 르네 드 샤토브리앙(1768~1848)은 당신이 무엇을 먹는지 설명하면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다고 했다. 그 사람의 경험, 능력, 학력, 사회성, 재력 등 심지어 삶의 철학과 신체 건강 상태까지 논리적으로 판단가능하다는 것이다. 당시 프랑스는 시민혁명으로 전통적 귀족사회가 붕괴되고 새로운 신분들이 탄생하는 혼돈의 공동체였다. 신분의 태생적 시그널이 용납되지 않은 공동체는 사람들을 구별하는 보편적 시그널이 필요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20세기 후반, 음식 소비패턴은 대중화와 평준화로 더 이상 사람을 구분하는 시그널로 설득력을 잃어간다. 현대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는 개인의 취향과 문화행위형태에 따라 사람들을 구분할 수 있다고 한다. 물자의 풍요사회에서 자동차, 시계, 가방, 의류, 보석, 주택, 여행의 취향 등 가시적 시그널을 통해 당신을 구별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개인의 구별을 넘어 공동체의 구별짓기로는 최근 강남의 모 아파트에서 주택 평수와 직장 등을 공개하며 사윗감을 찾는 전단지를 출입구에 게시한 경우이다. 게시자는 같은 수준의 아파트단지 주민이 현 신분을 유지하는데 여러모로 안전하다고 판단해 각종 정보를 담은 시그널을 전단지로 방출한 것이다. 이 외도 동문, 출신 지역, 인맥 등 비가시적 시그널도 현대 공동체사회에서는 구별짓기의 주요지표로 활용된다. 인간은 근원적으로 자아를 통해 독자적 존재임을 논리적으로 구축하고 공동체 안에서 세력을 확장한다. 미지의 위협적 변수에 대응한 공동체의 불안은 기득권의 안정을 보장하기 위한 필연적 구별짓기의 과정이다.
이러한 논리는 세계가 1일 생활권으로 확장된 글로벌 시대에서 더 복잡한 양상으로 나타난다. 기존의 공동체는 21세기 범세계적 융합 시대에 적합한 세력화를 재편을 할 수 밖에 없다. 차이와 차별, 구별과 구분 무수한 시그널이 공동체 재편의 도구로 이용된다. 극단적인 분열과 분쟁을 야기하는 시그널도 공동체의 선과 악의 경계를 넘나들며 수단으로 활용된다. 난해한 다중적 의미의 시그널이 공동체의 재편을 혼돈으로 몰아간다.
인류가 희망하는 미래사회는 구별 짓지 않고 차별화가 없는 세상이다. 공정하고 평화로운 공동체다. 언어가 달라도, 시그널의 판단에 착오가 발생해도, 심지어 활동반경이 공동체의 경계를 넘을지라도 공동체 존재의 근원이며 필요충분조건인 안전과 안정의 보장은 미래 공동체에도 그 책무는 계속된다. 융합의 시대를 맞이한 글로벌 인류는 국경도, 민족도, 지역도 범세계적 규약으로 평등한 공동체를 설파한다. 기득권 공동체의 세력에 의한 승자독식이 아닌 다양한 형태의 존재가치를 인정하고 더불어 진화하는 글로벌 공동체이다.
세계문명은 글로벌 공동체의 융합을 다양한 시그널로 방출한다. 음식에서부터 의상, 주택, 산업, 문화, 종교, 예술, 학술 등 공동체의 정체성이 융합에 있음을 끊임없이 시그널로 표출한다. 기득권의 전통음식은 퓨전음식으로 포장되고, 의복은 디자인에서부터 소재까지 퓨전화로 대중의 이목을 이끈다. 글로벌 노동시장은 다양한 민족이 조직화된 일터가 되고 다양한 인종의 다문화가족은 늘어난다. 보수와 진보를 가름하기 어려운 융합정치는 민주주의인지 사회주인지 그 경계가 중요하지 않다. 종교는 지역의 전통적 종교관을 포함한 공존을 모색한다.
