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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지 600일이 넘어 700일이 다 되어가지만, 참사의 진실과 생명의 존엄은 아직도 검고 차가운 바다 밑에 가라앉은 채 떠오를 줄을 모르고…긴 시간 대구 곳곳에서는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을 촉구하고 세월호의 온전한 인양과 미수습자 수습을 촉구하는 시민들의 자발적인 행동이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2016년 ‘세월호를 기억하는 대구사람들’ 첫 인터뷰는 동구 반야월에서 매주 피켓을 들고 노란 리본을 나눠주고 있는 반야월 촛불, 세 명의 엄마를 만나면서 시작됐다.
‘뭐하까’ 미연 씨, ‘뭐라도’ 영주 씨, ‘다하까’ 주은 씨, 세 명의 참 좋은 사람들. 이 사람들 이름 앞에 붙은 경상도 사투리 예명은 함께 울고 웃던 인터뷰 자리에서 즉석으로 만들어졌다.
세월호 참사만 생각하면 억울하고 화나서 못 살겠다고, 이렇게 한탄만 하고 있어서는 안 되겠다면서 ‘우리 이제 뭐 할까요? 뭐 하면 돼요?’를 연발하던 채미연 씨(동구 주민/45세)
‘세월호 참사의 진상을 밝히는 일은 그저 논리가 아니잖아요, 그냥 애들 목숨이잖아요’라며 사람마다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이라면 뭐라도 하자고, 소리 칠 사람 소리치고, 현수막 걸 수 있는 사람은 현수막 걸고, 노래할 사람은 노래하고, 자기가 할 수 있는 걸로 뭐든 하면 되지 않느냐고 ‘뭐라도’를 몇 번이나 힘주어 말하던 성영주 씨(동구 주민/42세).
그리고 유모차 부대와 함께 만 명의 서명을 받고 스스로 반야월 촛불을 찾아와 지금까지 세월호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자리라면 빠짐없이 지켜온, 정말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다 해온 ‘다하까’를 마다치 않은 김주은 씨(동구 주민/45세).
별이 된 아이들이 주고 간 세상에서 가장 아픈 선물
세 명의 촛불이 만난 건 세월호 참사가 일어나고 한두 달이 흐른 뒤였다. 마을 카페와 협동조합 활동을 해오던 영주 씨는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후 자연스럽게 마을 사람들과 함께 현수막도 붙이고, 동네촛불도 시작을 했다. 어느 날 현수막을 보고 ‘나도 같이하고 싶다’고, 어떻게 하면 되는지 물으며 주은 씨 스스로 마을 사람들을 찾아왔다고 한다.
“세월호 참사가 일어나고 난 후에 동네에 노란 현수막이 엄청 많았어요. 그 전에 철도민영화 반대하는 현수막도 보고 ‘안녕들 하십니까’ 대자보 보면서 나도 뭐든 같이 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그 현수막 단 사람들을 찾아가자고 마음먹고. 맨 처음 구의원에 출마한 후보 사무실도 찾아가 봤어요. 그런데 어느 날 ‘아띠도서관’에 갔는데 관장님이 천개의 바람 노래를 틀어 놓았더라고요. 거기서 그냥 눈물이 쏟아져서… 그리고 마을 사람들을 만났어요. 거기서 영주 씨도 만났지요.”
영주 씨는 지금은 웃으면서 이야기하지만, 그때는 그렇게 스스로 찾아온 주은 씨가 워낙 특별한 경우라 ‘왜 왔지? 경찰이 시켜서 온 거 아닐까?’하는 의구심을 갖기도 했다고 한다. 너무나 정당한 이야기조차 색안경을 끼고 대하는 대구 분위기 탓이었겠지만 언니에게 미안한 일이라고.
주은 씨는 앞에서도 잠시 언급했지만, 세월호 참사가 일어나고 나서 ‘엄마의 노란 손수건’ 카페 엄마들과 함께 유모차를 끌고 다니며 18일 만에 만 명의 세월호특별법 서명을 받아 유가족에게 전달하기도 했다.
