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암동 쪽방 미진여관 202호 새 옷 입는 날

단열 시공한 늙은 노동자···“쪽방 빈민도 따뜻했으면”

20:49

“김 사장, 총알 없다. 좀 채워주소”
“형님 거기는 투피스(two piece)가 아니고 원피습니더”

두 달 넘게 찬바람에 식었던 대구시 동구 신암동 미진여관 202호. 19일, 오랜만에 떠들썩한 사람의 온기가 차올랐다. 이날 소동의 주인공은 은퇴한 건설노동자·쪽방 거주자·장기실업자들이다. 늦바람에 다시 망치를 잡은 이들, 202호에서 ‘주택에너지 효율화 시공사업’?중인 이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들떴다.

목상을 세우는 노동자들
▲목상을 세우는 노동자들

“주택에너지 효율화요, 쉽게 말해서 방에다가 잠바를 입히는 겁니다” 쪽방 거주자 이동희(54) 씨의 설명이다. 키가 족히 180cm는 넘어 보이는 이 씨는 오늘 작업의 에이스다. 벽면에 목상(나무 받침대)을 대고 타카(Taker, 스테플러의 종류)?박는?일을 보조의자 없이도 척척 해낸다.

겨울이면 추위에, 여름에는 더위에 무방비로 노출되는 대구시 쪽방 거주민은 약 900여 명. 그들을 위한 쪽방은 약 1,000개. 대부분 쪽방은 1972년 지어진 미진여관처럼 단열·방음 등 환경이 좋지 않다. 좁고 열악한 방 한 칸에 몸을 뉘일 수밖에 없는 이들을 향해 손길을 건넨 이는 그 누구도 아닌 같은 빈민들이었다.

빈민이 나서서 빈민의 주거 환경을 개선하는 이 사업에 시민들 반응도 뜨거웠다. 다울건설협동조합이 사업을 위해 한 소셜클라우드펀딩 사이트에서 모금을 시작하자 약 700만 원이 모였다. 이들은 이 돈을 쪼개 대구 시내의 열악한 쪽방 6곳을 꼽아 시공에 나섰다.

시공 중인 단열재(왼쪽)와 신문지로 덧댄 기존 벽
▲시공 중인 단열재(왼쪽)와 신문지로 덧댄 기존 벽

미진여관에 ‘잠바를 입히는’ 작업은 창문교체부터 시작했다. 채광도, 단열도 좋지 않던 창문은 널찍하고 튼튼한 새 창문이 대신했다. 냉기가 그대로 들어오던 외벽 안쪽으로 이중?삼중으로 단열 시공에 나섰다. 열반사단열재를 반듯하게 채우고, 열 맞춰 가지런히 목상을 세웠다. 레이저 수평계로 바둑판처럼 목상을 반듯하게 세워서인지 흰 벽이 든든해 보일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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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정보 씨
▲장정보 씨

그다음은 목상 위로 석고보드를 댈 차례. 은퇴한 건설노동자 장정보(68) 씨가 미리 1층에서 석고보드를 옮겨 놨다. 장 씨는 낯선 시공 작업임에도 순서를 꿰고 있다. 땀을 닦는 장 씨에게 말을 걸었다. “내가 지금은 나이가 많이 들었지만, 옛날에는 동대구역 공사도 했습니다. 영대병원, 시민회관 작업도 했어요” 장 씨의 표정에서 자부심이 묻어나왔다.

석고보드 위로 도배만 하면 작업은 끝이다. “잠깐 쉽시다”하면서도 담배 한 대만 급히 피고 작업에 나선지라 점심을 먹기도 전에 일이 마무리됐다.

이동희 씨
▲이동희 씨

“이 방 새로 해 놓으면 앞으로 들어오는 사람이 좋겠지. 그 전 사람은 한 2~3개월 전에 요양병원에 갔는데 고마 죽었다고 하네요. 없는 사람들 수리라도 해줘야지. 나도 팔십노인이고 쪽방 살면서 힘든데. 여기 사람들은 어떻겠어요. 올 설에도 아무 데도 안 가고 방에만 있어서 밥도 해가 먹이고 그랬는데···우리 같은 사람들 좀 도와주이소”(안종옥 씨, 83, 미진여관 건물주인)

건물 주인 안종옥 씨
▲건물 주인 안종옥 씨

조기현 다울건설협동조합 대표는 “근로 취약 계층의 일자리도 창출하고 저소득층의 주거환경도 개선하기 위해 사업을 시작했다. 주택에너지 효율화 사업도 일반 인테리어 회사가 장악하고 있어서 취약 계층 일자리는 배제됐다”라며 “전문적으로 에너지 효율을 다루기 위해 오랫동안 준비했다. 취약 계층도 노동할 권리가 있고, 좋은 환경에서 살 권리도 있다. 이번 사업으로 인간의 권리를 찾아 나설 것”이라고 말했다.

“이만큼 튼튼하게 시공하는데 잘 못봤지요? 저도 나이가 들었지만, 그래도 많이 배우고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현장경험도 많아서 할 만해요. 우리 나이에 새로 배우고 일하는 게 얼마나 재미있는데요. 이 일도 계속하고 싶습니다. 아직 20년은 일 더 할 수 있어요. 앞으로 우리가 사는 방 정도는 지을 수 있도록 일 많이 배울 겁니다”(쪽방 거주자 이동희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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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이동희 씨, 장정보 씨, 조기현 씨, 서춘희 씨, 김성진 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