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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한국은 20대 대통령 선거 막바지에 있다. 그런데 이 선거가 이전에 경험한 적 없는 비호감 선거라고 한다. 미국 외신에서도 한국 대선이 ‘추문과 말싸움’으로 얼룩져서 역대 최악의 선거라고 비아냥거리고 있다. 하지만 2년 전 자신들의 대통령선거 추태는 이보다 더 했으면 더 했을 터인데, 그들도 벌써 그 창피했던 모습을 다 잊은 모양이다. 아마 우리도 곧 잊을 것이다.
그건 그렇다 하더라도, 지금 한국 대선에서는 엄청난 재정 규모의 공약이 쏟아지고 있고, 대부분의 공약이 정당 노선을 구분할 수 없을 만큼 유사해지고 있다. 서로 싸우면서 닮아가는 모양이다. 대선 공약이 유사해진다는 것은 자신들이 꿈꾸어 오던 정당 정강을 실현하기보다 당장 눈앞의 표를 얻기 위한 이벤트성 공약을 남발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 선거판이 대선(大選)인지 지선(地選)인지 구분되지 않을 정도다.
‘소확행 공약’이라던가 ‘심쿵 공약’이 그렇다. 그렇다고 해서, 이번 선거가 대선이니만큼 대통령 공약은 국가 비전과 같은 거대담론을 지향해야 한다는 주장이 아니다. 오히려 코로나19로 뒤틀린 국민들의 일상을 알뜰하게 만진다는 점에서 그 의미를 높이 평가해야 한다. 하지만 흔들리는 표심에 국가 지도자가 되겠다는 사람마저 흔들려서 중심을 잃어버리고 있다는 점은 염려된다는 말이다.
아마도 인기영합적 공약이 남발되는 현상은 이번 선거가 ‘최선의 대통령을 뽑는 선거가 아니라, 두 악(惡) 중 차악(次惡)을 뽑는 선거’이기 때문이라는 세평과도 연관 있을 것이다. 자신의 한계를 가리기 위해서는 화려하고 강한 톤의 화장술이 필요하듯이, 허물 많은 후보자들이 내뱉는 언어도, 내어놓는 공약도 하나같이 자극적이고 요술이 가득하다.
그러나 우리가 언제 최선의 지도자만을 뽑아왔던가. 그렇지 않은가? 그래서 지금의 상황을 너무 자학할 일은 아니다. 내가 공부하는 경제학에서도 완전경쟁시장이 아닐 경우, 시장의 선택이 차악, 그러니까 여러 실패 중 기중 나은 실패를 선택하고 있다고 결론 짓고 있다. 현실 속에서는 완전경쟁시장의 최선의 균형을 불가능하게 하는 요인이 늘 있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번 대선이 왜 이렇게 이전투구의 난장판이 되었을까? 필자의 생각은 이렇다. 5년 전 우리 모두가 촛불혁명이라는 산을 함께 오른 적이 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산을 내려오고 있다. 이번 선거의 혼탁함은 그 촛불혁명의 산을 내려오면서 치러지는 선거이기 때문이다.
산 위의 푯대를 향해 함께 달려 올라가기는 했지만, 우리는 그 산 정상에서 함께 내려오는 법을 준비하지 못한 것은 아닐까. 오를 때는 대오를 갖추며 함께 올랐지만, 내려올 때는 각자가 땀에 젖은 옷을 풀어 헤치고 뿔뿔이 흩어져 내려오기 때문이다. 오를 때의 마음과 내려올 때의 마음이 다를 것이다. 오를 때의 기대감과 내려올 때의 실망감, 오를 때의 열정과 내려 올 때의 허탈감. 이런 간극들, 간극들···.
사실 우리가 산 정상에서 함께 합의해 준 촛불정부와 촛불국회는 결과적으로 정직하지 못했다. 그들은 겸손하지 못했고, 서툴렀으며, 과욕했다. 그래서 그들은 산 정상에 모인 시민들과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함께 산을 내려올 만큼 성숙되지 못했다. 그들은 촛불 과업을 달성한답시고 그들만 먼저 산을 내려와버렸다. 외톨이로 남은 우리는 산을 내려오면서 넘어지고, 아파하고, 그리고 분노했다.