“몇 날 며칠을 애들이 구조되는 걸 기다리면서 밤이고 낮이고 팩트TV 보고, 뉴스보고 그랬어요. 두 달 동안 내내 울면서 미친 듯이 지내가다 6월에 처음 선전전도 나갔지요. 그러면서 엄마의 노란 소수건 카페에도 가입했는데, 유모차 부대 엄마들이 영남대에서 첫날 하루 서명을 하고 다음 날 계명대에 간다는 글을 올렸어요. 다음날 바로 찾아가서 함께 했어요. 처음에 대학교에서 시작하면 중학교, 고등학교까지 두세 군데를 하루에 다녔어요. 엄마들이 좀 많은 날이면 두 조씩 나누어서. 그렇게 했더니 18일 만에 만 명을 넘겼어요. 진해 씨는 서명지를 집에서 가져가서 몇 명 받았다고 매일 올리고, 그러면 다들 너무 좋아서 어쩔 줄 모르고. 하루에 천 명도 받았어요.”
그때 이야기를 열심히 하던 주은 씨는 그때만 해도 특별법만 제정하면 다 해결될 줄 알았다. 그래서 벌써 끝나 있을 줄 알았다고, 아직 이러고 있을 거라고 생각도 못했다는 말을 덧붙였고, 우리는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처음에는 시간이 지나면 분명히 해결될 거라고 생각했어요. 솔직히 상상할 수도 없는 큰 사건이잖아요. 시끄럽다가도 차근차근 해결될 거라고, 증거도 나오고 처벌도 되고 그럴 줄 알았는데 아직도 이러고 있으니 이게 무슨 일인지 몰라요”라며 말문을 연 미연 씨도 주은 씨처럼 스스로 세월호대책위 활동을 찾아와서 동네 주민인 주은 씨와 영주 씨를 만났다.
“처음에는 열심히 하시는 분들 응원 좀 하고, 나라가 해결하는 걸 기다리면 될 줄 알았어요. 그런데 시간이 가면 갈수록 이상한 거예요. 이게 뭐지?, 어떻게 상황이 이렇게 돌아갈 수 있나, 이런 생각이 들면서 내가 한 발이라도 움직일 수 있으면 움직여야겠다는 생각, 응원하는 사람이 아니라 움직이는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또 주변 친구들에게 국가와 지도층이 이러면 안 되는 거 아니냐고 이야기를 했는데, 친구들이 왜 자꾸 그런 이야기를 하느냐고 그만두라고 해서 더 답답했지요. 그러던 때에 세월호 대구시민대책위에서 하는 행사를 알게 돼서 찾아갔고, 거기에 여기 두 사람이 있었어요.”
이렇게 세 사람이 만나 여기까지 함께 온 것이다.
뭐라고 해야 할까, 세월호 참사로 자식을 잃은 부모들이 함께 싸우는 유가족과 국민이야말로 숨져간 아이들이 주고 간 새로운 가족이고 선물이라는 말씀을 하시는데, 이 세 사람도 서로에게 얼마나 소중한 선물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별이 된 아이들은 알고 있을까? 세상에서 가장 귀하고 아픈 선물들이 땅에서 눈물로 반짝이고 있다는 것을.
여전히 지금 여기, 잔인한 나라
벌써 끝나 있을 줄 알았던 세월호 진상규명도 책임자 처벌이 아직도 안 되는 가운데 새해를 맞이한 요즘 심정이 어떤지를 물었다.
“세월호 참사는 그동안 부당하다고 느꼈던 사건들과 분명히 다른 것 같아요. 나라의 높은 사람들이 우리 편 아니라는 사실이야 원래부터 알았고, 억지로 간첩도 만들 수 있는 나라라는 걸 알았지만, 아이들 생목숨을 이렇게까지 아무렇지 않게 묻어버릴 수 있는 나라일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어요. 우리나라가 정말 이 정도인가, 세월호 참사는 지금까지 실망했던 실망을 다 모아놓은, 총체적인 실망감을 준 사건이에요”라며 영주 씨는 희생자들이 아이들이라서 그런지, 애를 키워본 사람이라서 그런지. 그 장면을 봐 버려서인지 뭐라고 딱 이유를 설명을 못 하겠지만 생각하면 아직도 눈물이 나고 아프다고 말했다.