그럼에도 공동체 융합의 시대는 여전히 험난하다. 논리적으로는 평등·평화·공정의 규약을 선언하지만 공동체의 현실은 종교가 다르고, 성이 다르고, 인종이 다르고, 문화가 다르다는 갖가지 편견을 들어 글로벌 공동체의 희망을 무참히 짓밟는다. 셈법에 따라 공동체 경계를 자유로이 구별하고 공동체의 안정을 위한 규약은 변통한다. 공동체 융합의 시그널은 양면성으로 덧칠한 스매싱으로 전락한다. 과대 포장된 시그널의 지속적인 방출은 융합에 대한 불씨를 숨겨둔다. 빅데이터의 통계적 확률은 나쁜 시그널의 변수로 결과를 예측하기 어렵다.
코리아드림의 스매싱시그널에 유인된 글로벌 노동자들은 열악한 현실적 처우에 꿈의 실현이 녹록치 않음을 원망하고 시그널의 오판을 자책한다. 경북대 지역구에서의 이슬람 사원 설립은 지역공동체의 조직적 저지와 다양한 형태의 폭력을 행사한다. 공동체의 이율배반적 시그널에 농락당한다. 공동체 융합을 위한 이슬람권과 교류는 Win-Win의 경제적 이득을 포함한 존재적 의미와 안정, 안전을 보장한 계약이다.
대구 북구 지역공동체가 보여 준 친절과 합법적 거래는 사원 설립을 시점으로 돌변한다. 공동체의 판단착오를 야기한 양면성의 시그널은 폭력적 구별짓기를 유발하고 융합의 건전성을 훼손한다. 시그널은 그저 소모품이지 정체성과 무관하다고 항변한다. 융합의 공간은 도구적 시그널들로 윤리성도 상실한다. 융합이 미래이고 공동체가 나아가야 할 방향이라면 기존 공동체는 융합의 경계를 먼저 규정하고 불가한 조건을 미리 암시하는 시그널도 보여야 한다.
보험을 가입할 때 흡연이나 음주, 위험한 활동에 따른 사고 등은 보험금 지급이 불가할 수 있음을 미리 고지하는 것처럼 융합공동체라 할지라도 불가한 항목은 비록 성문화된 규약에 어긋나지 않더라도 불가하다는 시그널은 적어도 충분히 인지할 수 있게 들어내야 신뢰할 수 있는 공동체가 갖추어야 할 윤리적 덕목이다. 시그널의 양면성을 이해하지 못한 공동체의 구별짓기로 발생한 폐해는 비록 성문율에 저촉되지 않는다 할지라도 공동체의 불문율을 들어 윤리적 지탄의 대상임을 명백히 한다.
인류학자는 인간이 생물학적으로 나약한 동물이므로 권력을 중심으로 한 공동체형성은 자연스러운 과정이라 설명한다. 그렇다고 힘에 의존한 조직화와 계층화의 당위성을 간과하고 이권에 따른 팬덤으로 카르텔을 형성하여 폭력을 정당시하는 공동체는 묵과할 수는 없다. 먹이인지 미끼인지 알 수 없는 도구적 시그널로 구별짓기한 공동체는 파멸이다. 어설픈 공동체 융합 논리로 건전한 공동체 윤리를 덧칠하지 말라.
현재 융합논리가 미래 공동체의 초석으로 승계된다면 글로벌 공동체를 포기해야 한다. 지상에서의 천국구현이 불가능한 이유와 글로벌 공동체 융합의 실현이 어려운 이유를 반문한다. 영악한 셈법을 멈추고 구별짓기의 카르텔추종을 멈추지 않으면 융합인류의 미래공동체는 성경안의 천국과 같다. 시그널의 양면성은 삶을 더 고단하게 할 것이다. 그저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시그널이 통용되는 공동체, 그만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융합의 시대, 융합이 답으로 제시되는 시대에 시그널의 신뢰를 높이고 더불어 함께 살아갈 수 있는 공동체의 책무를 재정비하여 윤리성을 강화해야 할 시기이다.
박모라 경북대학교 식품외식산업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