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선우] 팬덤의 두 얼굴 ‘더 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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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광 길 레너드(로버트 드 니로)는 명품 수준의 사냥용 칼의 판매를 고집하는 나이프 판매사원이다. 괄괄한 성격 탓에 회사 동료들은 물론 거래처도 그에게 등을 돌린다. 자신이 이루지 못한 메이저리거의 꿈을 어린 아들이 이뤄주길 바라는 마음에 훈육하는데 남의 눈에 비친 모습은 학대에 가깝다. 결국 아내에게 이혼당하고 법원에서는 접근금지 명령이 내려진다. 아무런 희망이 남지 않은 그에게 남은 즐거움은 야구 스타 바비 레이번(웨슬리 스나입스)를 응원하는 것이다.

바비 레이번(웨슬리 스나입스)은 3년 연속 최우수선수(MVP)상을 수상한 메이저리그 최고 타자다. 그가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로 이적해온다는 소식을 듣고 길은 누구보다 기뻐한다. 물론 바비는 길의 존재를 알지 못한다. 바비에게 길은 ‘팬’이라 분류되는 불특정 다수 중 하나다. 하지만 길은 바비의 모든 것을 낱낱이 꿰고 있다.

그런데 바비는 이적 후 슬럼프를 겪고 있다. 개막전에서 갈비뼈를 다친 뒤 한동안 타율이 1할대에 머문다. 길은 바비의 성공을 위해서라면 어떤 짓이든 할 수 있다고 여긴다. 실적 부진으로 실직까지 되면서 바비에게 더욱 집착한다. 격려를 해주려 라커룸에 전화를 걸고 카페에서 혼자 외로워하는 바비에게 다가가지만 외면당한다. 바비의 행적을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던 길은 바비가 그의 팀 동료이자 경쟁자 후안 프리모(베네치오 델 토로)와 등번호로 다툼을 벌이는 것을 목격한다. 길은 바비의 슬럼프가 후안 때문이라고 단정 짓는다. 며칠 뒤 후안은 칼에 찔려 숨진 채 발견된다. 바비는 후안의 갑작스런 죽음 이후 슬럼프를 극복한다.

그 후 어느 날, 해변가에서 바비의 아들 숀이 물에 빠지고 길이 어디선가 나타나 션을 구한다. 그는 경쟁자를 없애주고 아들까지 구해준 은인인 자신에게 바비가 보여줄 감사에 흥분한다. 바비가 꿈에 그리던 우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비를 직접 만난 길은 낙담한다. 팬을 비하하고 조롱하는 바비의 발언 때문이다. 환멸에 빠진 길은 숀을 납치한 뒤 바비에게 전화를 걸어 자신을 위해 홈런을 치라고 협박한다.

토니 스콧 감독이 연출을 맡은 <더 팬(1996년)>은 팬덤 문화의 어두운 단면을 극단적으로 나타낸 영화다. 야구영화라기보다는 스릴러에 가깝다. 스타와 팬의 관계에 대한 사회심리학적 통찰을 담고 있다. 팬(fan)은 ‘특정한 인물이나 분야를 열성적으로 좋아하는 사람’을 뜻한다. 대중문화가 확산되면서 팬덤이 생겨나 문화적 영향력을 행사한다. 선망하는 대상을 좋아해 응원하는 것은 자연스런 일이다. 그런데 팬은 광적인 선호나 집착이란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팬이라는 단어는 광신자를 의미하는 ‘퍼내틱(fanatic)’을 줄인 말이다.

전문가들은 대중 스타를 우상화하는 팬이 현대사회의 보편적 현상이라고 설명한다. 스타는 팬의 열렬한 지지와 동경, 애정으로 부와 명성을 거머쥐게 되는 게 당연하고, 그 대가로 공인(公人)으로서의 책임도 떠안게 되는 건 당연한 수순이라는 것이다. 이 때문에 스타는 문화권력이 된 팬덤의 양날의 검 위를 아슬아슬하게 걷는다. 국내에서만 수많은 스타들이 부와 인기를 얻고 치명상을 입었다. 스타와 팬이 어떻게 맞부딪칠 수 있을까. 본래 애정과 증오는 한 몸이다. 애정의 극단은 증오의 꼬리를 물고 있다.

문제는 공인이라는 이유로 개인이 감당하게 되는 것이 너무 버겁다는 점이다. 공인이란 사회정의와 공익을 실현하고, 도덕적이고 정당한 공적 활동으로 국민의 귀감이 되어야 하는 존재다. 이들에 관한 정보는 공공성을 갖춘 것이므로 알 권리에 포함된다. 이런 관점에서는 연예인이나 유명인을 공인 내지 공적 인물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공공의 관심사 또는 유명도를 기준으로 공적 인물의 범주에 포함시키는 것도 문제가 있다. 노래나 춤, 연기, 운동 연습에만 매진하던 이들이 단지 사회적 영향력을 가져서, 공직자와 같은 공인으로서의 높은 도덕성과 책임감을 가져야 하는 게 과연 맞는가.

더 큰 문제는 대중 스타에 이어 방송을 하는 개인을 공인의 범주에 포함시켜 언론 보도의 한 단면이나 편집된 방송의 장면만 보고 유추하고, 구체적인 사실 확인이나 제대로 된 근거도 없이 의혹으로 포장된 적개심과 맹목적 증오를 내뿜는다는 점이다. 그럴 때마다 그들은 ‘사회 해악’으로 전시된다. 마약이나 음주운전 등 범죄로 사회적 물의를 빚은 것도 아닌데 말 한마디에 악당으로 취급된다. SNS가 대중화된 이후론 댓글 창은 악플로 엉망진창이고, 해당 댓글이 삭제되면 왜 댓글을 지우냐고 힐난한다.

이러한 행위는 ‘정의’로 포장된다. ‘악당’에게 악플을 다는 것이 마치 정의의 사도의 의무로 여기는 이들은 많다. 그런데 과연 정의로운 행동일까? 대중적 인지도에 의해 공인이 된 특정인을 향해 내뿜는 정의치곤 지나친 데가 많다. 정의로운 비판은 그 대상이 자성과 성찰을 이끌어내는 것이지, 인격적 모멸감을 주는 것이 아니다. 의견 제시와 악의적 비난의 경계는 분명히 나눠진다. 심각한 욕설과 인신공격은 정당한 이유, 표현의 자유를 넘어선 폭력일 뿐이다.

우리가 경계해야 하고 주목해야 할 것은 유명인의 숨겨진 모습이나 실망스런 인성 등의 면면이 아니다. 팬으로 포장된 군중 속에 숨어 현실에서 스스로를 퇴행시키고 특정인에게 자신을 투사하는 것이다. 현실에 무뎌질수록 가상의 공간 속 광기는 커진다. 자신이 특정인과 진심으로 소통하고 있고 자신과 특별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착각에 빠져 누군가를 지지, 동경하다가도 사소한 이유로 힐난한다. 그런데 기대하는 가치나 믿음이 무너질 경우 가장 위험한 적이 될 수 있다. 자신이 그럴수록 특정인에게 욕을 하거나 모욕을 주고, 마음에 작은 위안을 얻게 된다. 베를린 예술대 한병철 교수는 책 ‘심리정치’에서 “서사를 상실한 악플은 흥분의 물결”이라고 지적했다.