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선우] 왜 그녀는 악마가 되었을까,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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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차림은 자신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마케팅 수단으로 통한다. 인간관계에서 첫인상은 강하게 남고 단정한 옷매무새는 기품을 뜻한다. 미국의 패션 컨설턴트 존 T.몰로이는 저서 <성공하는 남자의 옷차림>에서 이렇게 말했다. “직장에서 성공하려면 지식이나 기술보다는 외모를 가꾸는 데 투자하라.”

그는 저서에서 다양한 옷차림 효과를 각종 실험과 통계수치로 제시하며, 경우와 상황에 따라 옷을 제대로 입어야 한다는 말을 구체적으로 설파했다. 드레스코드를 개념화해 상황에 따른 구체적인 의상 지침을 만들어낸 것이다. 수십 년 전에 다양한 정치·문화적 함의를 담아내는 저자의 미시적 안목이 놀랍다. 물론 직장의 성공이 외모 관리로 직접 연결되지는 않겠지만 외모를 사회적 경쟁력으로 보는 사람은 많다.

패션잡지 보그(Vogue)의 편집장 안나 윈투어(1949년~)는 세계 패션계 거물이다. 1988년부터 35년째 미국 보그 편집장을 맡으면서다. 올해로 일흔 두 살인데 여전히 현직이다. 1995년부터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이사를 역임하고 2013년부터는 미국 보그를 소유하고 있는 대중매체 콘데 나스트의 예술부장으로도 일하고 있다. 열다섯 살에 학교를 그만두고 백화점에서 인턴으로 경력을 쌓고 각종 잡지사의 편집 보조로도 일했다. 첫 취업에서 미국 보그의 편집장까지 걸린 시간은 24년이다.

안나의 영향력은 막강하다. 말 한마디에 4대 패션위크(뉴욕, 런던, 밀라노, 파리)의 순서가 바뀌었고, 안나가 도착하지 않으면 중요 패션쇼는 시작조차 하지 않았다. 톰 포드, 존 갈리아노, 마크 제이콥스 등 신인 디자이너를 발굴하고 지원하기도 했다. 인맥은 배우 시에나 밀러와 사라 제시카 파커, 휴 잭맨, 니콜 키드먼, 케이트 블란쳇 등 할리우드 스타부터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과 미국의 제67대 국무장관을 지낸 힐러리 클린턴 등 정치인까지 절친하다. 넓은 인맥으로 사교계에서도 유명인이다. 외교적 성과가 없는데도 미국의 유럽지역 대사직 하마평에도 올랐다.

안나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에서 세계적 유명 패션잡지 런웨이의 편집장 미란다 프리슬리(메릴 스트립)의 실제 모델이다. 안나 밑에서 비서로 일한 로렌 와이스버거가 경험을 바탕으로 쓴 동명의 소설이 원작이다. 영화 속 미란다는 냉정하고 강경하게 그려진다. 안나 역시 추진력이 강한데 같이 일하는 직원들에게도 본인과 비슷한 역량을 기대하는 탓에 논란이 빚어지는 것으로 알려졌다. 직원의 복장 규율을 정할 정도로 외모지상주의 성향이 매우 강하고 선민사상과 엘리트주의가 심하다. 영화는 동명의 베스트셀러 원작소설보다 낫다는 평가를 받는다.

명문대를 졸업한 앤디(앤 해서웨이)는 저널리스트의 꿈을 안고 뉴욕에 온다. 하지만 언론사 취직은 실패하고 런웨이의 편집장 비서로 일하게 된다. 미란다는 과중한 업무와 선을 넘은 잔심부름으로 앤디를 괴롭힌다. 자신이 입는 코트나 핸드백을 아무렇게나 내던지고, 잦은 커피 심부름을 완벽하게 해내야 한다. 전화 응대는 정확하고 간결해야 핍박당하지 않는다. 태풍 속에서도 쌍둥이 딸의 공연을 볼 수 있도록 제트기를 수소문하라면서, 해리포터 미출간본을 구해오라는 등 온갖 잡다하고 황당한 일까지 시킨다.

