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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낮에도 빛 한줄기 들어오지 않는 어두운 건물 지하. 한 남성이 서류뭉치가 담긴 상자를 든 채 터덜터덜 계단을 내려간다. 표정은 굳어 있고, 옷매무새도 흐트러졌다. 그가 상자를 내려놓은 곳은 ‘시설관리팀’이다. 남성의 이름은 필용(고준). 그는 승진을 기대한 이번 인사에서 좌천되어 깊은 절망감을 느낀다.
햇볕이 내리쬐는 한낮의 점심시간, 잡일을 하며 하루하루 겨우 버티던 날이다. 1999년 대학시절 후배 양희(최강희)와 함께 가던 종로의 햄버거가게를 찾는다. 그리고 느닷없이 과거를 떠올린다. 대학생 양희(박세완)는 깡마른 몸에 수수한 옷차림을 하고, 늘 재미없는 연극 대본을 들고 다녔다. 대본의 제목은 <나무는 ㅋㅋㅋ하고 웃지 않는다> 둘은 연인이라고 하기에도, 아니라고 하기에도 애매한 사이였다.
대학생 필용(전성우)은 양희와 점심을 같이 먹고 대화를 나누고 산책을 했다. 둘의 관계에는 특별한 감정이 없었지만 어느 날 양희의 고백 이후로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든다. “선배, 나 선배를 사랑하는데.” 햄버거를 주문하듯 무심한 어조에 필용은 당황한다. “내일은 어떨지 모르지만 지금은 사랑해요.” 그 뒤로 필용은 양희가 신경 쓰이고 자신을 향한 사랑을 확인하기 위해 독촉한다. “사랑하죠, 오늘도” 한결같은 대답은 장마가 시작된 어느 날 달라진다. 양희는 역시 무심한 어조로 말한다. “아, 선배 나 안 해요, 사랑.” 필용은 절망에 빠진다.
화가 난 필용은 심한 말을 내뱉고 시름시름 앓는다. 필용은 열이 내리자마자 뒤늦게 후회하면서 양희의 고향집을 찾아간다. 양희의 본가는 다 쓰러져 가는 집이다. 양희는 필용 앞에서 가난한 자신의 처지를 보여주는 게 부끄러웠을 것이다. 필용은 양희를 만나 사과 하지만 둘의 관계는 회복되지 않는다. 필용은 양희와 둘이 길을 걷는데 양희에게 손을 뻗지만 닿지 않는다.
19년 뒤 중년이 된 필용은 햄버거가게에서 양희가 들고 다니던 연극 대본의 제목을 딴 연극 포스터를 본다. 이 연극이 양희가 연출한 것을 알고 점심시간을 이용해 공연장을 찾는다. 연극은 배우인 양희가 관객과 마주 앉아 서로의 눈을 응시하는 게 전부다. 처음엔 어색해 하던 관객은 양희의 눈을 계속 마주치면 결국 울음을 터트린다. 필용은 힘든 하루를 버티던 어느 날, 양희의 연극을 보러 가고 아무 말 없이 눈빛을 읽으며 연극을 하는 양희의 모습에 눈물을 흘린다. 연극이 끝난 후 필용은 양희와 재회한다.
하루의 시작인 아침 같은 사랑도 아니고, 감성이 촉촉해지는 늦은 밤도 아닌 너무 한낮의 연애, 마음을 고백하기엔 너무 환한 낮이 돼버린 연애. 언젠가 자신을 스치고 간 연인을 떠올리게 하는 드라마다. 2018년 10월 5일 KBS 2TV에서 방영된 <너무 한낮의 연애>는 요즘 가장 주목받는 김금희 작가의 동명소설을 원작으로 한 드라마스페셜이다. 뮤직비디오를 연상시키는 화면과 음악으로 가득하다.
드라마는 잠겨 있는 과거의 기억을 건져 올리듯 이야기가 시작된다. 문득 곱씹게 되는 순간이 있다. 아무렇지도 않은 말 한마디, 갑자기 생각난 되돌려 받지 못한 말들. 일상에 묻혀 정산되지 못한 과거의 감정들이 문득 떠오르면 우리는 그것을 아주 오랫동안 생각해왔다는 것을 깨닫는다.
손선우 전 영남일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