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 민중가수인 싱어송라이터 김가영의 공연에 다녀왔다. 대구 남산동 소재 전태일 열사 생거지에 기념관을 건립하려는 모금 운동의 일환으로 열리는 자리였고, 경북대 교수노조(전국국공립대학교수노조 경북대지회) 차원의 단체 관람이었다(물론 방역지침을 준수하면서!). 올 11월 13일은 전태일 열사가 분신 서거한 지 만 50년이 되는 날이다. 이에 맞추어 대구의 가락 스튜디오에서는 30팀의 아티스트가 연일 공연을 이어가고 있고, 11월 3일부터는 역시 대구에 있는 아트스페이스 루모스에서 같은 취지의 미술 전시회가 진행된다. 모두가 전태일의 그 날, 11월 13일을 과녁으로 삼아 달려가는 행사들이다.
전태일은 대구에서 가난한 봉제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나 유년 시절을 보냈고, 이후 생계의 활로를 찾아 부산과 서울을 오가다가도, 그런 노력이 벽에 부딪히면 다시 대구로 돌아오고는 하면서 소년기를 지났다. 1948년생인 그가 서울 청계천의 평화시장에서 재단사 조직인 바보회를 만든 것이 1969년, 이후 잠시 건설노동자로 일하고 나서 평화시장으로 돌아와 노동운동을 하다가 현장의 참혹한 현실을 호소하며 분신한 것이 1970년의 일이었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는 외침과 함께. 그때 나이가 만 22세였다.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을 정보, 소위 ‘TMI’(too much information, ‘너무 많은 정보’의 약자)겠지만, 1970년은 내가 태어난 해이기도 하다. 그런데 위에 언급한 공연에서 김가영 가수가 설명하기를, 자신이 노래를 시작한 것은 1989년 영남대학교 노래패에 들어가 민중가요를 부르면서였다고 했다. 1989년은 내가 대학에 들어가던 해였으니, 김가영 역시 전태일 열사가 사망하던 1970년 무렵 태어난 것이 아닌가 싶었다. 1989년이면 지금으로부터 약 30년 전이다. 그 점을 생각하면서 공연 와중에 머릿속이 아득해졌다. 그는 무려 30년이나 한길을 걸었고, 내내 민중가수로 활동하며 노래를 만들고 또 불러온 것이다. 하, 30년!
그런데 관심법 오작동인지는 몰라도, 그는 조금 지쳐 보였다. 자리를 채워줘서 감사하다는 인사 앞에 나온 말, 객석이 텅 비면 어쩌나 걱정했다는 이야기가 무겁게 들렸고(같은 걱정을 하고 있었기 때문일까?), 음향(감독 혹은 시스템)과 합이 잘 안 맞는 듯 MR(연주팀이 없을 때 트는 녹음된 연주음악을 말하는데, 찾아보니 ‘콩글리시’라고 한다)을 타기보다 씨름하는 느낌이었다. 근엄하게 전체 객석의 반을 차지하고 앉은 ‘교수노조원’들이 청중으로서는 부담스러워서일까? 이쪽은 이쪽대로 생각이 많아지는데, 나중에 조금 속도가 있고 박자도 강한 노래에 박수를 맞추니, “그래도 빠른 노래에 호응이 좋으시네요. 민중가요도 빠른 노래로 만들어야 할까요?”라며 듣는 쪽도 고민스러워지는 말을 걸어온다. 나는 왜 박수로 박자를 맞췄을까? 이쪽은 이쪽대로 학생 가르치는 일이 정말 내가 잘하는 일인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 고민인 판이라, 하는 종목은 달라도 남의 얘기일 수 없었다. 그러고 보니, 나도, 그도, 둘 다 ‘쉰 즈음’이었다. 헛, 50살!
그렇게 공연에 몰입을 못 하고 이 생각 저 생각을 하는데, 그가 ‘저 평등의 땅에’를 부르기 시작했다. 권진원 가수가 이 노래를 부르는 것을 듣고, 어떻게 하면 저렇게 노래를 잘할 수 있을까 감탄하면서 김가영은 그 노래를 익혔다고 했다. 권진원도 그렇지만 이 노래는 내게도 그에 사로잡히게 한 기억이 있다. 학부 졸업을 1년 반 남짓 앞둔 초겨울, 취업 준비를 하느라 아침 일찍 도서관으로 향하는 계단 길을 오르는데, 아침 학교방송(그때는 그런 것이 있었다)이 ‘저 평등의 땅에’를 틀었다. “저 하늘 아래 미움을 받은 별처럼, 저 바다 깊이 비늘 잃은 물고기처럼···우리 노동자의 긍지와 눈물을 모아, 저 넓디넓은 평등의 땅 위에 뿌리리, 우리의 긍지, 우리의 눈물” 그 노래다. 떠오르는 아침 해를 받으며 저마다 비탈을 오르는 학우들의 모습이 노래에 겹쳐 뭔가 뭉클함을 느꼈는데, 아뿔싸, 그들도, 나도, 모두 좋은 직장 잡아 나 먼저 잘살겠다며 아침부터 도서관에 틀어박혀 평등이고 뭐고 세상 돌아가는 일에 담을 쌓으러 가는 길이 아닌가. 나의 유치한 감상이 알량한 욕망의 ‘모닝커피’ 같은 것이란 생각에 한 대 맞았고, 이후 그 노래는 만들어진 본뜻과 달리 그 시절 나의 낭패감을 상기하는 곡이 되었다.
