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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한국의 가장 어두운 밑바닥에 이주민이 있다. 그들은 한국의 필요로 한국에 초대됐지만, 여전히 동등한 시민으로 대우받지는 못한다. 쓸만하고 값싼 인력. 또는 가정을 유지하기 위한 방편으로 쓰이고 보호받지는 못하는 그들은 어떤 사람인가. 그들이 겪는 한국은 어떤 곳인가. 이주민 한 사람의 이야기에 한국 사회의 결함이 중첩돼있다. 대구이주민선교센터를 배경으로 대구 이주민이 겪은 한국의 모습을 살펴본다.

① 어린 딸 혼자두고 출입국에 잡혀간 엄마
② “한국에 결혼이주, 말리고 싶어요”

허름한 교회 앞을 허름한 옷을 입은 아저씨가 빗자루로 쓸고 있다. 2017년, 리엔 씨(당시 나이 25세)는 아들의 손을 잡고 대구 서구 비산동 대구이주민선교센터를 찾았다. 남편의 폭력에 시달리다가 아이 까지 해를 입을까 우려돼 이혼한 뒤, 경북 의성에서 아이와 함께 무작정 대구로 온 참이다. 주변에 도움을 청할 지인도 없었기 때문에 도와줄 사람을 수소문했다. 비산동에 베트남 사람들을 도와주는 교회가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아들의 손을 잡고 객지에서 알지도 못하는 교회를 찾자니, 망망대해에 선 듯했다.

교회 사무실이라고 해 찾아온 곳에 허름한 주택 하나가 있었다. 잘못 찾아온 건가 싶어 두리번거리던 차, 앞에서 한창 청소하던 아저씨가 손을 놓고 리엔 씨에게 말을 걸었다. 그는 선교센터에서 사역 중인 박순종 목사였다. 박 목사는 연고 없이 교회를 찾는 베트남 사람들이 익숙한 듯했다.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교회를 소개했고, 여기까지 온 자초지종을 물어 왔다. 박 목사는 도움을 얻을 수 있으니, 일요일에 교회를 찾아오라고 했다. 오갈 데 없었던 리엔 씨는 교회에 나왔다. 그것이 인연이 돼, 선교센터에 리엔 씨 책상이 하나 생겼다. 리엔 씨는 이제 리엔 씨처럼 선교센터를 찾는 다른 이주민을 돕고 있다.

▲대구이주민선교센터 사무실에서 상담 중인 리엔 씨

학업도 포기하고 장사에 공장 취직
아무리 일해도 벗어날 수 없었던 가난
13살 차이 한국 남성과 결혼하기까지

하노이 동쪽, 열대 해풍이 불어오는 항구도시 하이퐁시는 가난한 도시였다. 마땅한 일자리가 없었고, 농사를 짓거나 취직해도 수입은 많지 않았다. 리엔 씨의 부모님은 모두 쌀농사를 지었다. 집안 형편이 어려워 리엔 씨는 하교 후 논으로 가 벼를 베고 말리는 일을 거들거나, 집안일을 했다. 농사로는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돈을 벌 수 없었다. 조금이라도 돈을 더 벌어보려, 부모님은 틈틈이 어간장 공장에 가서 일을 거들고 품삯을 받아 왔다. 퇴근 후 귀가한 부모님에게서는 언제나 비릿한 어간장 냄새가 났다.

맏딸인 리엔 씨는 학교에 다니면서도 부모님이 만든 간장을 시장에 팔러 다녔다. 간장이 없으면 아이스크림을 팔았다. 아이스크림을 하루 팔면 당시 기준 한국 돈 300원. 수입이 적은 것 보다 리엔 씨는 친구들이 리엔 씨를 발견할까 봐 겁이 났다. 부모님처럼 비릿한 냄새가 밸까 걱정됐다. 고된 일을 하면서도 공부를 더 하고 싶었지만, 중학교까지만 다녀야 했다. 리엔 씨는 좀더 돈을 벌어, 두 동생의 학업만큼이라도 도와주고 싶었고, 하이퐁에서 약 8km 떨어진 동네에 중국인 사장이 하는 운동화 공장에 취직했다. 나이키, 콜롬비아 신발을 만들었다. 아침 7시 반에 일을 시작해, 밤 9시까지 일했다.

