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은 막을 수 없는 거야. 너를 기다려주지 않을 거고. 그게 바로 ‘허무’야.”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No Country For Old Men, 2007년)>에 나오는 대사다. 연쇄살인범을 쫓는 늙고 무력한 보안관 에드 톰 벨(토미 리 존스)에게 한 노인이 이렇게 말한다. 벨은 할아버지와 아버지에 이어 3대째 마을을 지키고 있는 연륜의 보안관이다. 하지만 그는 영화 내내 추격은커녕 범인의 흔적을 뒤늦게 찾는다. 지혜와 존경의 대상인 노인의 무기력한 모습에 영화의 메시지가 담겨 있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2007년 퓰리처상을 수상한 미국의 소설가 코맥 맥카시의 장편 스릴러(2005년작)가 원작이다. 코엔 형제가 연출한 영화는 제80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을 비롯해 4개 부문에 수상했다. 장르는 스릴러이고, 내용은 1980년대 미국 텍사스를 배경으로 돈 가방을 놓고 사냥꾼과 사이코 연쇄살인마가 벌이는 추격전이다.
베트남 전쟁에 참전한 이력이 있는 사냥꾼 르웰린 모스(조슈 브롤린)는 사막 한복판에서 총격전이 벌어진 현장에 우연히 도착한다. 상황을 살피던 그는 200만 달러가 든 가방을 손에 넣게 된다. 죽어가는 범죄조직의 조직원이 그에게 물 한 모금을 달라고 부탁하지만, 이를 외면하고 그곳을 떠난다. 집에 도착한 모스는 뒤늦게 생존자의 요청을 거절한 게 떠올라 새벽에 물을 챙겨 사건 현장을 다시 찾는다. 이 때문에 그곳에 숨어있던 범죄조직의 잔당에 쫓기다가 부상을 당한 채 가까스로 피한다. 모스는 아내 칼라(켈리 맥도날드)를 친정으로 보내고 자신도 추적을 피해 숨는다.
현장에서 모스가 남긴 흔적을 따라 그를 추격하는 안톤 시거(하비에르 바르뎀)는 특이한 살인마다. 단발머리에 촌스런 의상을 입은 차림새로, 무지비한 살인 행각을 일삼는다. 그의 살인에는 아무 이유도, 맥락도, 감정, 갈등, 쾌락도 없다. 그의 철학은 운에 따라 공평하게 살해하는 것이다. 자신의 신경을 거슬리게 한 잡화점 주인을 동전을 던져 죽일지 말지 고민하는 장면에서 잘 드러난다.
또 시거는 사이코패스의 특성인 ‘타인에 대한 공감과 이해 능력 부족’이 극단적으로 나타난다. 살상의 대상을 가리지 않고 타인을 이해하려 하지 않는 탓에 협상이나 대화의 여지가 없다. 자신을 체포한 보안관을 살해하고 차를 훔치기 위해 도살용 공기총으로 운전자의 이마를 뚫어 생명을 빼앗는다. 시거가 든 도살용 공기총은 가축을 도살할 때 쓰는 도구인데 이를 살인하는데 쓴다는 점을 견줘, 그가 살해 대상을 어떻게 생각하는 지 보여주는 장치다. 아이러니하게도 시거는 망설임 없이 살인을 저지르면서도 몸에 피가 묻는 것을 싫어한다. 잠긴 문을 열 때 도살용 공기총으로 문고리를 부수고, 신발이나 옷에 피가 튀지 않게 막는다.
보안관 벨은 이 둘은 쫓는다. 집안 대대로 보안관을 지내왔고,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군인 출신인 그는 수십 년 동안 여러 범죄자를 마주했다. 하지만 이번 살인사건은 그간 쌓인 경험과 지혜로는 썩 이해가 되지 않는다. 범죄 현장에 인과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벨은 행적을 해독을 할 수 없는 시거를 쫓으며 절망감을 느낀다. 빠르게 변하고 갈수록 무자비해지는 사회에서 과거에만 머물러 있는 존재는 무기력할 수밖에 없다.
모스와 시거, 그리고 범죄 조직의 추격에서 도덕과 자비, 정의 등 ‘인간미’는 결여되어 있다. 선과 악도 불분명하다. 그저 서로를 죽고 죽일 뿐이다. 섬뜩한 인간 군상이 가득한 영화에서 유일하게 양심적이고 이성적인 벨은 무능하다. 벨은 말한다. “예전에는 나이 먹으면 하느님께서 살펴주시겠지 싶었지만, 헛된 바람이었다.” 실상도 다르지 않다. 세상에는 이해할 수 없는 범죄가 너무 많아졌다. 과거에는 범인이 남긴 몇 가지 단서만 보고도 유능한 수사 인력이 범인을 단박에 알아차린다고 믿었다. 가상인물이지만, 셜록 홈즈와 에르퀼 푸아로 등 명탐정에 열광하는 이유가 이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는 설득력 없는 환상에 불과하다.
빠르게 변해가는 세상 속에서 셜록 홈즈가, 에르퀼 푸아로가 시거의 존재를 밝혀낼 수 있을까? 현대는 연륜의 지혜를 가진 현명한 인물이 예측한 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우연으로 흐름이 송두리째 바뀌고,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결과가 발생한다. 정해진 운명은 없고 세상사는 우연과 선택에 불과하다는 메시지는 강렬하다. 모스와 약속 탓에 자신을 찾은 시거가 동전을 던져 칼라의 생사를 정하려고 할 때 칼라는 “동전이 결정하는 게 아니라 당신이 결정해야 한다”고 말한다. 인생을 운이나 우연에 맡기지 말라는 뜻인데, 시거는 “나 역시 동전과 같이 여기에 왔다”고 답변한다.
영화와 소설은 차이가 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거짓된 훈장을 받아 죄책감을 느끼던 벨은 노년에 가서 보안관을 그만둔다. 그리고 범죄자의 총을 남몰래 주워서 상점에 팔아버린 아이를 바라보며 이런 말을 한다. “네가 무심코 한 일이 평생 동안 네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아직 모르는구나.” 그리고 덧붙인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영화는 러닝타임 내내 날 선 긴장감이 감돈다. 효과음악이나 음향효과 하나 없이 극적인 긴장감을 유지시킨다. 차분하고 과묵한 행동으로 기괴한 공포심을 자극하는 시거의 추격은 관객을 압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