한편 권진원은 당대 엘리트 가수의 등용문이던 MBC 강변가요제 출신이면서, 운동권 배경의 노래패인 ‘노래를 찾는 사람들’(노찾사)에서 민중가수로 활동했고, 한참 후에 다시 대중가요 가수로도 족적을 남긴 특이한 경력의 가수다. 음역이 넓지 않은 것 같은데 높낮이의 표현이 탁월하며, 따뜻한데 힘찬, 매우 신기한 소리를 맡아 가진 사람이기도 하다. 그가 대학 졸업 후 노찾사에 본격 참여한 것이 1988년, 김가영이 영남대에서 민중가요를 부르게 되기 직전 해다. 그런데 자작곡인 ‘지난 여름밤의 이야기’로 강변가요제 은상을 받은 것은 1985년의 일이었다. 그 후렴은 “조금만 뛰어올라도 달빛 스민 하늘에 닿을 것만 같다고 했었지, 조금 더 뛰어 올라서서 수많은 별들을 모두 품에 안아보자 그랬지, 이제는 그 밤 돌이킬 수 없음에 하릴없이 먼 하늘만 바라볼 뿐”이라고 진행된다. 이루지 못한 꿈을 새기며 허탈해하는 노래로 방송국 주최 가요제에서 큰 상을 타는 꿈을 이뤘는데, 곧바로 그 길을 버리고 민중가수로 전환하는 행적은 그의 목소리만큼이나 그때 내게 신비로웠다. 물론 나는 그처럼 살지 못했다.
그 전환이 그저 당대 대학생의 주류 정서를 따른 것이라고 할 수도 있다. 또 우리는 모두 늘상 이리저리 오락가락하며 살기 마련인 존재이다. 그렇게 탈신비화를 시켜야 할까? 그러나 평범해서 완만한 변곡과 극에서 극을 오가는 변곡의 차이는 엄연하며, 의미도 크다. 게다가 10년 후쯤 대유행을 하게 된 후일담 문학풍의 상투적 감각으로는 ‘저 평등의 땅에’ 다음에 ‘지난 여름밤의 이야기’가 와야 할 듯한데, 실제는 역순이었다. 그는 무엇을 보았을까. 직접 확인한 것은 아니지만, 매체들에 따르면 1987년 노찾사의 공연을 본 것이 그가 민중가수로 전환한 계기였다. 또 솔로 대중가수로의 전환은 결혼, 출산, 육아로 인해 단체 활동이 어려워진 사정과 관련 있었다. 변곡선 궤적은 극적이지만 변곡점은 일반적이어서, 우리의 삶과 다를 바 없다. 그 1987년, 특히 6월 항쟁에 이어 7, 8, 9월에 전개된 소위 ‘노동자 대투쟁’의 배경에, 박종철, 이한열과 함께, 가깝게는 광주, 멀게는 전태일이 있었음을 우리는 잘 안다.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 국면을 87년 체제라고 규정하는 논의가 있다. 이 논의에 대한 찬반 여하와 별도로, 1987년이 많은 것을 규정한 중요 계기였고 이후 하나의 새로운 세계가 열린 것은 분명하다. 새로운 세계가 성립한다는 것은 그 직접적 계기가 된 사건이 ‘뻥’ 하고 터져서 이루어지는 일일 수 없다. 그것은 다양한 시간 지속을 지닌 힘들이 함께 작용한 결과이다. 좋든 싫든, 인식하든 안 하든, 오늘 우리는 전태일이 만든 세계에서 살아간다.
그 안에서, 어떤 이는 30년 내내 한길을 걸으며 살았고, 어떤 이는 몇 차례 극적으로 변곡하면서 그때마다 자기만의 발자국을 남기고 살았으며, 어떤 이는 나처럼 이리 구불 저리 구불 거의 오락가락 수준으로 살면서 어떤 지점에서도 이름을 남길 만한 일을 못 한 채로 살았다. 그러나 전태일이 만든 세계는 실제로 분신한 전태일이 귀신이 되어 만든 것이 아니라, 그 세 종류의 사람이 함께, 그리고 더 많은 부류의 사람까지 더하여, 다 함께 전태일을 기억하면서 만든 세계이기도 하다. 그러니 전태일 열사 50주기는 우리가 만들어낸 세계의 50회 생일도 된다. 나의 생일도, 너의 생일도 아니고, 우리가 만들고 살아가는 세계의 생일인데, 그 뜻을 되새겨보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그의 죽음을, 우리 세계의 탄생을, 헛되이 하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