첩보원. 누군가는 정장을 빼입은 영국 신사를, 누군가는 비행기에 매달리고 고층 건물에서 뛰어내리는 등 온갖 고생을 겪는 미남 요원을, 누군가는 기억을 잃은 채 정부 기관에 쫓기는 전직 요원을 떠올릴 것이다.
첩보원이 처음 등장한 영화는 오스트리아 출신 프리츠 랑 감독이 연출한 <스파이(1928년)>다. 스릴러 거장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도 첩보원을 주제로 한 영화를 세 편이나 연출했다. 첩보물의 장르를 개척한 건 <007 시리즈>다. 영국 해군 정보부 첩보 분석가 출신 이안 플레밍 작가는 1953년부터 내놓은 소설이 1962년부터 영화화됐다.
60년 가까이 20여 편의 <007 시리즈>가 개봉했다. 엄청난 인기를 끈 <007 시리즈>는 첩보물의 전형적인 틀을 만들었다. 정장을 입는 미남, 능수능란한 말솜씨, 뛰어난 격투실력, 기상천외한 장비, 지구 정복하려는 악당, 비밀 기지, 핵잠수함과 거대 수송선, 화산 분화구와 우주선 등은 <007 시리즈>에서 익숙한 설정이다.
<007 시리즈>는 늘 시대를 앞서 예견했고 트렌드를 빠르게 반영했다. 개봉하는 새로운 시리즈마다 원격조종 비행체(드론), 생화학무기, 첨단 위성무기 등 각종 무기가 화려하게 등장했다. 특수기능이 있는 고급시계와 슈퍼카도 빼놓을 수 없다.
<007 시리즈>에서 가장 흥미로운 요소는 악당이다. 미국과 러시아(옛 소련)의 냉전을 확대시키려는 전쟁광이나 전쟁을 통해 막대한 수익을 올리려는 군사조직은 영화의 매력을 한층 더 끌어올렸다.
하지만 첩보물의 시대는 저물고 있다. 1980년대부터 점차 기울더니, 1991년 소련 해체로 막을 내렸다. 수십 년간 이어온 냉전을 바탕으로 인기를 끌던 첩보물은 시대 흐름을 타고 변화했다. 현대전이나 북한을 소재로 삼았다. <007 시리즈>도 영국 MI6 소속 제임스 본드와 옛 소련과의 끊임없는 대결에서 벗어났다.
<007 스카이폴>은 수십 년간 이어진 선·악 구도에서 탈피했다. 영화는 냉전 종식으로 쓸모없어진 첩보 기관처럼 새로운 시대에 필요 없어진 ‘제임스 본드의 추락’으로 문을 연다. 영국 첩보조직 MI6의 요원 제임스 본드(다니엘 크레이그)는 적을 잡으려고 달리는 열차 위에서 결투를 벌인다. 적의 손에서 요원들의 리스트가 담긴 하드디스크를 되찾기 위해서다.
본드가 총에 맞을 수도 있는데, M(주디 덴치)은 다른 요원 이브(나오미 해리스)에게 얼른 총을 쏘라고 지시한다. 본드는 총에 맞아 절벽으로 떨어진다. MI6는 실종된 본드를 사망처리 한다. 동료의 죽음 앞에서도 M의 지시에 따라 적을 쫓고, 국가를 위해 인생의 모든 것을 바친 본드의 최후다.
가까스로 살아난 본드는 숨어 살다가 MI6 기지가 폭발했다는 소식에 복귀한다. 본드는 현장투입을 위해 체력·두뇌테스트를 받지만, 예전 같지는 않다. 이브는 그런 본드를 보며 “새 재주를 보이려는 늙은 개” 같다고 말한다.
퇴물이 된 본드가 맞서 싸울 상대는 자신의 처지와 비슷하다. 라울 실바(하비에르 바르뎀)는 MI6의 유능한 첩보원이었지만, 버림받은 뒤 옛 조직을 공격하는 거악이 됐다. 가혹한 고문에도 M의 정체를 감췄지만, 자신을 소모품으로만 여기는 M에 분노했다. MI6의 유산이 새로운 위협이 된 것이다. 실바는 자신의 처지를 이렇게 비유한다.
“할머니가 소유한 섬이 어느 날 쥐로 들끓었어. 쥐를 어떻게 없앴는지 아나? 드럼통을 땅에 묻고 뚜껑에 미끼를 달아놓으면 먹이를 먹으러 온 쥐가 드럼통에 빠지는 거야. 한 달 쯤 지나니 죄다 잡히더군. 그다음엔? 통을 불태우나? 바다에 버리나? 아니, 그냥 내버려 두는 거야. 그러면 배가 고파지면 한 놈씩 서로를 잡아먹지. 결국 2마리만 남게 되었는데 이 녀석들은 숲으로 풀어 줘. 그럼 다른 쥐들을 사냥하고 다니지. 본성이 바뀐 거야”
실바의 조직은 첨단기술을 이용해 MI6를 짓밟는다. 실바의 목적은 M을 죽이는 게 아니라 파멸시키는 것이다. M은 실바의 계획대로 죄책감을 느끼고 숨을 거둔다.
<007 스카이폴>은 오락영화의 재미는 떨어진다. 본드는 악당을 처치하고 질서는 회복되는 이분법이 아니다. 적과의 액션 대결에 집중하지 않고 MI6의 근원을 송두리째 부정한다. 그리고 질서를 지킨다는 명분 속에서 국가의 첩보기관이 지난 반세기 동안 저지른 ‘악행’을 환기시킨다. 아이러니한 건 ‘음지에서 일하고 양지를 지향’하는 요원들이 얼마나 절실한 존재인지 역설한다. 영화는 영국의 시인 알프레드 테니슨의 율리우스 구절로 이를 설명한다.
“지난날 천지를 뒤흔들던 힘은 비록 이제 우리에게 없지만 지금의 우리도 우리도다.
한결처럼 변함없는 영웅적 기백/세월과 운명에 쇠약해 졌지만 의지는 강하도다.
분투하고 추구하고 반결하며 결코 굴하지 않으리라.”
과거를 되짚으면서 자신들의 존재 이유를 재확인하는 노스탤지어라는 점에서 영리한 전략으로 보인다. 스파이 시대는 지났어도 <007 시리즈>가 건재하다는 당위성을 설파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미·소 냉전의 울타리에서 나온 <007 시리즈>는 자유로워졌다. 임무 완수의 후련함은 덜해도 새로워질 <007 시리즈>를 기대하게 만들었는데, <007 스펙터(2015년)>가 망쳤다.
손선우 전 영남일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