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해 봄, 우리는 상주였습니다. 하루가 멀다 하고 분향소를 차려야 했고, 가슴에 검은 리본을 단 채 거리에 섰습니다. 벗들의 영정 사진을 들고 최루탄 연기 가득한 회색빛 아스팔트 위에 청춘의 독백을 아로새겼습니다. 슬픔을 꾹꾹 누르고, 쏟아지는 눈물도 누르고, 외쳤던 함성, 해체 민자당! 타도 노태우!
그해 여름, 우리는 아팠습니다. 열한 명의 열사를 떠나보냈지만 패륜아 손가락질을 받았습니다. 그것도 가난한 이들의 상처를 어루만져줘야 할 신부로부터, 탄압받는 이들을 위로해줘야 할 시인으로부터. 대학교를 방문한 총리에게 달걀을 던지고, 밀가루를 끼얹었다는 이유로 학생들은 잡혀갔고, 쫓겨 다녀야만 했습니다.
민주주의의 제단에 불꽃으로 타올랐던 열사들의 희생. 하지만 좌절하고 꺾이고 돌아선 상처 때문에 그날의 투쟁은 정당한 역사가 되지 못했습니다. 망각의 시간 속에 봉인되어 버렸습니다.
1991년 열사투쟁에 대한 ‘재조명’의 의미
1991년 오월의 열사투쟁이 30년을 맞았습니다. 당시를 기억하고, 당시의 투쟁에 참여했던 이들이 30년 만에 마음을 모았습니다. ‘1991년 열사투쟁 30주년 기념사업회’를 결성하고, 다양한 사업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이번 30주년 기념사업에서 핵심어는 ‘재조명’입니다. 이제까지는 많은 학생, 노동자, 시민들이 독재정권에 맞서 분신까지 하면서 투쟁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좌절하고 실패한 투쟁이었다는 인식이 많았습니다. 현상적으로만 본다면 그런 평가가 나올 수 있습니다.
1990년 1월의 노태우, 김영삼, 김종필 민자당 3당 합당을 규탄하고 민자당 해체를 내세웠지만, 1991년 6월 첫 지방선거에서 민자당은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민주진영은 왜소화됐고, 특히 민주진영의 주력을 담당했던 학생운동은 한국외국어대 학생들의 정원식 총리 달걀 투척 사건으로 보수언론에 의해 패륜집단으로 낙인찍히기도 했습니다. 자신감을 찾은 노태우 정권은 대대적인 공안탄압으로 구속자, 수배자를 양산했습니다. 그러면서 열사들의 투쟁은 조금씩 기억 속에 잊혀 갔습니다.
직선제 개헌이라는 구체적인 성과물을 쟁취해낸 1987년 6월항쟁과 달리 민주대개혁, 민중생존권 보장, 자주통일이라는 근본적인 과제를 내세운 1991년 열사투쟁은 피와 땀에 대한 뚜렷한 성과물 없이 소진되어 갔습니다. 그래서 더욱 주목받지 못하고, 패배적인 기억으로 남게 된 것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역사의 길이란 원래 그런 것이 아닐까요? 갑오년 동학혁명 때도 전봉준 장군은 처형당하고 무수한 농민군의 주검만 역사에 남은 듯하지만 농민군이 내세운 반외세, 반봉건의 시대정신은 20세기를 관통하는 역사가 되었습니다. 4.19혁명과 5.18광주항쟁도 시간이 흘러 민주주의의 상징으로 부활했습니다. 1991년 열사투쟁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30년이 지난 오늘, 우리는 이를 위해 다시 기억하고, ‘재조명’하고, 역사의 평가를 새롭게 부여해야 할 것입니다.
아스팔트 거리가 강의실이었던 시대
1991년 오월 열사투쟁 당시 저는 경북대 총학생회장이자 대구경북총학생회연합(대경총련) 의장과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 중앙위원으로 활동했습니다. 당시 학생운동의 핵심 간부였습니다. 수배 상태에서 집회와 시위를 주도하고, 투쟁 현장에서 대열을 이끄는 것이 저의 역할이었습니다.
