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남자’ 또는 ‘이대남’이라 불리는 현상이 있고, 그와 짝을 이루는 ‘이여자’ 또는 ‘이대녀’ 현상이 있다고 한다. 전자가 20대 남성, 후자가 20대 여성에 대한, 주로 정치적인 성향과 관련된 표현임은 근래 많이 알려졌다. 지난달 있었던 지방자치단체장 보궐선거에서 이들의 투표 결과가 크게 화제가 되었기 때문이다.
보도에 따르면, 서울시장 선거 출구조사에서 20대 남성 투표자 72.5%가 오세훈 후보를 지지했고, 20대 여성 투표자 41%가 오세훈 후보에, 15%는 양대 정당 외의 군소정당에 투표했다. 20대 전체에서 오세훈 후보가 55%, 박영선 후보가 34%의 지지율을 획득했다. 이는 2020년 총선 전체 지역구 투표에서 20대 투표자 중 56%가 더불어민주당에, 32%가 미래통합당에 투표했던 결과가 완전히 뒤집힌 수치여서 특히 화제가 되었다.
그러나 일부 보도와 달리, ‘이남자’ ‘이대남’이 핵심어가 된 것은 이번 보궐선거를 통해서가 아니라 그보다 앞서서부터의 일이었다. 이 현상의 배경과 의미를 캐는 논의는 선거가 끝나고 열기가 한참 빠진 지금도 간헐적으로 이어진다. 무엇보다도 위에 적은 것처럼 전통적으로 민주당 계열을 포함하는 소위 ‘범좌파’ 진영의 지지층으로 이해되어온 20대가 그에 반하는 투표 양상을 보인 점이 계기가 되었다. 더불어 ‘이남자’들이 옳다고 보는 정치적 사안 중 몇몇 부분이 종래의 소위 ‘진보적’ 의제들과 충돌한다는 분석이 잇따라 제기된 것도 논의에 인화성을 더하지 않았나 한다.
비정규직 노동자의 정규직화가 정규직 취업을 모두가 노리는 경쟁 구도 속에서 공정의 가치를 파괴한다고 보는 점, 민주당 정권이 페미니즘 정책 기조를 유지한다고 인식하면서 이것이 남녀 간의 공정 경쟁을 해친다고까지 하는 점, 기득권 부유층의 이해관계에 시종일관 충실했던 정치세력보다 이를 적당히 비판하지만 크게 다를 바 없는 경제행위 방향을 택해온 정치세력에 더욱 크게 반발하는 점 등이 그러한 예에 해당할 것이다.
개인적인 소감을 말하자면, ‘이남자’가 개별적, 분산적, 파편적인 정치의식을 지니고 있으며, 특정 정치 이념이나 세력에 일관된 지지를 보이지도 않고, 심지어 앞뒤가 맞지 않는 주장을 하거나, ‘지적 계보’는 물론 구체적 대안도 없는 (가령 여성 징병의 요구 같은) 논쟁에 골몰한다는 지적이 인상적이었다. 이런 지적들은 대체로 ‘이남자’적인 정치의식은 물론 ‘이남자’라고 그 현상을 부르는 일 자체가 원인을 잘못짚은 것이어서, 해답도 잘못 찾아질 수밖에 없다고 여기는 것으로 보였다.
그렇다 보니 생물학적으로 ‘이남자’에 속하는 이들조차 ‘이남자’라는 용어를 불편해하기도 했다. 이들의 지적에는 공감이 가는 부분이 없지 않았다. 특히 세대 문제이기보다는 계급 문제일 가능성이 크다는 점, 20대끼리(가령 ‘이남자’와 ‘이여자’ 간에) 벌이는 ‘을의 전쟁’이 생산적이지 못하다는 점, 이들에게 장기적·구조적 시각이 부족해 보인다는 점, 코로나19로 인한 사회적 격리 상태가 ‘이남자’ 현상의 강경화를 부추겼을 가능성이 있다는 점 등에 대해서는 참고할 부분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동시에 ‘이남자’ 현상이 실제로는 대단히 효율적인 정치 전술이고, 효과의 면에서도 (적어도 현재로서는) 대단한 성공을 거두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혹은 조금 더 시야를 확대하여 ‘이여자’의 정치 행위들까지 염두에 둔다면, ‘이남자 이여자’는 자기 세대에 고유한 이슈를 독자적인 정치적 의제로 만들어가고 있는 역사적으로 매우 드문 세대에 속하며, 우리는 그 역사적으로 희귀한 광경을 목격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 글 자체도 그 아류 중 하나일 수 있겠지만, 이념의 좌우와 소속의 조야를 불문하고 다양한 정치인과 논객이 계속 헛다리를 짚어가며 엉뚱한 소리를 해대고, 그 의미와 배경을 파악하지 못해 횡설수설을 반복하고 있는 점이 그 전술적 성공의 한 중요한 징표일 것이다. 이런 양상은 특히 인류학적 아나키즘이라 불리는 입장에서 볼 때 그 정치적 의미가 각별해 보인다. 그냥 아나키즘도 낯선데 인류학적 아나키즘이라니, 무슨 말인지 도통 알 수 없는 현학적 이야기로 들릴 수도 있겠다.
아나키즘은 국가라는 중앙집중화된 권력에 의하지 않고도 개인의 절대 자유 원리에 기반을 두는 사회적 협력과 조화, 질서가 충분히 가능하며 또 바람직하다는 믿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현대적으로는 국가 시스템 안에서도 그와 같은 분산주의적인 정치 원리가 중요한 시스템적인 대안 또는 보완이 될 수 있다는 생각으로도 갈라져 왔다.