어렵게 구한 직장에서 행여나 잘릴까봐 그는 매사에 애를 태운다. 사생활을 포기해야 하는 수준의 과중한 업무를 척척 해낼수록 앤디의 삶은 달라진다. 패션산업 종사자답게 명품 의류와 멋진 화장으로 자신을 치장한다. 어느새 자신을 무시하는 선배도 밟고 올라갈 역량도 갖춘다. 하지만 남자친구와 관계는 흠집이 나고 친구들과 사이도 멀어진다.

결국 앤디는 나이젤(스탠리 투치)까지 배신해가며 자신의 자리를 지키는 미란다의 비서를 그만둔다. 이후 꿈을 이루기 위해 언론사 뉴욕 미러에 면접을 본다. 면접관은 평판 조회를 하려고 미란다에게 쪽지를 남겼는데, 미란다가 친필로 팩스를 보내왔다. “그녀는 내게 가장 큰 실망을 안겨준 최악의 비서다. 그리고 그녀를 채용하지 않으면 당신은 멍청이다.”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는 신입사원의 고군분투로 해석된다. 대학을 갓 졸업한 사회초년생과 그에 대비되는 괴팍한 상사의 설정 때문이다. 다만 주인공 앤디가 인턴으로 출근하게 된 회사란 우리가 보통 회사라는 단어에서 떠올리게 되는 평범한 회사가 아닌 패션잡지사다. 미란다는 말 한마디로 전 세계 패션산업을 좌지우지할 정도의 영향력을 지녔다. 앤디는 영화 초반 수습사원의 우여곡절을 거친 뒤 능력을 인정받는 비서가 된다. 하지만 누군가를 희생시켜야 하는 상사의 가치관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그만둔다.

영화의 무게중심은 끝까지 청년의 애환으로 끝까지 유지된다. 앤디를 핍박하는 직장상사 미란다를 악의 축으로 설정하면서 발생하는 필연적 귀결이다. 영화는 난데없이 앤디의 언론사 취업을 미란다가 도와주는 전개를 통해 서로 마음을 열며 이해하는 서사를 끼워놓는다. 관객이 미란다의 배려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다. 이유는 앤디와 미란다의 정서적 교감이 켜켜이 쌓여 관객들에게 감정이입을 위한 충분한 알리바이가 제공된 덕분이다. 다만 미란다의 행태에 분노만 한다면 미란다가 사리사욕만 챙기는 사악한 악마로 비춰질 것이다. 그렇다면 미란다의 팩스가 그다지 큰 감흥을 안기지 못할 수밖에 없다.

미란다는 소신 있게 언론사에 지원한 앤디를 보고 흐뭇한 미소를 짓는다. 악마같이 일하는 패션잡지 여성 편집장을 영웅이라고 대변하는 게 아니다. 미란다의 실제 모델 안나 윈투어가 패션에 대한 남다른 열정과 책임을 갖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그는 편집장을 맡기까지 오랜 시간을 보냈고 편집장을 맡으면서는 전례 없는 과감한 혁신을 시도했다. 새로운 여성상의 독자를 타깃으로 삼아 패션 업계에 변화의 바람을 일으켰다. 기존 패션 잡지와 다르게 패션 그 자체보다는 라이프 스타일에 초점을 맞추려 했다.

그는 잡지 커버 제작부터 기존 틀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방식을 택했다. 기존에는 유명한 모델의 얼굴이 커버를 장식했다면, 보그는 덜 유명한 모델을 섭외해 전신을 담은 사진을 커버로 내세웠다. 얼굴보다는 스타일이 돋보이도록 한 것이었다. 또 명품 브랜드 의류만 내세운다는 전통을 깨고 저렴한 기성복과 명품 브랜드 의류를 조합해 새로운 트렌드를 탄생시켰다. 패션 산업 전반을 부흥시키고 소비자들의 취향을 이끌 줄 아는 책임과 능력이 있는 사람이다. 이런 그가 냉담하고 까다로운 성격의 극적 인물화된 모습의 단면으로 비춰지는 건 공정하지 않고 공평하지 않다.

손선우 전 영남일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