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전교조 창립 32주년, ‘모두들 여기 모였구나’ / 임성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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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6월 민주항쟁을 지나 전국에서 7, 8월 노동자대투쟁이 일어났다. 전국 곳곳의 공장과 사업장마다 노동조합이 결성되었다. 1987년 전국교사협의회가 결성됐고, 89년 교사운동은 전국교직원노동조합으로 질적 변화했다. 교직을 성직이나 전문직으로만 인식하던 교사들이 자신을 노동자라고 선언을 했다. 그러면서 노동자가 될 제자들의 참교사로 서기로 다짐했다.

하지만 전교조 결성을 앞두고 세상은 순식간에 공안정국으로 변해버렸다. 전교조는 탄압이 뻔히 보임에도 1989년 5월 28일 이리저리 쫒기며 전교조 결성을 단행했다. 대한민국 교육사에 가장 길이 남을 역사적 사건이다. 전교조 교사들은 1960년 4.19교원노조 선배들이 맞섰던 것처럼 다시 1,500여명이 해직(그 이후로도 학교와 사회민주화투쟁에 동참하면서 모두 1,800여명이 해직되었다)되면서 조직을 사수해나갔다. 이렇게 많은 교사들이 스스로 희생을 각오하게 된 계기가 무엇이었을까?

86년 1월 5일, 중학교 3학년 한 소녀가 죽었다. 유서는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로 세상에 알려졌다. “난 1등 같은 것은 싫은데, 앉아서 공부만 하는 그런 학생은 싫은데, 난 꿈이 있는데, 난 친구가 필요한데, (중략)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 난 그 성적순이라는 올가미에 들어가 그 속에서 허우적거리며 살아가는 삶에 경멸을 느낀다.”

▲1989년, 건국대학교에서 개최된 전국교직원노동조합 결성식 전경. (사진=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아카이브/박용수)

1986년 5월 10일, 전국의 교사들은 답을 했다. ‘5.10교육민주화선언’이다. “학생들과 함께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 우리 교사들은 오늘의 참담한 교육현실을 지켜보며 가슴 뜯었다. (중략) 우리 교사들을 믿고 따르는 학생들의 올곧은 시선은 도도한 역사의 흐름 속에서 방관자로 남아 있는 우리를 더없이 부끄럽게 만든다.” 이후 이 선언을 주도한 교사들은 무크지 <민중교육>을 발간하였고 소위 ‘의식화 교사’가 되어 국가보안법의 올가미에 걸려들어 해직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87년 6월 항쟁을 지나고 교사들은 YMCA와 흥사단의 우산 속에서 걸어 나와 전국초등교사협의회(8.22), 지역별 교사협의회가 만들어지고 마침내 9월 27일 한신대에서 ‘민주교육추진 전국교사협의회’가 결성되었다. 대구에서는 막차를 타고 서울에 내려 새벽에 한신대로 들어갔다가 쫄쫄 굶고 뒷산을 넘어 나왔다. 대구는 경북과 통합하여 전국 11번째로 10월 31일 경찰 봉쇄를 뚫고 대구봉덕성당에서 대구경북교사협의회를 결성했다.

“전교협은 맹목적인 복종을 단호히 거부하고 교사의 단결을 기초로 교사의 의견을 수렴하고 학생 교육을 정상화하며, 학부모의 올바른 교육적 요구를 받아들여 이 시대 이 땅의 참된 교육을 실천해 나갈 것이다.”

이후 학교마다 ‘학교민주화는 평교사의 손으로!’ 라는 구호로 사립학교가 주도하면서 학교마다 평교사협의회가 결성되었다. 동시에 구군별로 지역교사협의회가 결성되었다. 교사들은 발령과 함께 나도 모르게 가입되어 있던 대한교련(현 한국교총)을 탈퇴하기 시작했다. 전교협은 학교민주화를 위한 교장 선출보직제, 학생인권조례, 강제보충수업 야간자습, 학교간 비교학력고사 반대와 같은 정책을 추진했다.

그리고 교육계 악습으로 남아있던 ‘촌지거부’를 실천하는 운동을 펼쳤다. 특히 대구 중등교사들은 연수출장비지급을 요구하고, 사립교사 채용비리를 폭로했다. 마치 들불이 번지듯 교사들의 참교육을 향한 실천은 계속되었다.

교사협의회는 완전한 자주적 교원단체인 노동조합을 결성하기로 했다. 그렇게 교사들은 조금씩 ‘불길을 헤치고 물속을 헤엄치고 가시밭 돌무덤 바위산을 뚫고서 모두들···. 노래 크게 외쳐 부르면서’(신경림, 아아, 모두들 여기 모였구나) 힘차게 폭압을 견뎌내며 참교육 민주화의 길로 달려갔다. 모두들 마치 불나비처럼 그렇게. 교사들에게 자주적 교원단체는 절실했다. 공안정국을 뚫고 1,500여명의 교사 해직을 각오하면서까지 전교조를 결성한 이유는 모든 교사들이 교사로 살고 싶었던 절실함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임성무 전교조 대구지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