이에 덧붙은 인류학적이라는 수식어는, 그러한 생각이 위대한 사상가나 행동가의 이념, 혹은 대단한 봉기 현상이나 소요 사태 속에서만이 아니라, 보통 사람의 일상적인 행동 양식에서도 찾아진다는 점을 강조하려는 성향을 표현한다. 전통적으로 인류학은 국가가 존재하지 않거나, 그 존재가 미약하거나, 심지어 국가에 저항하기까지 하는 사회의 연구에 주력했다. 이 전통이 완전히 국가에 편입되어있는 사회들에 대한 오늘날 시점의 연구에까지 이어지면서, 국가의 존재와 역할을 상대화하려는 사고는 인류학자들 사이에 중대한 (때로 지나치다고 할 정도의)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런 견지에서 볼 때, 정치적 요구와 논쟁이 일관되지 않거나, 통일적인 의제를 형성하지 못하거나, 지나치게 구체적인 세부에 몰두하여 추상성, 일반성을 결여하고 있는 등의 특징은 하등의 문제가 되지 않고, 오히려 가끔은 바람직하기까지 한 것으로 여겨진다. 굳이 문자를 써서 표현하자면, “샛길을 택하지 않고 큰길을 간다(行不由徑)”는 유가적 문명론보다는 “길은 사람이 다니다 보면 절로 생겨난다(道行之而成)”는 도가적 자연론의 성향이라 할 수 있다.
이를 이룰 가장 효율적인 정치 전술은 전선으로부터의 철수, 정치 지도자에 대한 지지의 철회, 동원된 전장으로부터의 이탈 같은 것들이다. 여기에 창의성과 유희성이 더해질수록 그 전술은 극강의 완성도를 갖춘다.
반면 국가적 정치세력에 대한 열렬한 지지나 진심의 의존, 진지한 대변 요구는 정치적 자살의 길이기가 십상이다. 정치 지도자의 존재와 필요까지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일반인이 지도자를 대하는 가장 바람직한 방식은, 끝없이 요구하고, 이에 따라 베푸는 일을 지도자로서의 당연한 의무라고 간주하는 것이다. 또 그렇게 주어지는 것에 기본적으로 고마워는 하지만, 그 가치를 폄훼하거나 더한 요구를 이어감에도 주저함이 없다. 이런 목록을 계속 더해갈 수도 있겠지만, 이런 정도만으로도 인류학적 아나키즘이라 불리는 사고의 골자는 충분히 전달되었을 것으로 믿는다. ‘이남자’의 정치 전술과 유사성이 있지 않을까?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면, 한편 회의 섞인 궁금증이 드는 것은 과연 ‘이남자’ 현상이 하나의 정치 전략으로서도 유의미성과 효율성, 효과성을 갖추었는가 하는 점이다. 그것을 하나의 세대적 현상으로 규정하는 일에 당 세대에 속한 이들조차 대부분 불편을 느낀다면 사실상 논할 가치조차 없을 것이다. 또 그것이 진정 의미 있는 세대 현상이려면, 다른 사회과학적 변수들, 가령 계급·계층이라든가, 지역이라든가, 성별이라든가 하는 것들보다 더 강력하거나, 적어도 그에 맞먹는 규정력을 지니고 있고, 여러 사회현상에 대한 설명력에서도 더욱 발군의 능력을 보일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나아가 국가나 중앙집권적인 힘에 굳이 의거하지 않고도 그것이 사회적 협력과 조화, 질서를 구축하는 힘에 관하여 좀 더 큰 능력을 보고 싶기도 하다. 만일 그것이 다른 세대가 이루겠다고 떠들었지만 이루지 못한 것, 다른 세대가 부당하게 그 세대에 부과한 것에 저항해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낼 힘이라면, 무엇보다도 그 세대 안에서 지금보다 강력한 연대와 결합이 이루어져야 하지 않을까. 가령 ‘이남자’와 ‘이여자’ 사이에서도 적어도 몇 가지만이라도 공동의 행동 방침이 적어도 점차적으로라도 만들어져야 할 것이다. 그 길이 생겨나는 과정에서 양자 사이의 극한적인 대립이 불모의 것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이 글을 쓰면서 몇 가지 자료를 찾았는데, 그 검색 와중에 한 블로그에서 “현 이대남들은 사회 지도층에 여성 비율이 적고 대학교수 비율이 남성이 현저히 높고 이런 것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본인들이 그 위치에 있는 것도 아니고···”라는 글을 읽었다.
이들에게 장기적·구조적 시각이 부족한 점은 확실해 보인다. 그렇지만 그것은 강요할 일도 아니거니와, ‘지도층’에서 성비 불균형이 있다면 그 안에서 우선 불균형을 시정할 일인데, 우리는 ‘피지도층’에서 시정을 하는 것으로 ‘땜빵’을 해왔던 것이 아닐까.
불평등, 불공정, 불균형 ‘시정의 세대 간 전가’가 아닌 당대 내에서의 시정을 지금에 와서 어떻게 이룰 수 있을지 커다란 숙제를 안았다는 느낌이다. 솔직히 말해,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 숙제인지 도무지 원천적 해결의 실마리조차 떠오르지 않는다. 당연히 ‘이남자 이여자’에게만 숙고를 요청할 일이 아니다
안승택 경북대 고고인류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