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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시청년들의 시골정착기
김은영 & 황영, 두 감독은 대구에서 독창적인 비주얼이 돋보이는 일련의 로맨스 / 판타지 영상 작업을 따로 또 같이 진행하며 주목받아 왔다. 김은영 감독은 <고추가 사라졌다! 2013> 와 <중고, 폴 2015>을 선보였고, 황영 감독은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2017>로 깊은 인상을 남긴 바 있다. 그런 그들이 어느 순간 경북 의성군으로 이주를 감행한다. 하지만 이들의 의성 행은 흔히 시골로 들어갈 때 연상하는 ‘귀농’의 형태는 아니었다. ‘도시청년 시골파견제 사업’이 제공하는 창업자금 지원을 활용하기 위해 정착지역을 물색하던 두 감독은 ‘하늘이 뻥 뚫려 있어서’ 의성을 선택했다고 한다.
둘은 ‘고라니북스’라는 이름으로 영상과 디자인, 창작도서를 출판하는 활동을 의성에 정착한 후 활발히 진행 중이다. 의성에 연고가 없는데도 가능성을 보고 눌러앉은 이들은 경북 곳곳에서 모여드는 일감 덕분에 ‘기회의 땅’을 발견했다고 말한다. ‘고라니북스’ 출판사가 발간한 <사무실 판타지>, <납작 엎드릴게요>, <유령선배> 등의 서적은 청년세대가 공감할 수 있는 내용과 아름다운 디자인 이미지가 어우러지는 공통분모를 띄는데, 이는 두 감독의 영상 스타일과도 연결되는 지점이다.
출판사를 운영하고 있지만 이들의 본업은 영화/영상작업에 있다. 관련해서 의성군을 배경으로 한 ‘로컬’ 영화를 잇달아 선보이고 있다. 2020년 영화진흥위원회 사전제작지원 프로젝트인 숏-폼 선정 작품이었던 <평야의 댄서>에 이어 ‘메이드인 의성 영화’ 두 번째라 할 신작 <눈을 감고 크게 숨 쉬어>가 경북콘텐츠 코리아 랩 콘텐츠 업 공모대전을 수상하며 제작지원을 받은 데 힘입어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 의성군 로컬 영화의 본격화를 선보이다
전작 <평야의 댄서>는 뮤직비디오의 확장형에 가까운 형식을 취한 10분이 채 안 되는 짧은 단편이다. 그에 비해 <눈을 감고 크게 숨 쉬어>는 보다 본격적이다. 넉넉할 순 없겠지만 경쟁 치열한 광역시에 비해 상대적으로 의욕 있는 청년들에게 이모저모 잔잔한 지원책이 알고 보면 제법 쏠쏠한 경북의 상황을 잘 파고든 덕분에 이번 작품은 규모가 많이 커졌다. 단편의 한계선에 가까운 39분 러닝타임을 가진 이들의 의성 정착 후 두 번째 작품은 ① 단순히 지역영화인들이 만들었다거나, 혹은 ② 지역을 배경으로 찍었다거나 하는 수준을 아득히 뛰어넘는다. 지역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자신들의 작업이 로컬영화로서의 정체성을 추구한다는 것을 명확히 규정하고 도전하려는 자세다.
영화의 주인공 ‘윤이’는 권위적인데다 폭력성 다분한 아버지 밑에서 (언니와 함께) 어릴 적부터 눈치만 보며 살아왔다. 그러다 보니 뭐 하나 자신감을 갖고 임해본 적이 없다. 나이는 점점 차고 남들 다 하는 취업전선에 임해보지만 자기 의지대로 뾰족하게 도전해볼 생각도 못한다. 취업준비에 지치면 도망치듯 고향 의성군 명물 사과농사를 거들며 하루하루 그냥저냥 보내는 중이다. 이제 윤이는 무엇이라도 시도해봐야 할 때다. 그는 어릴 적 꿈이었던 배우가 되겠다는 목표를 떠올리고 승부수를 던지려 한다. 상대적으로 늦은 나이지만 지금이 아니면 안 될 것 같기에 도전해보려는 중이다.
