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비053] ‘고백할거야’, 진심으로 부딪히는 주인공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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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적인 대학 영화학과가 부재한 지역 현실을 아는 이들에게 (반년 남짓한 확장 워크숍 형태에 가깝지만) ‘대구영화학교’ 개설은 일대 사건이었다. 그리고 곧 기대와 우려가 영화학교 졸업 작품과 수료생들에게 쏟아졌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던 기존 창작자들에 비해 나은 조건이 마련되었으니 ‘황금알 낳는 거위’가 되어야 한다는 이유에서였다. 그 결과 영화학교 수료생들은 동기 간 유대감 획득과 더불어 주변의 인식에 꽤 압박도 느꼈을 테다. 다행히 대구 독립영화의 신세대는 뿌린 만큼 거두는 준수한 성과를 빠르게 보여주는 중이다. 1기에 이어 유수의 영화제에 진출 실적을 낸 2기 또한 순항 중이다.

김선빈 감독의 영화학교 2기 졸업 작품 <고백할거야>는 지역 독립영화 ‘씬’에서 독특한 영역을 점유하는 작품이다. 정규 영화교육과정이 없던 상태에서 소수의 창작자 그룹이 관계성을 기반으로 작업해온 창작환경은 일정한 경향성을 필연적으로 동반했다. 자연히 지역 내 선배 층의 작품 스타일에 은연중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이 때문에 대구지역 독립영화는 사회적 소재에 대한 예민한 관찰 스타일로 종종 편의적으로 분류되곤 했다. 하지만 <고백할거야>가 담고 있는 색깔은 (전국적 흐름 속에선 그렇게 특별해 보이지 않을 테지만) 지역 내 상당수 작품 경향과는 꽤 이질적으로 느껴질 수 있다는 점을 담고 있다.

감독은 공식 첫 작품인 2019년 <돌고래 마라톤>부터 2021년 영화진흥위원회 사전제작지원 단편 <E:/말똥가리/사용불가 좌석이라도 앉고 싶…>까지 사회적 주제 의식보다는 지치고 상처받은 이들을 응원하는 치유물 형태를 일관되게 보여준다. (아마 발단은 감독 자신에게 자신감과 동기부여를 위함에서 비롯되었을 법하다) 그중에서도 <고백할거야>는 요즘 독립단편영화들이 근저에 깔고 시작하는 사회적 맥락과는 상당한 거리감이 느껴진다. 2021년에 선보인 작품이지만 영화 속 풍경은 “응답하라” 시리즈를 연상케 하는 복고풍 낭만의 소우주다. 소소한 이야기 구조를 보완하기 위해, 영화 속 세계의 자기완결성을 목적으로 (저예산 지역단편영화의 한계 내에서) 배경도 패션도 음악도 꼼꼼하게 구축되어 있다.

▲영화 ‘고백할거야’ 스틸컷

주인공 성지원은 이름이 같은 동급생 한지원에게 고백을 받는다. 친구들을 대거 동원한 퍼포먼스 수준의 공개 고백은 (이 영화에서 거의 유일하게 현시대 흐름을 반영한) SNS로 단톡방에 올라와 화제가 된다. 문제는 한지원이 다음날 전학과 이사를 떠난다는 것. 성지원은 현장에서 답을 듣길 원하던 한지원에게 이사 출발 전, 다음날 오후 4시까지 집을 찾아가 답하겠다고 전한 상태다. 일단 상황을 벗어난 성지원은 그날 밤 내내 코믹하지만 치열하게 고민을 이어간다. 그리고 다음날, 정성스럽게 용모 단장 후 자전거를 타고 약속의 장소로 출발한다. 하지만 운명의 여정엔 예상치 못한 돌발 상황이 가득하다. 과연 주인공은 어떤 결단을 내리고, 무슨 답을 전날 고백한 남학생에게 제시할까? 궁금증을 자극하는 이야기 줄기에 코믹하지만 그저 개그 요소로만 차용되지 않는 장치들이 차례로 출현해 관객의 호기심을 끌어올린다.

