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미문화원폭파 누명을 쓰고 고문, 불법구금을 당한 이들의 재심 청구 재판 세 번째 심문 기일이 열렸다. 20대에 국보법위반 등으로 유죄 판결을 받은 이들은 이제 육순의 나이를 앞둔 상황. 국가가 뒤늦게라도 이들의 청구를 받아들여 진상을 밝힐 것인지에 관심이 모이고 있다.
26일 오후 5시 30분, 대구지법 제2형사단독부(부장판사 김태규)는 대구 미문화원 폭파 사건 관련 민간인 피해자에 대한 세 번째 심문기일을 열었다. 이날 재판장에는 청구인 5명 중 박종덕(57), 함종호(59), 손호만(58) 씨가 참석했다. 이들은 모두 1983년 대구미문화원 폭파 사건 당시 누명을 쓰고 구금·고문을 받았다고 주장한다.
이날 심문에서는 검찰과 변호인 측이 번갈아 청구인 모두를 심문했다. 재판부는 이날 심문을 종결했고, 3월경 재심 여부를 결정할 계획이다.
심문 당시 변호인(김진영 변호사, 법무법인 덕수)은 이들이 구금돼 조사받았던 대공분실·남부경찰서 등에서의 고문·가혹행위 내용을 심문했다. 변호인은 심문에 앞서 일부 청구인의 신문조서, 진술서, 1심 공판조서 등 청구인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증거 4건을 추가로 제출했다.
변호인은 ▲청구인의 당시 진술서 기재 내용과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위) 조사내용이 부합하며 ▲당시 대공 수사 관행과 분위기 ▲일부 수사관의 진실위 진술 내용 ▲고문기술자 이근안의 수사 참여 등을 종합할 때 20~30일간의 불법구금과 고문·가혹행위가 인정된다고 밝혔다.
김진영 변호사는 “수사기록 상으로 봐도 검거일이 1983년 10월 21~23일로 나와 있고 구속영장은 같은 해 10월 26일에야 발부됐다. 이것만으로도 불법구금이 성립한다”며 “검거일 전 이들의 신병이 어떻게 합법적으로 확보됐는지 기록이 전무한 상황에서 진술서 등 기재?내용과 진실위에서의 주장이 일치한다. 또한, 당시 대공 수사 관행과 분위기, 일부 수사관의 진실위에서의 진술 내용, 이근안 수사 참여 등을 종합하면 20~30일간의 불법구금과 고문 가혹행위를 당했다고 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반면 정윤정 대구지검 검사는 청구인 모두에게 ▲조사과정에서 강제 구금 여부 ▲당시에 항소하지 않고 재심을 청구한 사유 ▲재심 사유를 인정한 진실위 조사관과의 친분 여부 등을 집중적으로 물었다.
2015년 5월 재심을 청구한 이들이 1983년 12월 재판 당시에는 유죄 선고에 왜 항소하지 않았느냐는 것이다. 당시 이들은 국가보안법, 집시법 위반죄로 각각 1~3년 형의 실형이 선고됐다. 이들의 유죄 사유는 애초 수사의 빌미가 됐던 대구 미문화원 폭파사건과는 관련이 없었다. 판결 직전인 1983년 11월 3일, 대구시경찰청 수사본부는 ‘미문화원 폭파사건 수사상황 보고’를 통해 “관련 혐의자나 목격자를 발견할 수 없다”며 “북괴공작원 2~3명이 직접 침투하여 폭파 후 복귀한 것으로 판단되어 더 이상 수사를 계속하더라도 성과가 없을 것으로 전망되므로 본사건 수사를 종결한다”고 밝혔다.
이후 대구지법은 “역사와 증인 등 현실비판 의식화 서적을 탐독하고···현 정부는 언론자유가 없는 독재정권으로 학생시위로 타도되어야 한다는 망상에 젖은 자로···박종덕, 함종호, 손호만은 공모해 사회적 불안을 야기할 우려가 있는 시위를 계획하고···‘제국주의론’ 등 이적표현물 3권을 소지해 반국가단체를 이롭게 했다”며 검찰의 공소 사실을 인정해 유죄를 선고했다.
검찰의 심문에 박종덕 씨는 “새로운 증거가 나온 것은 없다. 지금 재판부도 크게 신뢰하지 않지만 그나마 이전보다는 나아졌고,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도 높아졌다”고 말했다.
함종호 씨도 “당시 재판장에서 손호만이 고문 주장을 했다. 그래도 재판장은 유죄 판결을 내렸다. 지금은 법정이 달라졌고 동일한 사실에 대해 판단도 달라질 것으로 보인다”며 “당시 불법 구금이었다는 것도 나중에 알게 됐다. 그만큼 민주화 운동하는 학생들이 국가로부터 상시 폭력에 노출된 상황이었다. 국정원 직원이 항소를 포기하면 1심에서 내보내?주겠다고도 했다”고 설명했다.
이날 재판부는 약 3시간 동안 심문에 참가한 청구인들 모두의 증언을 들었다. 청구인 일부는 고문 당시 상황을 증언하며 눈물을 보이기도 했고, 수사관의 언행 등을 구체적으로 묻는 심문에는 몸서리를 쳤다.
김태규 판사는 “지난번 (심문에는) 수사경찰관도 나왔지만, 당시 현장을 잘 아는 사람은 피고인이다. 서로의 입장이 있으니 어느 쪽이 객관적이기 말하기 어렵지만, 당시 겪었던 상황 이야기를 듣는 의미가 있다”고 설명했다.
대구 미문화원 폭파 사건은 1983년 9월 22일 대구시 수성구 삼덕동에 있던 미문화원에서 폭탄이 터지며 경찰 등 4명이 중경상을 입고 고등학생 1명이 사망한 사건이다. 공안당국은 경북대학교에서 학생운동을 주도하던 이들을 주도자로 지목하고 신청인들을 연행했다. 이들은 영장도 없이 원대동 대공분실로 끌려갔다. 박종덕 씨는?2005년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가 설립되자 조사를 신청했다. 함 씨 등 피해자 5명은 진실위의 조사에 응했다.
진실위는 이들에 대한 조사 결과를 2010년 조사보고서를 통해 밝혔다. 진실위는 “신청인이 약 30일간 불법구금된 상태에서 잠 안 재우기, 구타, 관절?뽑기 등 가혹 행위를 당하는 등 인권을 침해받았고, 미문화원 사건과 달리 별건 반국가단체 고무 찬양 동조죄 등으로 유죄판결을 받았다. 이는 관련 법에 따라 재심사유에 해당한다”고 지적했다.
앞으로 재심재판이 열리게 되면 수사기관의 불법구금과 가혹 행위의 사실 여부를 가리게 된다. 이외에도 이들이 유죄 판결 사유였던 ‘시위예비음모’, ‘반국가단체 고무·찬양·동조’, ‘이적표현물 소지’에 대한 법원의 판단도 다시 내려질 것으로 보인다.
관련기사:’83년 대구미문화원 폭파’ 누명쓰고 고문·투옥당한 이들, 재심청구 /대구미문화원폭파 누명에 고문···명예회복 ‘첩첩산중’/ [대구미문화원폭파재심] 원대동 대공분실 수사관 증인 심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