어쩌면 이렇게 도무지 국민을 무서워하지도 않고 무뇌아 취급할 수 있는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화가 난다는 미연 씨는
“너무 잔인해요. 이 나라가. 최근 위안부 할머니들 대하는 모습도 마찬가지고, 국정교과서부터 백남기 농민 사건, 메르스 사태도 그렇고 끊임없이 사건으로 사건을 덮고 있잖아요. 이래도 다 당선되고 아무 문제 없다는 것을 철저하게 아는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나라가 왜 국민을 이렇게 만들어 놓는지 모르겠어요”라고. 그러면서도 한탄만 하고 있으면 안 된다며, 우리가 뭘 할지 이런 현실을 어떻게 깰지 방법을 찾아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자 주은 씨의 씩씩하고 확실한 답이 이어졌다.
“정권을 바꿔서 종편 없애야지!”라고 단박에!^^
세월호 행사장이나 집회장에서 주은 씨의 우는 것 같은 큰 눈을 만나면 나는 그만 어김없이 따라 울게 된다. 영주 씨도 주은 언니는 천상 여자에 천상 소녀일 줄 알았는데, 잘 울고 잘 분노하고, 나쁜 사람들 만나면 막 욕해주고 대들고 하는 모습이 인상적이라고 한다.
“영남대 앞에서 몇 번 싸웠어요. 그전에는 안 싸우려고 했는데, 문제는 가만있으니까 그 사람들이 자신들이 아는 게 옳은 줄 아는 거예요. 그래서 이러면 안 되겠다 싶어서 설명도 하고 막 세게 이야기를 하기도 했어요”라며 웃는다.
이어서 영주 씨가 ‘그러고 보면 대구는 우리나라의 대구고, 우리나라는 전 세계의 대구 같다’고 말해 우리는 맞장구를 치며, 서명전 하다가 나쁜 사람들 만나면 이렇게 하자며 수다를 떨었다.
우리보고 ‘아직도 하냐?’고 물으면, ‘그래요, 우리도 아직도 해서 정말 힘들어요. 제발 우리 그만 좀 하게 해 주세요, 도와주세요. 쇼핑도 하고 취미생활도 좀 하고 싶어요!’라고 말하자고.
‘돈 받고 나와서 하는 거냐?’고 묻는 사람에게는 ‘그러시는 분도 돈 받고 우리한테 묻는 거냐?’고 도로 물어보자고.
인터뷰를 할수록 대구의 다른 지역과 달리 엄마들이 중심이 되어 활동하다 보니 반대여론을 가진 사람들로부터 더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와서 시비를 거는 사람도 많고, 자기 자리라며 자리를 비켜 달라는 상인들도 있고, 얼마 전에는 누군가가 경찰에 신고해서 1인 시위 20m 간격을 지키라는 경찰의 조사와 지시사항을 듣는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고 한다.
우리가 세월호참사를 잊지 않고 여기에 있는 이유
그래도 이 씩씩한 엄마들, 잘 울고 잘 웃는 세 명에게 힘들지 않은 거 아닐 텐데, 여기 이렇게 열심히 남아 있는 이유를 물었다.
“혼자면 못했어요. 아무리 행동하고 싶었어도 혼자였으면 못 했어요. 같이 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여기까지 온 거지요. 그리고 너무 미안하잖아요, 애들한테. 너무 착하게만 키웠잖아요. 어른들 공경하고 말 잘 들으라고 가르쳤잖아요. 착하게만 살라고 가르쳤고, 그 아이들은 그냥 말 잘 들었잖아요. 그러니 너무 미안한 거지요…. ”
이 말을 하고 미연 씨는 또 한참을 울었다.
그러면서 방과후학교 전통놀이 수업을 하면서 신나게 떠드는 3, 4학년 개구쟁이들에게 자신도 모르게 ‘얘들아, 가만히 있어!’라고 말하고는 스스로 그 말이 얼마나 무서운 말인지를 깨닫고 화들짝 놀랐다고 한다. 이 땅에 사는 어른으로서 아이들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미연씨처럼 울지 않고 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는가.
영주 씨는
“곳곳에 문제가 많은데 한 사람이 다 할 순 없으니까 내가 여자면 여자 문제에, 엄마면 자식 문제에, 회사 다니는 사람이면 노동 문제에 가만히 있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우리 사는 삶이 정치문제 아닌 게 없잖아요. 사람들이 사느라 바빠 정치에 관심 없게 만들고, 정치 이야기 하는 사람은 특별한 사람인 양 좌파 빨갱이 운동권 이런 사람들인 양 생각하는 풍토가 바뀌었으면 좋겠어요.”