▲대구이주민선교센터에 방문한 리엔 씨의 두 동생

19살이 된 리엔 씨는 공장에서 돈을 계속 벌었지만, 형편이 나아지는 건 없었다. 다른 수를 내야 했다. 그러던 차, 공장 경비 아주머니가 한국 사람이랑 결혼할 생각이 있느냐고 물었다. 그 아주머니는 중매쟁이였다. 고향 언니 한 명이 경남 밀양에 시집간 사람이 있던 터라, 언니에게 물어봤더니 한국에 살아서 좋다고 했다. 고생한 이야기는 쏙 빼고 한 얘기였다는 걸 훗날 알았지만, 리엔 씨는 돈을 벌 수 있다는 생각에 길게 고민하지 않고 결심했다. 한국에 가자.

일사천리로 결혼까지 마쳐버렸다. 아주머니 안내에 따라 하이퐁시 도선군에 있는 리조트에 갔더니, 방 안에 리엔 씨와 비슷한 처지의 젊은 여자들이 10명 넘게 대기하고 있었고, 늙수그레 한 한국 남성 한 명과 통역사 한 명이 앉아 있었다. 통역사는, 한국 남성은 사과밭이 있어서 농사를 짓는다고 했다. 선택을 받은 리엔 씨는 남성의 인상이 크게 나쁘지 않은 듯 했고, 사과도 좋아해서 결혼을 결심했다. 나이 차이는 13살, 겉모습은 더 돼 보였는데, 큰 차이가 아니게 느껴졌다. 부모님은 펄쩍 뛰며 반대했지만, 리엔 씨는 자기가 책임지겠다며 우격다짐으로 약혼을 올렸다. 남성을 만난 지 이틀 만에 벌어진 일이다. 사흘째에는 하롱베이로 신혼여행을 갔다. 지척에 살면서도 가본 적 없는 동네였다.

한국에 남편이 먼저 돌아간 뒤, 한국에서 혼인 입국을 위한 서류가 왔다. 서류를 살펴본 리엔 씨는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었다. 남편은 한 번 결혼했다가 이혼한 사람이었다. 부모님이 보지 못하게 숨겼지만, 서류를 발견한 어머니는 눈물로 밤을 새웠다. 베트남에는 초혼은 초혼끼리, 재혼은 재혼끼리 만나는 것이 순리로 여기는 정서가 있다. 리엔 씨는 그때라도 결혼을 취소해야 했다고 후회한다.

시댁 방문 즉시 여권 뺏겨
남편 가정폭력 시작, 피임약도 압수
급기야 집에 불 지른 남편
반복되는 폭력 인정돼 이혼소송 승소

2010년 5월, 처음 타는 비행기를 타고 도착한 인천 공항. 다른 승객은 다 짐을 찾고 떠났지만 리엔 씨는 짐은 어떻게 찾는지. 남편은 어디 있는지. 이제 어디로 가게 될지 아무것도 아는 게 없었다. 두 시간을 서성이다 짐을 겨우 찾아 나왔더니 남편이 혼자 기다리고 있었다. 버스를 탔다. 창밖으로 보이는 이국적 풍경에도 호기심보다 두려움이 앞섰다.

반나절이 지나 터미널에 내리고 보니 고물 같은 남편의 트럭이 있었다. 내린 곳에서도 트럭을 타고 더욱 외진 곳으로 들어갔다. 무언가 잘못됐다는 생각이 들며, 리엔 씨는 지나가는 이정표지를 외워 두려 했다. 안동시에서도 산기슭(학가산)으로 들어서서야 차는 멈췄다. 거기에는 허름한 흙집이 한 채 있었다. 문이 잠기지도 않는 집이었다. 하이퐁보다 시골 같았다. 집에서 쥐와 뱀이 나왔다. 사과밭이 있기는 했다. 남편은 남의 땅을 대리 경작하는 농부였다.

시어머니는 외국 사람을 믿지 않았다. 곧바로 리엔 씨 여권을 압수했다. 베트남에 있는 가족도 돌봐야 하는데, 은행이 어디 있는지도 알려주지 않았다. 알아도 갈 방법이 없었다. 두려움과 서러움에 눈물로 날을 보냈다. 시간이 지나며, 원망스럽기만 했던 시어머니가 불쌍해질 때도 있었다. 술에 취한 시아버지한테 종종 맞았기 때문이다. 이런 집안에서 임신은 하고 싶지 않았다. 아이를 기를 수 있는 집안이 아니었다. 피임약을 구해 신발 안에 숨겨놨다. 남편에게 피임약을 들켜 압수당했고, 아들을 임신했다. 한국에 온 지 5개월 만이다. 눈물이 마를 날이 없었다.

그렇게 낳은 자식을 바라보는 순간, 생각지도 못했던 감정이 들었다. 리엔 씨 마음에서 다시 살아야겠다는 의지가 뜨겁게 타올랐다. 사과밭에 나가 일하다가 민들레를 보면 따다 말려 시장에 팔았다. 훗날 알게 된 은행에 몰래 가 통장을 만들고 시댁 모르게 돈을 모아 베트남에 있는 가족들에게 보냈다.

