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듯 같은 역사] 세금만큼이나 큰 부조의 부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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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9년 음력 6월 28일, 예안현(현 안동시 예안면 일대)에 예안 현감 부고가 전해졌다. 예안 현감 양원梁榞의 부인이 세상을 떠났다. 부고야 사람 사는 데 늘상 있는 일이니 그러려니 할 수 있지만, 그래도 현을 다스리는 현감의 부고인지라 예안 고을 백성들은 고민이 늘기 시작했다.

사실 평이 좋은 현감에게 나쁜 일이 생겼다면, 측은하게 여기는 마음이 컸을 터였다. 그러나 아쉽게도 예안 현감 양원은 그렇지 못했다. 일단 먹는 것을 좋아한다는 소문이 돌면서 탐욕스러운 이미지로 기억되었고, 아전들을 제대로 단속하지 않아 아전들의 횡포가 횡행하도록 둔 책임도 있었다. 예안 고을 백성들 입장에서는 아전들의 횡포만 보면 탐욕스러운 예안 현감의 얼굴을 떠올릴 지경이었다 그런 그가 가장 힘든 배우자의 상을 당했다니, 측은한 마음보다는 그 탐욕스러운 얼굴이 먼저 떠올랐을 터였다.

그러나 예의의 나라 조선에서 일단 예의는 차려야 했다. 거동이 불편한 사람들은 아들들을 보냈고, 대부분의 고을 양반들은 직접 관아로 가서 조문했다. 짐작할 수 있듯, 문제는 조문이 아니라 부조였다. 현대와 달리 상을 치르는 기간이 길었던 조선시대 여건상, 일단 조문을 마치고 나면 부조를 어떻게, 그리고 얼마나 해야 할지 결정해야 했다. 물론 개별적인 상례야 상주와의 관계를 고려해서 알아서 하면 될 일이지만, 마을의 통치하는 현감의 상례인 만큼 고을에서 힘을 모으는 것은 당연한 일로 여겨졌다.

광산 김씨 집안에서도 후조당後彫堂에 모여 부조 양을 정했다. 설왕설래가 오갔지만, 좋은 게 좋다는 쪽으로 의견이 모였다. 7월 3일 김령의 큰아들 김요형이 조문을 가는 길에 모은 무명을 부조로 전달했다. 그러나 이게 끝이 아니었다. 문제는 예안현의 향청에서도 부조에 관한 물품을 보내야 했다. 현감과 때론 견제, 때론 협력하는 향청 입장에서는 예안현 전체의 마음을 모아 현감에게 전달하는 것이 옳다는 입장이었고, 이 때문에 별감 김각金瑴이 이집 저집 다니면서 부조 물품을 요구하고 다니기 시작했다.

현감이 직접 향청에 이와 같은 부조를 요구한 것인지는 확인되지 않았지만, 현감의 씀씀이는 쉽게 이해되지 않았다. 현감이 자기 부인을 사랑했던 탓인지, 아니면 집안의 세를 드러내기 위한 것인지 알 수는 없지만, 그는 상을 치르는 일에 사용하는 모든 물품을 최대한 고급으로 사용했고, 또 가능한 많은 양을 사용했다. 물론 그게 자기 돈이라면 욕이야 듣더라도 누가 피해보는 사람이 없으니 문제는 없을 테지만, 결국 그 돈은 예안현의 백성들이 모아서 내는 물건들이었다. 공통으로 거둔 것만 해도 각 민호마다 땅 8결당 참깨 2되, 들깨 1되씩이었다.

일반 민호의 부담도 부담이었지만, 이제 그 불똥은 사족들에도 튀었다. 일반 양민들이야 향청에서 정해 준 대로 냈지만, 사족들은 누군가 정해 준다고 그대로 따를 리 만무했다. 결국 유향소에서 여러 사람들이 모여 부조의 양을 결정하기로 했다. 예안 현감의 상으로 인해 때아닌 유향소의 회의가 개최되었지만, 억지로 부조 물품을 내는 일에 선선히 참가할 사람들이 많지 않았다. 몇 사람 모이지 않은 상황이었지만, 결정은 해야 했다. 광산 김씨 집안도 집안 자체에서 낸 부조와 별개로 향청에서 거두는 부조에도 책임을 다해야 했다. 이중, 삼중의 부조는 양반들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이쯤 되니 탈이 날 법도 했다. 부인상을 핑계로 현의 백성들에게 부조 물품을 거두어들인다는 소문이 안동부사 홍유형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자발적인 부조가 이미 강제 징수에 가까운 상태에 이르렀음을 다른 지방관까지 알아차렸다. 이쯤 되면 더 이상 양원이 직접 부조 징수를 지시했는지 그렇지 않은지는 중요치 않게 되었다. 홍유형은 예안 현감에게 편지를 보내 그 행태를 비판하면서, 강력한 경고를 보내왔다. 그러나 그는 자기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이었다.

음력 8월 27일, 양원 부인의 발인 날이었다. 유향소에 속한 품계가 있는 관리들과 선비들은 예의를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관아에 모여들었다. 그러나 양원은 자기 부인의 발인이 중요치 않은 듯했다. 그는 자신이 거둔 부조의 반을 내팽개치듯 마을 사람들에게 돌려주면서 “이 현은 수령을 너무 옥죈다”고 소리를 질렀다. 부인의 죽음이 문제가 아니라, 부조를 받은 물품을 돌려주는 그 상황에 화가 난 게 분명했다. 의무감에 발인에 참여한 사람들만 마른하늘에 날벼락을 맞았다.

예나 지금이나 부조를 내야 하는 상황은 곤혹스럽기 짝이 없다. 상주의 상황을 생각하면 좀 더 많은 부조를 내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이지만, 그것도 자신의 경제적 범위 내에서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상을 당한 사람이 상사이기 때문에, 지역 권력자여서, 혹은 다른 목적으로 인해 자신의 경제적 범위 내에서만 부조를 한정하지 못하는 경우도 다반사이다. 법으로 부조 금액까지 정하는 코미디가 만들어질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상례는 함께 세상을 산 사람을 마지막으로 떠나보내는 의례로, 부조는 떠나는 사람에 대한 섭섭함과 아쉬움을 담는 게 원칙이다. 그러나 부조는 종종 본래 의미와 전혀 다른 새로운 욕망에 따르다 보면, 죽은 이는 백성들의 돈을 강탈하기 위한 핑계로 전락하기 마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