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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아픈가 보다 /
너무 사랑하면 눈이 멀어 /
날개가 돋는다 /
나는 공중을 헤엄치며 /
당신 쪽으로 간다 /
주저앉아 오래 울어 /
송진처럼 굳어진 자리 /
산 하나를 다 업고도 /
내 몸은 가볍게 출렁인다 /
바라지 않는 마음이여 /
눈 뜨고 꽃잠 든다
– <나비> 전문
8월말 네 번째 시집 <물구라는 나무>를 출간한 김수상 시인이 18일 대구 중구 음악다방 쎄라비에서 시집 낭독회를 열었다. 시집은 표제시 ‘물구라는 나무’와 ‘나비’를 비롯한 신작시 58편을 4부로 나눠 싣고, 김문주 문학평론가(영남대 국문과 교수)의 해설 ‘구원으로서의 시 쓰기와 포월(包越)의 시학’을 달았다.
김수상 시인은 시인의 말에서 “장식과 힘을 빼고 쓴 시들이라서 맛이 없을 것 같다 / 그러나 이것도 사랑이라고 / 부끄럽지만 세상에 내보낸다 / 사랑은 또 이렇게 갑자기 왔다가 서서히 죽어간다”라고 적었다. 이어 첫 번째 시 ‘업(業)’에서는 시를 ‘낳는 일’로 정의하고 ‘열에 아홉은 실패’지만 ‘나는 시인(詩人)이다’라고 선언했다.
참 희한한 나무가 있습니다 /
이 나무는 세계를 다시 세웁니다 //이 나무가 되면 //
꼭대기가 바닥이 되고 /
바닥이 꼭대기가 됩니다 //하늘이 땅이 되고 /
땅이 하늘이 되지요 //높아 있던 건 낮아지고 /
낮아 있던 건 높아집니다 //전도몽상의 세계가 뒤집혀 /
잠시 잠깐 진리를 엿보게 됩니다 //기막힌 일들이 일어나면 물구나무를 서보고 싶다 /
억울한 일들이 일어나면 물구나무를 서보고 싶다 /
당신이 미워질 때 물구나무를 서보고 싶다 //물구라는 나무가 되지 못해서 불구가 된 나무 /
오래된 피가 더럽습니다 //머리를 열심히 땅에 박습니다 형벌처럼 /
얼굴이 벌게지는 것은 /
어리석은 나를 부끄러워하기 때문입니다”
– <물구라는 나무> 전문
김문주 평론가는 “김수상의 시들에서는 시인이 고스란히 배어나온다. 시인의 삶의 형편과 내밀한 감정들이 그의 시편들에 편편히 새겨져 있다. 그의 시들을 따라 읽어가다 보면 그와 오랫동안 동행한 듯한 느낌이 든다”며 “슬픔을 견디고 삶을 살아내게 하는 힘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삶의 쓰나미들이 덮쳐오고 격한 정념을 치를 때면 그는 조촐한 공간에서 울분과 자괴와 환멸의 감정들을 복기하며 이들을 시의 언어로서 안쳤을 것”이라고 말했다.
십 년도 더 지났는데 자꾸 생각난다 /
형편이 어려워질 때마다 수정동 고관이 눈앞에 나타나는 것이다 /
밥벌이 때문에 가기 싫어도 할 수 없이 내려간 부산 /
매트리스 하나 겨우 들어가는 여인숙을 개조한 달셋방 /
나 같은 사내들이 혼자 사는 곳 /
맞은편 초량의 산복도로엔 벚꽃이 한창이었다 /
두고 온 어린아이들 생각에 /
물에 맨밥을 말아 먹어도 목이 막혔다 /
상조회사에서 일을 마치고 돌아오면 /
건너편 초량의 산꼭대기 집들의 불빛을 부러워했다 /
피어나는 산벚의 분홍 구름 떼 /
꿈인 듯 생시인 듯 그때는 담배를 참 많이도 피워 댔다 /
인생은 괴롭다는데 나도 빨리 구름처럼 사라지고 싶었지 /
순서를 기다리던 공동 세탁기 /
그래도 옥상에 널린 사내들의 빨래는 깨끗하였다 /
초량에는 돼지갈비 골목이 있고 /
찌그러진 냄비에 끓여주는 감자탕 집도 있었다 /
고관에는 오래된 목욕탕 굴뚝만 아득히 높았고 /
고관(高官)도 대작(大爵)도 볼 수 없었다 /
흘러가는 흰 구름, 흘러가는 산벚의 연분홍 구름들, /
흘러가는 초량의 빽빽한 가난들, /
고관의 달셋방 옥상에서 바라본 초량의 산복도로 산벚은 /
불에 덴 자국처럼 두고두고 잊히지 않는다 /
다시 가난해질 때마다 나는 고관의 달셋방 옥상을 생각한다 /
나빠지려고 할 때마다 고관 옥상의 흰 빨래를 생각하는 것이다– <고관(古館)> 전문
‘사드 반대’ 시인으로 알려졌던 그에게 애증이 교차하는 고장 성주는 ‘참외의 시간’, ‘성주대교 건너편 여름 구름은 이 세상 구름이 아닌 듯’, ‘성밖숲 왕버들’, ‘카페 할리스 북쪽 창가에서 바라본 풍경 스케치’ 같은 작품에 담겼다. 시인의 전작에서 볼 수 없었던 ‘요가’를 소재로 한 ‘영웅좌(英雄座)’, ‘나무 자세’ 같은 작품과 함께 그의 외손녀에게 주는 시 ‘한 다리를 더 건너면-리유(吏洧)에게’도 눈에 띈다.
여기서 한 다리를 더 건너면 /
다른 마을이 나온다 //이 마을에서는 화나고 속상한 일이 많았는데 /
다리를 건넌 마을은 예쁘기만 하다 //이 마을은 이미 저녁이 오는데 /
오므리고 있는 마을은 /
하나부터 열까지 피어날 것뿐이다 //오므린 손가락 /
오므린 입술 /
부챗살처럼 잘 접힌 꿈들 //잎이 피듯 /
오므린 것들은 애쓰지 않아도 /
저절로 펼쳐진다 //피어나기 전에, /
인생의 슬픔을 알기 전에, /
철들기 전에. //실컷, 여린 잎의 잠을 자두렴 //
말을 배우기 전에 노래를 먼저 배우는 /
오므린 그 마을은, //몰라서 아름다운 마을”
-<한 다리를 더 건너면-리유(吏洧)에게>
김수상은 1966년 경북 의성에서 태어나 2013년 <시와 표현> 신인상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사랑의 뼈들>, <편향의 곧은 나무>, <다친 새는 어디로 갔나>가 있다. 2018년 제4회 박영근 작품상을 수상했다.
정용태 기자
joydrive@newsmi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