척박한 농사와 가사에 적응하나 싶었는데 문제가 생겼다. 남편이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술 취한 남편의 얼굴은 시아버지의 얼굴 같았고, 휘두르는 주먹의 힘은 시아버지보다 셌다. 술을 먹고 주먹을 휘두르는 일이 반복됐다. 2011년, 어린 아들을 돌보기 위해 베트남에 있는 어머니를 잠시 초청했을 때다. 술을 먹고 들어온 남편이 기름통을 들고 집에다 뿌렸다. 라이터로 불을 질렀다. 엄마와 리엔 씨는 아들을 데리고 도망갔다. 하이퐁으로 돌아 왔고, 공항에 비자와 외국인등록증을 찢어 버렸다. 다시는 돌아갈 생각이 없었다.

얼마 뒤, 남편이 하이퐁에 찾아왔다. 남편은 넙죽 엎드려 용서를 구했다. 리엔 씨는 다시는 잘못하지 않겠다고, 술에는 손을 대지 않겠다고 하는 말을 한 번만 믿어 보기로 했다. 대신 좀더 도시로 나와 살자고 했다. 한국에 돌아와 정착한 곳은 의성군. 아들은 한국에 초청한 부모님에게 맡기고 리엔 씨는 남편과 전봇대 만드는 공장에 취직했다. 일솜씨가 좋은 리엔 씨는 공장에서 신뢰를 얻었다. 공장 관리자 눈에 들어 기술을 배웠다. 급기야 크레인 운용법까지 익혔다. 수익이 늘면서 생애 처음으로 형편이 나아질 수도 있겠다는 꿈을 꿨다. 공장 아주머니들이 리엔 씨 통장을 궁금해했지만 꽁꽁 숨겼다.

그즈음 남편은 다시 술을 마시고 취해서 들어오기 시작했다. 만취한 남편이 집에 와서 행패를 부리기 시작했다. 집에 있던 아버지가 깜짝 놀라 말렸으나, 체구가 작아 속수무책이었다. 어린이집에서 귀가하던 아들이 깜짝 놀라 읍사무소로 도망가 울었고, 경찰이 출동했다. 남편의 폭력이 인정돼 이혼 소송에서 승소할 수 있었다. 2016년 연말이었다. 남편과 같은 공장, 같은 지역에 있을 수 없어서 리엔 씨는 부모님을 베트남에 돌려보내고 무작정 인근 큰 도시라는 대구로 향했다. 대구이주민선교센터에 오기까지 리엔 씨가 겪은 일이다.

리엔 씨는 전봇대 공장에서 크레인을 몰면서, 대구에 와서는 안경 공장에 취직해 돈을 모았다. 결혼이민 비자(F-6)로 한국에 왔고, 혼인 단절 책임이 남편에게 있다는 것이 입증돼 체류 자격을 유지할 수 있었지만 한시적이었기 때문에, 안정적인 생활을 위해서는 간이귀화 신청을 해야 했다. 조건은 까다로웠다. 국적법에 따라 3,000만 원 이상의 자산이 있어야 하고, 법령을 준수하는 등 품행이 단정해야 했다. 쉽지 않은 조건임은 분명했지만, 보살펴야 할 아들이 있었고, 전 남편과 겪은 일에 비하면 못해낼 것도 없었다.

2022년, 리엔 씨는 대구에 완전히 정착하는 데 성공했다. 국적을 취득했고, 악착같이 돈을 모아 집도 구했고, 새로운 가정도 일궜다. 형편이 나아지면서 리엔 씨는 선교센터 상근직을 맡아 어려운 일을 당하는 이주민을 본격적으로 돕기 시작했다. 선교센터를 찾는 이주민들의 모습에서 리엔 씨는 아들 손을 잡고 교회를 찾았던 날을 떠올린다. 임금체불, 산업재해, 체류자격, 의료비, 가정폭력 문제로 다른 얼굴의 사람들이 같은 표정으로 선교센터를 찾는다. 이들은 분명 한국의 사장님들이 필요로 고용됐고, 결혼하지 못한 한국 남성의 필요로 초청됐는데 제대로 보호받지 못한다.

스스로 알아서 보살펴야 했던 지난날을 되돌아보면 까마득하다. 그렇기에 리엔 씨는 한국행을 꿈꾸는 베트남 동포들에게, 여러 번 고민하라고 말하고 싶다. 한국에서 성취하는 길은 보장돼 있지 않은 반면 포기하고 두고 와야 할 것은 분명하다.

