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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정부가 화물연대 파업에 대해 ‘업무개시명령’ 발동을 예고하던 지난 11월 28일, 화물연대와 국제운수노련(ITF)이 국제노동기구(ILO)에 개입을 요청했다. ILO는 12월 2일 한국 정부에 ‘Intervention(개입)’이라는 제목의 서한을 보냈고 이를 화물연대와 국제운수노련은 ‘개입 절차 착수’라고 해석했다. 반면 11월 29일과 12월 8일 업무개시명령을 발동한 윤석열 정부는 같은 서한에 대해 ‘단순 의견조회(전달)’라고 해석했다.
<뉴스민>이 서한 내용 파악을 위해 고용노동부에 정보공개를 청구한 결과, 노동부는 ILO에서 보낸 서한이 ‘대외비 문서’라며 비공개 방침을 통보해왔다. 다만 이 서한의 ‘주요내용’을 담았다는 반 페이지 분량의 별도 문서를 공개했다.
‘단순 의견조회’로 규정한 ILO 서한,
‘주요내용’만 봐도 구체적 예시 통한 ‘주의’ 성격
정부가 공개한 ‘ILO 서한 주요내용’에 따르면, ILO는 그간 유사 사례 관련 감독기구의 판단인 ‘결사의자유위원회 진정2602사건’의 내용을 알리며 “자영업 근로자들에게 단체교섭권 등 결사의 자유를 보장할 것을 권고”했던 전례를 거론했다.
또한 “운송서비스 및 유사산업 부문에 대한 업무복귀 명령이 근로자의 결사의 자유를 제한한다고 본 사례를 참고하기 바란다”며 ‘결사의자유위원회 판정례 923’을 서한에 명시했다. 아울러 ILO는 ‘본 사안에 대한 정부의 입장이나 의견을 요청하였으며 정부의 답변은 추후 문제제기 단체에 보내질 것’이라고 안내했다.
정부가 밝힌 ‘주요내용’만으로도 ILO 서한과 정부가 주장해온 ‘단순 의견조회’와의 괴리를 발견할 수 있다. ILO가 기존 판정 사례를 상기시킨 것은 ‘화물연대와 국제운수노련의 문제제기대로 ILO협약 위반일 수 있다’는 의미다. 한국 정부에 ‘주의’를 요망한 것이며, 앞으로 협약 위반 여부를 판정할 수 있다는 예고다.
국제기구의 규범과 판정례가 ‘국가 기밀’인가?
더 자세한 사항은 정부의 전문 비공개 결정으로 인해 당장 파악할 수는 없다. 정부의 비공개 근거는 ‘공공기관의 정보공개에 관한 법률’ 제9조(비공개다상정보) 제1항의 제2호 규정이다. ‘국가안전보장ㆍ국방ㆍ통일ㆍ외교관계 등에 관한 사항으로서 공개될 경우 국가의 중대한이익을 현저히 해할 우려가 있다고 인정되는 정보’이기 때문에 비공개한다는 것이다.
ILO의 이번 서한은 군사 내지 국방에 관한 정보가 아닐 뿐더러 국가들이 외교 협상을 벌이면서 형성된 ‘국가 기밀’에도 해당하지 않는다. 한국의 업무개시명령 제도는 일반 국민도 내용을 알 수 있는 제도이다. ILO의 이번 서한도 이미 존재하는 ILO 협약과 기존에 ILO가 판단했던 내용을 담고 있다. ILO측이 기밀로 유지해야 할 정보가 아닌 데다가 이 정보를 공개한다고 해서 한국 정부가 향후 밟을 수 있는 ILO 절차에서 더 불리해지는 것도 아니다.
국제적으로 사법 분쟁이 있을 경우 상대의 예상을 뛰어넘는 논리나 법리를 꾸리느라 정부가 관련 정보의 일부를 비공개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경우는 명백히 다른 사례다. ILO 절차를 대비한답시고 ‘ILO 자신이 알고 있으며 일국 정부에게 고지까지 한 내용’을 국민들에게 공개 못할 명분은 없다. 오히려 ILO 서한을 공개하는 것이 국민적 토론에 도움이 되고 ILO 조치에 대응하기에 더 유리하다.
그런데도 한국 정부가 ILO 서한을 두고 ‘공개될 경우 국가의 중대한 이익을 현저히 해할 우려가 있다고 인정’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화물연대와 국제운수노련을 ‘국익을 침해하는 적’으로 규정하고, 관련 정보가 그들에게 알려지는 것을 막는 것이 ‘국익 수호’라고 판단하는 것일까. 혹은 정부 스스로 이번 서한을 통해 이미 ‘ILO 협약 위반’이 확정적이라고 여겨 협약 위반 판정이 내려지기 전까지 이를 가리려는 걸까.
윤 정부의 ‘보편적 국제규범’, ‘글로벌 스탠더드’는 공허한 구호
ILO가 한국을 들여다보는 일은 계속될 것이다. 화물연대의 상급 단체인 민주노총과 공공운수노조는 지난 12월 20일 국제노동기구에 진정을 제출하며, 한국 정부가 결사의 자유에 관한 ILO 핵심협약 제87호와 98호, 강제 노동 금지에 관한 29호 협약을 위반했다고 지적했다. 이들 협약은 국회에서 비준됨에 따라 지난 2월부터 국내법과 동일한 효력을 갖는다.
윤석열 대통령은 국제관계에 관한 언설에서 자주 ‘보편적 국제규범’을 언급해왔다. 자영노동자의 결사 자유를 보장하지 않는 것, 그들을 강제로 업무에 복귀시키는 것은 강제노동을 금지하는 보편적 규범을 위반하는 처사다. ILO 협약 위반 논란은 윤리적인 차원에서 끝나지 않는다. 여타 국가의 정부나 기업이 준수하는 협약을 한국 정부가 지키지 않는다면, 국제사회는 한국 정부에 압력을 가하게 되어 있으며 통상 분야에서 불이익이 돌아올 수 있다. 한국 정부가 ILO 협약을 비준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도 한국과 FTA를 맺은 유럽연합(EU)의 압박과 항의에서 나온 것이었다.
윤석열 정부의 업무개시명령과 ILO 협약 무시는 한국의 자칭 보수세력이 자의적 국수주의에 빠져 ‘글로벌 스탠더드’를 어기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노동자들에게도 적용해선 안 될 업무복귀명령을 정부가 ‘자영업자’라고 규정하는 화물연대에게 휘두르겠다는 것은 ‘영업의 자유’조차 침해한다. 이것으로 모자라 윤 정부는 국제기구에게 받은 서한을 비공개 처리함으로써 또 한 번 비민주성을 드러내고 말았다.
김수민 객원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