<고백할거야>의 영화 속 세계에는 입시지옥도, 일진과 학교폭력도, 수저계급도 등장하지 않는다. 그 점이 오히려 기이하리만치 탈 시대적으로 다가온다. 한국독립영화에서 학원물이라면 자동응답기처럼 상상되는 지점들이 이 영화에서는 원천적으로 배제된 터라 오히려 산뜻한 기분이 들 정도다. 그렇다면 본 작품은 정치/사회적 맥락에 무관심하다(고 종종 매도되곤 하)는 요즘 세대를 반영한 ‘포스트모던’ 드라마인 걸까?

▲영화 ‘고백할거야’ 스틸컷

감독은 독립영화의 전형적 타입이라 할 현실(의 극단적) 반영 대신, 순전하게 사람 대 사람 간 소통의 문제를 하이틴 로맨스 구조 안에서 진지하게 풀어낸다. 감독의 데뷔작 <돌고래 마라톤> 역시 코믹한 외피 속에 관계의 문제를 감추고 있었던 게 아른거린다. 공개고백에는 공개답변으로 화답하는 게 당연한 태도 아닌가? 라는 주인공의 논리는 간단하지만, 그 결론을 도출하고 실행하는 과정은 결코 가볍지 않은 각오의 결과물이다. 누군가는 그 상황에 어이없어하겠지만 주인공은 진지하게 생각한 끝에 나름의 부담을 감수하고 행동으로 옮긴다. 그 태도는 엉뚱할진 몰라도 정공법이다. 우리가 일상에서 접해온 숱한 관계의 파탄은 상당수가 빙빙 돌리거나 본심을 숨겼기 때문임을 영화를 본 각자는 경험으로 잘 알고 있다. 그런 측면에서 주인공 성지원의 대답은 우리의 고정관념에 비추어 의외적인 동시에 폭발적 파격을 선사해준다.

▲영화 ‘고백할거야’ 스틸컷

그런 기발한 반전을 받쳐주는 건 주어진 조건 내에서 최대한 솜씨를 발휘해 정교하게 꾸며진 영화 속 이미지의 풍경이다. 본 작품에는 ‘쌍팔년도’ 청춘 로맨스의 기운이 부활한 듯 넘실거린다. 1988년 발표된, 당대의 하이틴스타 이지연의 데뷔앨범 수록곡 “난 사랑을 아직 몰라”가 등장하는 추격 장면은 그런 감성이 폭발하듯 분출하는 백미다. 더 이채로운 건 주인공의 복잡한 고민을 은유하는 기하학적 동선 배치다. 어느 동네를 가나 지배적인 원룸 재건축의 손길을 아직 덜 탄, 과거의 흔적이 아직 남은 골목길에서 주인공은 걷고 달리고 자전거를 몰며 목적지를 향해 전진한다. 치밀한 사전배치와 발품을 팔아 물색했을 로케 현장이 어우러져 그림 같은 구도를 이룬다. 여러 요소가 조화를 이루며 큰 무리 없이 톱니바퀴처럼 영화는 굴러간다. 감독의 이야기 전개와 흐름을 이끌어가는 연출 솜씨가 예사롭지 않다.

물론 재기 넘치는 연출에 비해 독립영화에 기대되는 차별성-상업영화나 TV 드라마의 통속성을 넘어서는-을 본 작품에서 기대하는 건 무리다. 하지만 14분짜리 신예 감독의 단편영화에 그 모든 게 다 구현되길 바라는 건 다소 과도한 요구 아닐까? 사회적 소재를 기계적으로 집어넣는데 급급한 무수한 습작들에 비해 <고백할거야>가 확신을 갖고 풀어내는 진지한 소통의 모색은 오히려 돋보이는 점이 많다. 마지막에 울려 퍼지는 지역 밴드 “드링킹 소년소녀 합창단”의 (이 영화를 위해 작업한) ‘고백할거야’를 음미하며 김선빈 감독의 차기작이 무엇을 더 보여줄지 두근두근 기다린다.

<작품정보>

고백할거야 Gonna tell you
2021|코미디/로맨스|13’58”
감독 김선빈
주연 김이슬(성지원 역), 김선빈(한지원 역)
출연 강소령, 박지수, 권민주, 서성희, 장주선
배급 필름다빈

제22회 대구단편영화제, 애플시네마 _우수상, 배리어프리 수상(2021)
제23회 정동진독립영화제, 단편부문(2021)
GIFF대학생단편영화제, 경쟁부문(2021)

김상목 영화칼럼니스트
spanishbombs@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