“돈을 벌 수 있어도 그만큼 고생하는 겁니다. 가족을 보고 싶어도 못 보고, 하고 싶은 것도 못해요. 쉬고 싶을 때 쉬지도 못해요. 한국말도 배우고 문화에도 익숙해져야 하고요. 몸은 무조건 건강해야 해요. 이주민이 와서 하는 일은 보통 한국 사람은 위험하거나 힘들어서 안 하려고 하는 일이거든요. 그런 곳에서 부당한 일을 당해도 말도 못해요. 그랬다간 미등록이 되거든요. 한국에 오고 싶은 동포들이 있다면, 이런 현실도 충분히 생각했으면 좋겠어요.”

▲대구이주민선교센터에 방문한 리엔 씨의 두 동생

결혼 이주여성, 가정폭력 경험해도
도움 요청 어려워
체류 자격 유지하려면 배우자 협조 필요
폭력 있어도 입증 책임, 배우자에게 종속
“인권적이고 포용적인 제도 개선 필요”

인구 감소, 고령화, 농촌 지역 공동화 현상과 같은 한국 사회의 위기 속, 이주민의 유입은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다. 리엔 씨가 베트남에서 한국에 와 정착하기까지 12년의 궤적은 ‘추상적 위기’ 속의 구체적 현실을 여실히 드러낸다. 리엔 씨의 정착 과정에서 리엔 씨가 했던 일은 어느 것 하나 한국이 필요치 않은 일이 없었다.

이주민이 필연적, 필수적 구성원이 된 현실. 하지만 국가는 이들을 충분히 보호하지 않는다. 오히려 제도적으로 이들을 노동력이나 재생산 도구로만 바라본다는 지적도 나온다.

김은정 한양여자대학교 교수(사회복지과)는 결혼이주에 대해 혼인 과정의 인신매매적 성격이 있으며, 결혼이주여성이 불안정한 신분 상태에서 국적을 얻기 위해서 인권침해적 상황에 쉽게 노출된다고 지적한다. 또한 인권침해적 상황에 적극적으로 저항하는 경우 강제 추방이라는 현실에 직면한다고도 설명한다.

김은정 교수가 책임연구원으로 수행한 2017년 국가인권위원회 ‘결혼이주민의 안정적 체류 보장을 위한 실태조사’에 따르면, 연구진이 2017년 7~8월 전국 결혼이주민 920명에게 설문조사 한 결과, 76명(8.2%)이 이혼 및 별거를 고려했다고 응답했다.

이혼이나 별거를 고려했으나 하지 않은 76명은, 실행하지 못한 이유로 ▲자녀들에게 피해를 줄 것이 걱정돼서(52.6%) ▲자녀를 양육하지 못할까 봐(25%) ▲남편 및 가족과 갈등 관계가 회복돼서(21.1%) ▲체류자격이 불안정해질 것이 두려워서(19.7%) ▲경제적 어려움이 예상되어서(19.7%) 등의 순으로 응답(복수응답)했다.

연구결과, 가정폭력 경험유무를 묻자 응답자들이 복수응답한 사유 중 상위 10가지 사유는 심한욕설(314명, 81.1%), 한국식 생활방식 강요(160명, 41.3%), 폭력 위협(147명, 38%), 금전적 방해(129명, 33.3%), 성행위 강요(108명, 27.9%) 과도한 집안일(106명, 27.4%), 본국 방문 방해(104명, 26.9%), 본국 송금 방해(104명, 26.9), 부모님과 모국 모욕(102명, 26.4%), 외출 방해(99명, 25.6%) 순으로 나타났다. 경제적 어려움과 관련해서는 조사 결과, 응답자 871명 중 521명(59.8%)이 소득이 전혀 없었다고 응답했다.

김은정 교수는 “우선 한국 사회 분위기가 이주여성에 대해 전보다 극단적인 폭력을 가하는 추세는 줄어드는 것은 사실”이라면서도 “하지만 지금의 제도는 기본적으로 이주여성을 혼인의 진정성 없이 ‘위장결혼’할 수 있는 사람으로 여기고 통제하는 데에 초점이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한국에 와서 가정에서 극단적인 폭력을 당하는 경우라도 이를 당사자가 입증해야 하는데, 쉽지 않을뿐더러 남편의 협조 없이 체류하기도 어려워 참고 넘어가게 된다”며 “이주여성을 재생산의 측면에서만 바라보고 통제하는 것이다. 이제는 국민을 좁게 보는 기존 관점을 넘어서서, 좀더 인권적이고 포용적으로 정책을 펼쳐야 한다”고 말했다.

박중엽 기자
nahollow@newsmi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