안동대 김영균 학우가 분신한 뒤 생사의 갈림길에서 경북대병원으로 이송되어 왔을 때, 대경총련 수천의 학생들이 경북대 동인동 캠퍼스(현 경북대학교 의과대학)에 집결해 투쟁했던 순간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김영균 학우가 끝내 세상을 떠난 뒤, 동성로 대구백화점 앞을 가득 메운 채 ‘열사정신 계승’, ‘타도 노태우’, ‘해체 민자당’의 구호를 외치던 우리들의 얼굴, 함성, 눈물, 결의가 마음에 새겨지던 순간을 잊지 못합니다. 노동자, 농민의 연대, 시민의 응원 속에 한 달을 지속했던 투쟁은 지금도 가슴속에 또렷이 남아 있습니다.
밤새워 대자보를 쓰고, 투쟁 구호를 적은 피켓을 만들고, 전경의 최루탄과 백골단의 곤봉에 맞서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화염병을 들고, 돌을 던지던 그때의 모습은 지금의 대학생들에게는 상상할 수 없는 영화 속 장면일지도 모릅니다. 당시는 그것이 청년학생들의 임무였고, 역할이었습니다. 우리에게는 아스팔트 거리가 강의실이었고, 시대적 사명과 역사적 책임이 전공수업이었습니다. 그때의 기억이 오늘까지도 세상과 소통하는 통로가 되었습니다. 역사의 고비마다 집단지성을 발휘하는 동력이 되었습니다.
2002년 미군 장갑차에 깔려 죽은 여중생을 추모하는 촛불, 2008년 광우병 쇠고기 수입에 맞선 촛불, 2017년 탄핵 촛불···. 화염병과 짱돌이 촛불로 바뀌고, ‘폭력’ 시위가 ‘평화’ 시위로 달라졌지만, 그 속에 관통하는 정신과 마음은 30년 전과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20대의 정의와 공정, 민주주의를 풍부하게 만들 내용
최근 들어 20대 보수화에 대해 말들이 많습니다. 오늘의 20대는 어찌 보면 1987년 6월항쟁부터 1991년 열사투쟁까지 학생운동 세대의 자식들입니다. 세월의 흐름 속에 우리도 기성세대가 되었습니다. 우리 아버지 세대가 그랬듯이 자식 세대로부터 비판당하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청년세대가 기성세대를 비판하는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당연한 일입니다.
오늘 청년세대의 비판은 그들이 보수화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청년세대가 중요하게 여기는 정의와 공정은 우리 세대가 지켜내려고 했던 민주주의 가치와 대립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민주주의를 더욱 풍부하게 만들 내용입니다. 어쩌면 보수화된 것은 우리들입니다. 30년 전의 시대정신을 놓치고 있는 것도 우리들입니다. 행동이 아니라 말로, 나누려 하지 않고 지키려고만 든 건 우리들인지도 모릅니다.
1991년 열사투쟁 30주년을 기념하는 마음도 여기에서부터 시작하려고 합니다. ‘라떼’가 아닌, ‘꼰대’스럽지 않게 오늘의 20대와 공감할 수 있는지 먼저 고민하겠습니다. 정의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행동이 헛되지 않는 사회는 청년세대도 바라는 사회입니다. 누군가의 희생으로 사회가 발전한다면 그 희생을 값있게 평가하는 것은 모든 세대가 공감하는 부분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에게 먼저 묻습니다. 과연 우리는 오늘, 30년 전 열사를 기억하고 있는가. 그때의 시대정신을 여전히 실천하고 있는가. 우리의 기념사업도 여기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할 것입니다.
안영민 (사)평화의길 사무처장
1991년 열사투쟁 30주년 기념사업회 공동집행위원장
1991년 당시 경북대 총학생회장, 대구경북총학생회연합 의장1991년 강경대 열사를 비롯한 열사 투쟁 30주년을 맞아 투쟁을 재조명하고 계승하는 사업이 준비되고 있다. 대구경북 기념사업 준비위원회는 그 일환으로 당시를 겪고 기억하고, 계승하는 이들의 연속 기고를 <뉴스민>에 보내왔다. 1일부터 격주 목요일에 연재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