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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에서 5년째 살고 있는 여성 활동가 채혜원은『혼자가 아니라는 감각』(마티,2021)에서 “‘독일 정도면 성평등한 국가’라고 믿는 이들을 정말 많이 만났다”라면서, 독일의 실상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독일 남성들은 여성 납치ㆍ강간ㆍ살해가 멕시코에서나 일어나는 일로 치부하지만, 정작 독일에서는 72시간마다 ‘여성 살해’가 발생한다. 한 해에 100명 넘는 여성이 전남편이나 이별한 남자 친구에게 살해당하는 독일은 유럽에서 여성 살해 건수가 가장 높은 나라 가운데 하나다.
개별 국가의 문화적 특성은 전 지구적인 여성 살해를 설명해주지 못한다. 거개의 ‘안전 이별’ 범죄는 남자가 저지르는데, 원인은 남자의 완력이 여자보다 압도적이기 때문이다(이 이유밖에 다른 이유가 있을 성 싶지 않다). 개별 국가의 문화적 특성이 무시되어야 하는 또 다른 이유는 어느 나라에서나 사랑은 등가교환이기 때문이다. 축복받은 결혼이란 ‘교환이 잘 된 것’을 뜻하고, 선남선녀란 ‘어느 쪽도 기울지 않는 관계’를 가리킨다. 두 사람이 주고받은 교환제가 경제든 정념이든, 사랑은 결코 1대 1 교환이 아니다. 그런데도 사랑을 등가교환이라고 믿는 것이 문제다.
사랑은 어느 한 편이 어느 한 편보다 더 주게 되어 있거나 덜 받게 되어 있다. 김소월ㆍ한용운 등 무시무시한 서정시의 대가들이 설파하는 것도 바로 ‘사랑은 비등가’라는 교훈이다. 유치환은 이렇게 읊었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행복」) 이 시구 어디에도 사랑은 등가여야 한다는 암시는 없다. 사랑은 더 많이 받는 사람이 있고, 더 많이 주는 사람이 따로 있는 ‘기우뚱한 균형’이다. 안전 이별 범죄는 ‘왜 너는 내가 준만큼 주지 않느냐’, ‘내가 준만큼 돌려 받겠다’는 심보에서 나온다. 이런 생각은 사랑이 비등가라는 것을 알지 못하거나, 알더라도 수락하기 힘들기 때문에 생긴다.
“사랑은 내가 줄 수 없는 것을 주는 것” 혹은 ”사랑은 내게 없는 것을 주는 것”이라는 알쏭달쏭한 전언이 있다. ‘그것’이 무엇일까? 그것(X)을 짚이는 대로 꼽아보자. 먼저 이상성욕이 있다. 예컨대 자신을 사랑한다는 B에게 A가 “너의 오줌을 줘, 너의 오줌을 먹고 싶어”라고 말하면 B는 선뜻 A에게 오줌을 줄 수 있을까? B는 생리적인 현상에 따라 생겨나고 배출하던 오줌을 한 번도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으므로 내 것이 아니다. 게다가 그것은 단연코 A에게 주고 싶은 게 아니다. X인 것이다.
다음으로, 자신을 사랑한다는 A에게 B가 “나를 사랑한다면 너의 종교를 버리고 나와 같은 종교를 믿어. 당신하고 영원히 같이 있고 싶은데 죽어서 당신은 극락가고 나는 천당 가면 안 되잖아”라고 말하면 A는 그럴 수 있을까? 사랑은 교환이라고 굳게 믿어온 A의 발목을 잡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종교는 결코 사랑이나 결혼의 교환제가 될 수 없다는 신념이다. 다시 말해, 이렇게 생각하는 A의 사고를 지배하는 것 역시 사랑은 교환이라는 것이다. 결국 A는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끼리라도 교환할 수 있는 게 있고 없는 게 있다”라는 구실을 들어 자신의 X를 지킨다.
마지막으로 죽음을 꼽자. 연인들은 “죽도록 사랑한다”, “목숨을 바쳐 사랑한다”, “내 생명보다 더 사랑한다”라는 말을 예사로 한다. 연인들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라면 내가 대신 죽을 수도 있다”라는 맹세를 밥 먹듯 하지만, 그것을 입증할 기회 자체가 좀체 없다. 그렇다고 해서 그런 기회가 전혀 안 생기는 것도 아니다. 상대방이 이별을 하자고 할 때야 말로 자신의 맹세를 입증하기 딱 좋은 기회를 잡은 것이 아니겠나? “당신 없으면 나는 죽어”라는 달콤한 말을 되뇌었던 사람들. 그런 사람들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자신의 죽음, 곧 내가 줄 수 없고 내게 없는 X를 선사할 수 있다. 하지만 이별을 통보받은 남자가 “선영아, 사랑해!”라면서 칼로 자신의 배를 찌르고 죽는 일이라고는 없다. 이별을 통보 받은 남자들은 자신의 배가 아니라 여자의 배를 찌른다. “선영아, 사랑해!” 너의 X 따위 주지 않아도 좋아. 우릴 죽이지만 말아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