윤이는 이웃의 과수원 일을 거든 뒤 기분전환 겸 동네 체육센터 수영장에 들른다. 농번기에 대낮이라 아무도 올 리 없으니 혼자 전세를 낸 줄 알았는데 누가 또 들어온다. 깜짝 놀라 살펴보니 어릴 적 소꿉친구 ‘동구’다. 오랜만에 그와 재회한 윤이는 동구와의 어릴 적 추억들을 떠올린다. 둘은 알고 보니 제법 엮이는 구석이 많은 관계였다. 이제 내일이면 오디션 보러 가야 하는 윤이는 동구네 과수원에서 동구를 연습상대로 대본 연습을 해본다. 윤이의 머릿속에서는 어느새 과거와 현재, 꿈과 현실을 오가는 장대한 모험이 펼쳐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제 다음날 윤이가 감행하려는 도전 앞에는 당연히 여러 가지 암초와 함정이 도사리고 있다. 난관을 가족과 친구들의 도움으로 하나둘 돌파해내며 윤이는 마음 한구석은 고향에 남겨두고 다시 돌아올 여지를 남긴 채 마침내 필사의 도약을 감행하게 된다. 비장한 각오와 함께 고향을 잊지 않으려는 듯 특산품 사과를 베어 물고 손으로 쪼개며 윤이는 카메라 앞에 당당하게 선다.
◆ 청년세대가 지역에 뿌리내리는 과정과 함께하는 영화의 힘
영화에 참여한 이들은 두 감독의 오랜 동료인 대구지역 독립영화인들, 그리고 로케이션 현장 주민들이 혼합된 진용이다. 작품 속에 등장하는 공간들은 당연히 의성이란 지역의 아이덴티티를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만든다. 이 영화는 의성군 홍보영화는 아니지만 본 작품을 보고 나면 의성의 특징적인 공간들이 관객의 뇌리에 각인되고 한번쯤 들렀으면 하는 인상을 남긴다. 촬영을 맡은 고현석 감독의 원경 처리가 빛을 발하는 순간들이다. 전작 <평야의 댄서>가 경북 3대 평야라 불리는 의성 안계평야의 풍광을 제대로 담아냈다면, 이번에는 지역의 특산품인 사과농사 과수원이 본격적으로 다뤄진다. 등장인물 동구가 윤이에게 ‘당도가 다르다!’며 자랑하는 영화 속 장면을 보고 있자면 저절로 사과가 동해지는 느낌이다. (어쩌면 세 번째 작품에선 또 다른 지역 특산품 마늘이 부각되지 않을까 상상해본다)
하지만 영화는 그저 지역을 목가적이고 아름다운 시골풍경으로만 묘사하진 않는다. 영화 속 인물들의 꿈과 현실은 농촌 지역의 상황과 한계를 여실히 보여준다. 반세기 전 20만에 달하던 의성군의 인구는 현재 5만 남짓할 정도로 줄어든 상태다. 여러 연구 자료에서 30년 내로 ‘지역 소멸’ 위기지역으로 분류되었을 정도다. 게다가 경북 내륙의 보수적 관습 때문에 남녀 성비가 불균형하고 고령화가 진행되어 위기감이 커졌다. 그래서 근래 적극적으로 도시인구의 귀향과 귀농을 전향적으로 유치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기도 하다.(그렇게 두 감독을 낚은 셈이다)
그렇게 단지 지원제도 수혜를 얻기 위해서나 근사한 배경으로 삼기 위해 지역을 소재로 차용하는 것을 넘어서는 본격 로컬영화로서의 색채는 이 영화의 주인공들 간 일상 대화 속 지나가는 한두 마디에까지 일일이 녹아들어 있다. 엔딩 크레디트에 떠억 하니 올라오는 ‘사투리선생님’ 역할 표기나 서울 중심 사회의 지역차별 악습 묘사, 그리고 폐쇄적인 ‘작은 사회’의 고질병까지 영화는 꼼꼼히 풍경화처럼 담아낸다. 한국독립영화 하면 연상하게 될 극단적 폭력이나 섬찟한 표현이 난무하지는 않지만, 두 감독은 굳이 없는 일처럼 애써 감추지도 않는 태도를 견지하고 있다. 윤이의 아버지로 대표되는 시골의 폭력적 가부장제는 꽤 살벌하게 묘사된다. 왜 윤이가 배우의 꿈을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과감히 나서지 못했나에 대한 단서는 유년시절 회상에서 단초로 풀려진다. 이를 저지하고 방어하는 데 연령을 초월한 상대적 약자-여성연대의 위력이 발현되는 것 또한 단호하지만, 사실적으로 그려낸다. 수십 년 축적된 권위를 무너뜨리는 건 지난한 숙제일 수밖에 없다.
