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수 시인, 두 번째 시집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웃었다’ 출간

시집 낭독회로 연 출판기념회···딸들 위해 선택한 시인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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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은 누수가 시작된 지 이미 오래
고여 있던 당신이란 물줄기는 수시로 솟구치고
나는 기억을 수리하느라
허둥대기 일쑤입니다

노래가 젖고 쓴웃음이 젖고
훔쳐보던 무당벌레 등이 다 젖었지만 젖지 않는 건
잘 마른 푸른 무청 같은 당신 웃음뿐

기억은 외피가 아니라 내피여서
늘 체온이 묻어 있는 것이어서
나는 떨칠 수가 없었나 봅니다

이 순간도
기억 하나를 또 쌓는 중인지도 모르지만
위로처럼 기억이란

우리가 눈 시리도록 바라보았던 동백처럼
어느 순간 시들지 않고도
툭, 떨어질지도 몰라서
그렇게 맵게 피워 올리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 ‘동백꽃이 툭,’ 전문

▲정동수 시인 (사진=정용태 기자)

지난 26일 대구 중구 음악다방 쎄라비에서 성주문학회 회장 정동수 시인의 두 번째 시집 출판기념회를 겸한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웃었다> 시집 낭독회가 열렸다. 지난 9월 ㈜천년의시작에서 펴낸 이번 시집은 표제시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웃었다’와 ‘동백꽃이 툭,’을 비롯한 시 53편을 4부로 나눠 실었다.

김수상 시인 사회로 열린 낭독회는 참여자들이 돌아가며 시편을 읽는 낭독회와 배창환 시인의 작가 대담, 작가 자선시 ‘후평리 1168번지 산벚나무’ 낭독 등의 순서로 두 시간 동안 진행됐다. 이번 행사에는 김용락, 배창환, 노태맹 시인과 성주문학회, 밀양문학회에서 참여한 문인 및 독자 약 40명이 참여했다.

저 나무가 저기 서 있게 된 까닭은 알 길이 없습니다
다만 그 나무 아래에서 발화되는 연애사들이
피어나는 꽃만큼 흐드러지곤 했답니다

그 꽃을 보고 동하지 않는 남녀가 있었다면 청춘이란 게
얼마나 한심하였겠냐고

꽃그늘엔 가지 물 트는 소리 같은 것이 끊이질 않았는데
부끄러운 꽃잎들만 얼굴을 돌리기도 분분히 지기도 했답니다

그 소문이 멀리 하늘에까지 전해져
별들이 내려오곤 하는데 오기까진 너무 먼 거리여서
빈 가지뿐이었지만 오래도록 가지에 앉아 무슨 분 냄새 같은 것이라도
남아 있을지 몰라 코를 킁킁거리고 있었답니다

지금 그 청춘 남녀들은 봉우리로 누워
두런두런 꽃 시절을 나누겠지만
아직도 봄은 그 가지에 목매어 시들어 가고 있습니다

부리가 닳도록 우짖는 저 새는 어제의 새가 아니며
염속산을 넘어온 바람도 어제의 바람이 아니고
그 바람 바람에 흔들리며 피던 사람들도 어제의 사람이 아닌 사람들

새가 우니 봄도 아픈 줄 알았지만
꽃이 지고 우리가 지는 줄은 모르고 있었습니다

– ‘후평리 1168번지 산벚나무’ 전문

정 시인은 시 형식을 빌린 시인의 말에서 “버리는 일로 나는 시작된다 / 태어나 처음 한 일도 울음을 버리는 일이었다 // 어떤 일은 절로 버려졌고 / 어떤 일은 의식적으로 버렸다 // 생강꽃이 피어나고 / 마지막 한 송이가 지기까지 버리지 못한 흔적들 / 닭은 새벽마다 목청을 높이지만 / 그럴 수 없다는 내 목청이 더 높을 때가 많다 // 생강나무가 결국 꽃을 떨구듯이 / 달이 어느 순간 빛을 버리듯이 // 버려야 하는 것을 그린다”고 삶을 고백했다.

▲음악다방 ‘쎄라비’에서 열린 정동수 시집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웃었다’ 출판기념회 (사진=정용태 기자)

성주문학회 배창환 시인은 “그는 가야산 부근 산골에서 나고 자라 도회지로 떠났다가, 고향의 흙과 바람, 물과 별, 그리고 무수한 생명들의 부름에 답하여 귀향한 농부 시인이다. 그가 첫 시집 <새를 만났다>에서 땀내 달콤한 성주 참외를 ‘누이의 이마처럼 맑다'(‘소금 열매’)고 노래했을 때 나는 그 놀라운 직관과 깊은 사유, 묘사력을 찬탄했는데, 벗할수록 참 과묵하고 솔직한, 천생 흙의 시인”이라고 추천의 글을 썼다.

권성훈 문학평론가는 “정동수의 이번 시집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웃었다>는 바로 자신이 새로운 언어로서 세계를 발명해 놓은 감정의 언어로 집약되어 있다. 거기에 ‘가슴에 표적을 그리고 / 표적으로 살아왔’던 시인의 삶을 형성화면서 ‘야성의 눈빛이 빛 속에서 빛’을 발아시킨 정―산물”이라고 평했다.

현재 성주문학회 회장을 맡고 있는 정 시인은 경북 성주 출생으로 <시와문화> 신인상으로 등단하여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앞선 시집으로 <새를 만났다>(두엄, 2018)가 있다.

정용태 기자
joydrive@newsmi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