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교협 시사 칼럼] 대선 잡감(雜感):선물이라는, 우리 사회의 반석 / 안승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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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야흐로 정치의 계절이다. 유력 정치인들이 대선 후보로 선출되며, 우리에게 무언가를 주겠다고 약속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그것이 계절이 순환하듯, 일정한 때가 되면 되풀이되는 일종의 의례적 행사임을 잘 안다. 업고라도 다닐 듯, 입안의 혀처럼 굴던 정치인도 선거가 끝나면 곧 그들의 요새에 도사리고 앉아 우리에게 등을 돌려왔다. 그러나 지행합일은 언제나 어렵기 짝이 없는 일인지라, 우리는 알면서도 또 그 약속의 파도를 타고 춤을 출 것이다. 광란의 댄스파티가 끝나면, 불 꺼진 객석에서 주섬주섬 일어나며 “오늘 뭐 먹지?” 하겠지만 말이다. 기왕 춤추는 김에, 우리를 들썩이게 하는 그 선물의 본성이 뭔지 한번 생각해보기로 한다.

<증여론>은 선물에 관한 체계적인 이론서로서, 대중적으로도 큰 영향력을 발휘한 우리 시대의 고전이다. 그런데 저자인 마르셀 모스(1872-1950)가 선물의 이론을 시작하는 얘기는 상당히 수상쩍다. 선물은 사회적 교환의 아주 오랜 형식인데, 그것이 주어질 때는 물건과 함께 증여자의 혼―이를 ‘하우’라고 부른다―이 함께 건너가며, 증여자의 사회적 인격, 소위 페르소나에 결부된 선물의 하우가 원소유자인 증여자에게 돌아가려 발버둥을 치는 통에, 선물을 받은 이는 갚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선물이 자발성에 기초하면서도 의무 관계의 일환인 것, 은혜를 베푸는 일이지만 독을 떠먹이는 일이기도 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것이 두려워 선물을 거부하기는 어렵다. 선물의 거부는 곧 관계 맺기의 거부로서, 전쟁 선포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선물이라면 사족을 못 쓰고 냉큼 삼키는 나의 유약함이 우리가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면, 약간의 위안이 되기도 한다. 아무튼 모스의 논의는 그래서 선물을 받는 일은 곧 독을 삼키는 일이며, 지도자들은 받는 사람의 입에서 악 소리가 날 때까지 경쟁적으로 선물을 베풀고, 그래서 사회는 선물을 줄 의무, 받을 의무, 갚을 의무가 일체를 이룬 ‘호혜적 의무’의 체계로 결속된다는 설명으로 나아간다. 도대체 선물이 좋다는 것인지 나쁘다는 것인지 알쏭달쏭하기만 한데, 바로 이 점이 선물의 본성이다. 생각해보면, 친구나 지인이 준 것이든, 선생님이나 정치인이 준 것이든, 모든 선물이 그처럼 알쏭달쏭했던 것 같다. 그 페르소나의 애매함을 견디기 어려운 나머지, 연인과 헤어지면 그가 준 편지와 선물을 불사르거나 상자에 담아 돌려보내고는 했을 것이다.

여기까지는 그런대로 잘 알려진 이야기이다. 그런데 모스가 폴리네시아, 멜라네시아, 안다만 제도, 아메리카 북서부의 부족사회 사례를 차례로 검토해 선물의 하우를 설명하고 나서, 소위 문명사회의 고대법을 검토한 내용은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것 같다. 그에 따르면, 고대 로마에서 계약을 맺을 때는 ‘넥숨’이라는 보충적 담보가 주어졌는데, 이는 큰 가치는 없는 물건―가령 막대기―이지만 생명이 있는 것으로 여겨지며, 계약이 이행될 때까지 담보 제공자인 원소유자의 가족 일부로 존재하면서, 받은 이의 행동을 구속한다. 유사한 담보 관념은 게르만법에도 존재했는데, 이는 수령자에게 계약 이행을 강제하는, 증여자의 개성이 가득한 물건이었다. 그리고 계약뿐 아니라 일반 사회관계에서도 유사한 힘이 작용했다. 게르만어에서 ‘don’이 선물의 뜻과 독의 뜻을 동시에 가졌던 것도 이런 사정과 관련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또 고전 힌두법에서 선물은 주어짐으로써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재생을 거듭하며 늘어나는 것으로 여겨졌다. 따라서 음식물은 반드시 증여를 통해서 나누어져야 하고, 나누지 않으면 오히려 파괴되어 없어지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모든 물건이 그 자체로 쌍무적인 의무 관계 속에 존재하는 셈이다. 중국에서는 매매계약의 모든 조건이 이행된 후에도 매도된 물건에 대해 원소유자가 일정한 관계를 유지하다가 다시 넘겨받을 수 있는 권리가 존재했다. 이는 매도한 물건과 원소유자 사이의 인연이 매도 행위로도 끊어지지 않는다는 생각을 반영한다고 할 수 있다. 조선에서도 유사한 관행이 ‘환퇴’라는 이름으로 존재했다.