◆ 두 감독의 스타일을 고수하되 문제를 회피하지 않는 영화
그렇게 지역사회의 문제점을 하나씩 짚어가지만, 애정 어린 시선을 전제한 감독들의 시선은 한계에도 불구하고 고향을 사랑하고 지켜나가려는 이들이 펼치는 39분 동안 내내 유지된다. 영화는 굳이 급브레이크를 밟거나 가속페달을 누르는 무리수를 두지 않는다. 그 대신에 감독들의 장기인 따스하고 오밀조밀한 구성을 십분 발휘해 마치 아기자기한 동네 독립책방 구경하는 느낌으로 이야기를 이끌어간다. 영화 내내 화면 한구석을 점유하던 지역 특산품, 껍질째로 어우러진다.
두 공동감독의 작품 경향은 사회비판과 사적 일기장, 흔히 젊은 독립영화감독들이 고민하는 양자택일에서 사뿐하게 벗어나 있다. 이들은 영화제 수상에 목을 매고 자연스런 단계처럼 장편영화로 데뷔해 극장에서 개봉하는 고정화된 코스를 고집하진 않으려는 듯 보인다. 그 대신에 지역에 뿌리내리고 동네에서 이것저것 자신들이 활용될 법한 요소들을 찾고, 지역사회에서 제 몫의 역할을 수행하면서 가늘고 길게 이어가려는 지향을 드러낸다. 이들의 영상작업은 그런 취지가 맞는 거라면 철저히 합목적적 관점에 부합된다. 작가주의 취향을 고수하기보단 웹 드라마나 뮤직비디오 등 다양한 실험을 통해 자연스럽게 도전하길 선호하는 것처럼 보인다.
김은영, 황영 두 감독은 자신들의 전방위 작업을 통해 그들이 자리 잡고 근거지를 구축한 동네의 이야기와 풍경을 기록하고 재현하는데 명백한 목표를 설정하고 차근차근 수행해나가는 중이다. 남들 다 우수수 따라가는 트랜드에 예민해지는 대신, 자신들이 발 딛고 선 상황에 대한 맞춤형 문법과 이미지를 모색하고 속속 선보이는 그들의 도전이 일정한 시간을 경유한 뒤 어떻게 지층을 형성하고 참고해야 할 사례를 그려낼지 지켜보는 건 무척 흥미로운 일이다.
<작품정보>
눈을 감고 크게 숨 쉬어 Breathe
2022|한국|드라마|39분
감독 김은영, 황영
주연 이세령(윤이 역) 곽민규(동구 역)
출연 박재선(윤이언니 역), 박일용(윤이아버지 역), 김남련(윤이할머니 역),
이미정(동구엄마 역), 채원(어린 윤이 역), 주백호(어린 동구 역)
특별출연 송예은, 전희연, 유은경, 유은진
PD 윤진 촬영 고현석 편집 고현석, 김은영 기타연주 심상명
사투리선생님 이세령
기획 고라니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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