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병규 칼럼] 96년 강릉 무장공비 침투 현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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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군 26명 중 13명 사살, 1명 생포, 11명 자살, 1명 행방불명. 아군은 장병 12명 사망, 27명 부상, 경찰과 예비군 각각 1명, 민간인 4명이 사망했다. 25년 전 온 나라를 공포로 몰아넣은 북한군 잠수함 침투 사건의 결과이다. 1996년 9월 북한의 상어급 잠수함이 강릉 강동면 안인진리 앞바다에서 좌초된 후 북한군 26명이 강원지역에서 일으킨 사건이다.

25년이 지났지만,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 하루 평균 4만3천 명의 군과 예비군·경을 투입해 격렬하게 저항하는 북한군을 49일 만에 모두 소탕했다. 아군의 희생도 만만찮았다. 필자는 당시 동해안을 지키는 사단 사령부의 공보정훈장교로서 최초 작전부터 현장에 뛰어들었다.

▲[사진=연합뉴스 유튜브 갈무리]

“따르릉, 따르릉, 따르릉.” 9월 18일 2시경 사령부 지휘통제실 상황장교가 다급한 목소리로 “강릉 안인진리 해안가에서 불빛이 번쩍하였다”며 관계자들을 비상소집했다. 1시 35분경 택시기사가 파출소로 신고한 것과 초병의 관측 내용을 토대로 상황 파악을 한 후 소집이었다.

필자는 주둔지인 삼척에서 강릉으로 차를 몰았다. 3시경 안인진리 해안가는 어둠이 짙게 깔려 있었다. 달빛이 없었다. 파도만이 바닷바위를 세차게 때리고 있었다. 이미 군경 합동조사팀이 주변을 살피고 있었다. 눈이 어둠에 조금씩 적응되자 파도에 가려 바위인지 이상한 검은 물체가 보일락 말락 하였다. 날이 밝자 드러난 검은 물체의 정체는 잠수함 해치였다. 침투한 북한군이 벗어 던진 오리발과 잠수복이 해안가 바위틈에 보였다. 비탈길에 칡넝쿨이 흐트러져 있었다. 잠수함에서 나와 오리발과 잠수복을 급히 벗어 던지고 황급히 산으로 도주했을 북한군들의 모습이 그려졌다.

군경 합동조사팀은 북한군의 잠수함(정원 12명)으로 잠정 결론지었다. 등골이 오싹했다. 무장공비들이 주변에 있다고 생각하니 긴장의 고삐를 늦출 수 없었다. 상황을 군 공보팀에 알려야 했다. 1996년에는 휴대폰이 대중화되지 않았다. 황급히 주변의 공중전화기를 찾았다. 이상하게도 관광지인 정동진 길목과 등명낙가사 사찰에 있는 모든 공중전화가 먹통이었다. 아직도 의문으로 남는다. 나중에 알았지만, 통화를 시도하고 있을 때 등명낙가사 뒷산에 북한군이 은거하고 있었다. 생각만 해도 섬찟했다.

6시경 잠수함 침투 관련 첫 뉴스가 나왔다. 얼마 지나지 않아 기자들이 현장으로 몰려왔다. 오전 10시경 취재기자 150여 명이 넘었다. 언론은 위성장비를 활용해 군사작전을 최초로 실시간 보도하기 시작했다.

오후 4시 30분경 안인진리에서 서남방 7km 떨어진 청학산(338m) 중턱에 북한군 11명이 쓰러져 있다는 보고가 접수되었다. 기자들을 안내하며 현장으로 달렸다. 이른 새벽부터 뛰어다녔고 아침, 점심도 거른 탓에 거의 탈진 상태로 현장에 도착했다. 무덤가에 1명이 앞에 따로, 10명이 나란히 쓰러져 있었다.

일부에선 “잠수함의 승조원이 12명이니 작전이 종료되었다”고 했다. 11명의 주검을 보고 추측한 것으로 보였다. 실제로 그 무렵 인근 지역에서 경찰이 주민 신고를 받고 북한군 이광수를 생포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생포된 승조원인 이광수는 잠수함 내부를 개조하여 26명이 탑승했다고 진술했다. 마침 현장조사팀은 공비들의 주검 주변에 흩어진 소총 탄피를 보고 위장 자살임은 파악했으나, 정확한 침투 인원은 알지 못했다. 이광수를 생포하지 못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주민 신고가 얼마나 중요한지 입증한 것이다.

생포한 이광수 진술이 나오자 수색하던 장병들은 도주하는 북한군을 추격하기 위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취재기자 20~30명도 어느새 보이지 않았다. 필자는 한참 동안 횡대로 나란히 쓰러진 북한군 11명의 주검을 바라보았다. 죽어가면서도 오와 열을 맞춘 북한군을 보고 섬뜩했다. 어떤 훈련을 받았기에 죽어가면서까지···…. 도주하는데 거추장스러운 동료를 죽여 버리는 잔혹함을 생각하니 모골이 송연했다. 25년이 흐르는 동안 북한군의 무도한 만행의 그 현장을 잊을 수가 없었다. 북한군 11명의 주검에서 풍기던 비린내가 아직 필자의 몸에 배어 있는 듯하다.

만약 북한이 평화 정착을 위해 발걸음을 뗀다면, 필자는 25년 전 강릉 잠수함 침투 북한군의 만행을 용서할 수 있을까? 자문해 본다. 선뜻 답하기 쉽지 않다. 무엇이 죽어가면서도 오와 열을 맞출 정도로 반항 없이 죽게 했을까? 이러한 의구심에 뒤틀린 남북분단 현실이 겹쳐진다. 무엇보다도 항재전장의 길을 걸어온 필자는 여전히 북한군을 신뢰할 수 없다. 한반도의 평화를 공유하려는 진정성이 비치지 않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과거에 잡혀 미래를 잡지 못하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든다. 세계는 급변하고 있다. 질곡된 삶을 야기한 과거를 탓하며 머무를 수 없다. 미래지향적 자세로 분단을 극복해야 한다. 과거를 넘고 현재를 딛고 미래를 향해 달려가자. 손에 손잡고 오와 열을 맞추며 함께 미래를 향해.

▲필자는 96년 9월 20일 북한군 은거지역에서 전우들의 엄호를 받으며 자수권유 방송을 했다. 사진은 동아일보 1996.9.21일자 인용.

전병규 kyu9664@naver.com
육군에서 33년 복무하고 2021년 예편했다. 소말리아, 이라크에서도 근무했다. 전역 직전에는 대구, 경북을 지키는 강철사단의 부사단장을 역임했다. 대구과학대학교 초빙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