그것을 혼이라 표현하든 페르소나나 개성, 인연이라 표현하든, 선물의 논리에 나타나는바 물건을 주고받는 사람들이 그 물건 외에 다른 무언가를 함께 주고받는다는 생각은, 상품의 매매나 거래 계약으로 무언가 주고받을 때도 확장되어 나타난다. 자본주의 사회에 살아가는 우리 역시 물건을 사고팔면서 단지 물건과 돈을 교환했다고만 생각하지 않고, 다른 것까지 함께 주고받는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오히려 대가로 돈을 치렀으니 그것으로 거래 의무는 끝났다고 생각하는 쪽에 문제가 있다고 인식되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더 나아가 친밀한 사이에서 정서적이거나 신체적인 만족을 표시하기 위해 돈을 사용하는 일은 관계를 모독하는 일로 간주되곤 한다. 이렇게나 돈을 숭상하는 사회에서 그렇게나 돈을 혐오하는 관념이 공존한다는 점이 가끔 어색하게 느껴지기조차 한다.

모스에 따르면, 현대적인 사회보장 정책 역시 동일한 원리에 바탕을 둔다. 고용주는 노동자에게 임금을 지급하지만, 노동자의 협력을 통해 고용주가 얻어낸 것에 대해 그것만으로 모든 대가를 치렀다고는 할 수 없다. 돈으로 바꿀 수 없는 노동자의 생명과 노고가 생산의 과정에서 함께 바쳐졌기 때문이다. 사회와 공동체를 대표하는 기구로서의 국가 역시 마찬가지여서, 고용주가 노동자에게 임금을 지급하고 소비자가 생산자에게 상품 가액을 지급한 후에도, 국가, 사회, 공동체가 고용주와 노동자의 활동에 힘입어 누리는 것들에 대한 빚은 여전히 남는다. 고용주가 노동자의 사회보장사업에 협력해야 하는 의무, 국가와 사회와 공동체가 고용주와 노동자에게 일정한 생활보장을 해주어야 하는 의무가 여기에서 발생한다. 노동력이라는 상품을 사고팔며 그 대가로 임금이 지급되었지만, 우리는 그 외의 무언가를 더불어 주고받았고, 그것이 우리에게 추가의 빚으로서 사회적 의무를 발생시킨다. 우리가 선물이나 상품으로 서로 묶여 함께 사회를 이루는 한, 우리는 이 의무를 벗어날 수 없다.

▲바야흐로 정치의 계절이다. 유력 정치인들이 대선 후보로 선출되며, 우리에게 무언가를 주겠다고 약속하기 시작했다. (뉴스민 자료사진)

다시 선거에 대해 생각해보자. 선물의 약속은 정치인들이 먼저 하지만, 그들이 우리에게 먼저 선물을 베푸는 것은 아니다. 사회를 사회이게 하는 최초의 선물, 주어야 하고, 받아야 하며, 갚아야 하는 의무의 체계로 우리를 엮는 국가와 사회와 공동체의 창출이라는 선물은, 적어도 그 주기적 갱신으로서의 선거 의례라는 관점에서 볼 때, 후보로 출마하는 정치인이 아니라 투표하는 유권자 시민이 먼저 베푸는 일이다. 정치인이 하는 선물의 약속은 그저 답증의 약속일 뿐이다. 게다가 앞서 확인한 선물의 하우, 담보의 인격, 노동자의 생명처럼, 투표라는 선물에 대해 정치인의 답증이 이루어져 교환이 완료된대도, 시민이 증여한 최초의 선물로 인해 그들이 짊어진 빚은 결코 해소될 수 없는 성질을 지닌다. 대가가 없는 선물은 없다. 선물은 항상 답증 이상의 것을 요구한다. 유권자 시민이 아니라, 후보자 정치인들이 들어야 할 말이다.

안승택 경북대 고고인류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