“저는 세월호를 잊지 않겠다는 약속 지키고 싶어요. 약속을 지키기 위해 하는 그 ‘뭐라도’가 지금은 거리 피켓선전인 거에요. 그동안 화가 났던 사건이 많았는데 왜 세월호문제 만큼은 계속 거리에 나오느냐고 물으면, 정확하게는 설명을 잘 못 하겠어요. 나도 자식이 너무 소중한 ‘엄마’라서 그런지는 몰라도.. 그냥 그렇게 해야 할 것 같았어요. 그리고 꼭 같이 안 해도 힘이 되어주는 눈빛, 음료수, 고생한다는 말 한마디, 열심히 한다고 보내주는 응원들이 우리를 여기까지 오게 도운 걸 거예요. 지금은 우리 세 명이 기본이지만 양희 대표님, 어린이도서관 김연희 관장님이 정기적으로 서명에 참가해 주셨고 그 외에도 많은 동네 분들이 함께 수고해 주신 게 큰 힘이 되었어요. 이런 동네 분위기가 없었다면 아마 계속하지 못했을 거예요”라고 말했다.
주은 씨의 답은 역시 깔끔한 핵심!
“우리가 서명받을 때 노란 바탕에 까만 리본 그려져 있고 ‘잊지 않을게. 끝까지 밝혀 줄게’라는 글자가 쓰인 현수막을 들고 아직 서명을 받고 있잖아요. 그렇게 말했으니까 끝까지 밝혀줘야지요.”라고.
붉은 원숭이해, 101마리째 원숭이
세 번째 인터뷰를 진행했다.
돌아보니 인터뷰를 하면서 제일 많이 웃고 울었다. 내가 인터뷰 진행자라는 것도 잊고 엄마들이 울 때 같이 울고, 웃었다. 인터뷰하면서도 울었고 녹취록을 풀면서도, 글을 쓰면서도 몇 번이나 눈물을 쏟았다. 아마 나와 비슷하게 아이들을 키우는 엄마들, 운동이나 논리가 아니라 마음으로 어려움을 이기며 여기까지 함께해 온 사람들이기 때문일지 모르겠다.
인터뷰 자리에 배석한 세월호참사대구시민대책위 김선우 공동실장의 말대로 세월호 참사는 기존의 여러 사건과 달리 노동운동이나 진보진영에 속한 사람들만이 아닌 모든 국민이 우리 사회 문제를 자기 문제로 깨닫게 한 사안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노동운동을 하거나 진보운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공부하고 직장 다니고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도 국가로부터 언제든지 버림받을 수 있고, 참혹한 죽음을 겪을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 사건. 그래서 이렇게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앞으로 싸움이 얼마나 길어질지 알 수 없는 중에도 많은 곳에서 많은 시민들이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을 하고 있고, 자기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이리라. 사람의 마음을 가진 귀한 사람들이.
붉은 원숭이해.?인터뷰 도중 우리는 어느 사회학자의 실험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고구마가 주식인 원숭이들이 섬에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한 마리의 원숭이가 고구마에 묻은 흙을 바닷물에 씻어 먹는 것이 목격됐다. 그로부터 두 마리, 세 마리, 다섯 마리, 열 마리의 원숭이들이 따라 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숫자가 차츰 늘어나던 어느 날 그 섬의 모든 원숭이가 일제히 고구마를 씻어 먹는 것이 목격된 날이 있었고, 그 날은 바로 101마리째의 원숭이가 출현한 날이었다고 한다.
“선전전 해 보면 ‘아직 해결이 안 됐어요? 아직 바다에 사람이 있어요?’라고 묻는 시민들을 많이 만납니다. 어느 정도 세월호가 해결된 줄 알던 시민들이 우리를 보고 다시 사실을 접하게 되고 질문을 합니다. 이 일이 지금 시기 우리가 해야 할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반대편에 서 있거나 이미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 우리 선전의 주요 대상은 아닙니다. 아파하고 기억했다가 지금은 잠시 잊은 사람들, 이들에게 잊지 않도록 해주고, 세월호 참사가 해결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알리는 것, 이것이 지금 우리가 할 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라는 김선우 상황실장의 말을 옮기며, 101마리째의 원숭이가 등장하기 위해 지금 내가 있어야 할 곳에 대해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