이 간극을 비집고 ‘공정과 상식’을 회복하겠다는 대통령 후보가 나타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이 구호는 또 다른 촛불혁명을 소환해내는 것처럼 보인다. 2017년 촛불정부의 적패를 청산하고자 하는 정권교체를 주장하고 있지 않은가! 경계하라, 적패 청산의 이름으로 지금부터 모든 시계가 거꾸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을.
그러나 이것만은 안 된다. 결코 되돌아가서는 안 되는 것들이 있다. 이것이 3不이다. 여기에는 한국 사회가 안고 있는 모순이 응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차기 정부 혹은 차기 정권을 누가 맡던 간에 국민 앞에 3不을 선포해야한다.
제 1不은 ‘부동산투기는 안 된다’이다. 한국 사회가 부동산 공화국이 된 것은 한 정권이 부동산 투기를 억제하면 다음 정권이 들어와 풀어버리기 때문이다. 불로소득을 회수하겠다는 투기억제 정권은 곧 수명을 다할 것이고, 그때 투기자의 초과이득은 실현된다. 우리는 이 비밀을 여러 차례 경험했고 학습되어 있다. 후보자도 여기에 표가 있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이 유혹을 이겨야 한다.
제 2不은 ‘남북 간의 전쟁은 안 된다’이다. 남북 휴전상태는 냉전의 마지막 유산이며 신냉전의 출발점이다. 우리는 이 소용돌이 속으로 걸어 들어가겠다는 그 어떤 주장도 단호히 거부해야 한다. 우리는 북풍 조작으로 선거판을 뒤집는 것을 여러 번 목도했다. 그때마다 사회는 양분되었고, 극단적 진영은 단결했다. 후보자도 여기에 표가 있다는 것을 잘 안다. 하지만 이 유혹을 반드시 이겨내야 한다.
제 3不은 ‘수도권 집중은 안 된다’이다. 지방 청년 유출, 지방 소멸, 부동산 투기, 소득 불균형, 교육 불균형 등, 대부분의 모순이 여기에 농축되어 있다. 남부경제권을 제2의 수도권 수준으로 육성하겠다는 외침이 시간이 갈수록 헛된 구호로 메아리칠 뿐, 공공기관 추가이전 조차도 묵묵부답이다.
수도권에 대규모 아파트를 쏟아붓고, 수도권 GTX를 거미줄처럼 깔아 30분 통근권을 만들겠다는 것은 서울을 중심으로 하는 수도권을 강화하겠다는 것이나 다름없다. 후보의 눈에는 수도권에 몰려 있는 표가 물 반 고기 반 하듯 하니 이 유혹을 어떻게 물리치겠는가. 이런 것을 공약하는 후보는 인아(人我)를 구분할 것 없이 시계의 바늘을 거꾸로 돌리는 반동자들이다. 눈앞의 이익만을 좇는 요술꾼임에 틀림없다.
필자가 근무하는 대학에는 월파원(月坡園)이라는 야외박물관이 있다. 고풍스런 보물급 석탑과 석등이 즐비한 아름다운 이 정원에는 머리가 잘려나간 수십의 좌불상이 있다. 몇 년 전에 한국경제사를 전공한 교수께서 점심을 마치고 함께 교정을 산책하면서 이 정원을 무두불원(無頭佛園)으로 부르자고 제안한 적이 있다. 고려의 불교를 조선이 배척한 결과라는 것이다.
목잘려나간 부처님처럼, 우리 역사는 앞선 시대를 청산하면서 그 시대의 모든 것을 부정해버리는 상처들을 안타까워하면서 한 말씀이다. 지금 나는 점심 후 교정을 거닐며 겨울 마지막 자락의 냉기를 한가로이 즐기고 있지만, 대통령 후보들은 우리 사회의 근본 모순들을 눈앞의 표만 보고 쥐락펴락하고 있다. 아, 찻잔 속 폭풍이 따로 없다.
엄창옥 경북대 경제통상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